학교기담 1편 | 8년(8 Years) | 드디어 살인의 이유를 밝히다
<시작은 범상치 않다> |
장르가 ‘공포’라는 이유만으로 제목도 태생도 모른 채 재생을 시작했고, 역시 ‘공포’답게 첫 장면부터 사람이 평범하지 않게 죽는다.
한 여교사가 ─ 내가 학교 다녔을 땐 상상도 하지 못했던 ─ 잔디 운동장 한복판에서 희붐하니 밝아오는 새벽빛에 아슴아슴 정체를 드러내는 학교 건물을 등진 채 부자유스러운 공중 부유 자세로 죽음을 맞이한다. 꼭 보이지 않는 거인의 손에 목이 졸린 것 같다. 그리고 이때다 싶었는지 아직도 공중에 두둥실 더 있는 여교사의 시체를 뒤로한 채 누군가 휘갈겨 쓴 듯한 글자로 화면에 영화 제목이 새겨진다.
이때까지도 막 잠에서 깨어난 듯한 비몽사몽 상태가 절반, 나머지 절반은 아무 생각 없는 무의식 상태였던 나는 화면에 핏물 위로 선뜩하게 새겨지는 흰색 글자가 영화 제목을 말해주는 것 정도까지는 인지하고 있었지만, 눈에 무엇이 끼얹는지 ‘년’이라는 글자만 대강 이해한 채 심드렁한 마음으로 다음 장면을 기대한다.
<저게 숫자 '8'로 보일까? 아니면 벌레로 보일까?> |
공포영화이니만큼 한 사람의 죽음으론 부족했을 것이다. 여교사가 당했던 수법 그대로 교장도 살해당한다. 그들은 살아생전에 저주라도 받았던 것일까? 희생자 목 언저리에는 달군 쇠로 낙인을 찍은 듯한 숫자 ‘8’ 문양이 남겨져 있다.
이 기괴한 사건에 고등학교 동창으로 보이는 세 남자가 스며든다. 한 남자는 모교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을 수사하는 형사로, 한 남자는 모교로 부임한 선생으로, 그리고 또 다른 한 남자는 엑소시즘으로 악마를 물리친다는 구마 사제로서 8년 만에 재회한 세 사람은 연쇄살인을 안줏거리로 회합의 잔을 기울이게 된 셈이다.
과학적인 수사 방법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형사에게 용의자는 당연히 사람이겠지만, 악마를 믿는 사제에게 있어선 살인자가 꼭 사람일 필요는 없다. 더군다나 친구의 제자로부터 귀신을 목격했다는 말을 들은 사제는 엑소시즘으로 사건을 해결하려 든다.
세 사람은 갈수록 오리무중으로 빠지는 듯한 사건 속에서 각기 다른 이유로 8년 전에 죽은 여자친구를 떠올리게 된다.
<8년 후 돌아오겠다는 의지의 표시일까?> |
공포영화도 참으로 다양한 종류가 있다. 이야기나 개연성 나발이고 다짜고짜 살육의 잔치를 벌이며 섬뜩한 피의 향연을 벌이는 영화가 있는 반면에, 보이는 잔인함에 치중하기보다는 이야기로 승부를 보려는 공포영화도 있다. 「8년(8 Years)」은 당당히 후자라고 말할 수 있겠다. ‘전설의 고향’의 영향 때문일까? 아니면 이야기 듣기를 즐기는 한국인의 정서 때문일까? 한국의 공포영화는 외적인 공포보다는 사연을 진득하게 표현하려는 경향이 짙다.
공포영화에 ‘이야기’라고 한다면, 그것도 귀신이 등장해야 한다면 퍼뜩 떠오르는 것은 ‘원한’과 ‘복수’다. 원한이 없다면 복수가 없고, 복수가 없다면 죽음도 없으므로 이야기에 특색을 가미하고 싶다면, 이 ‘원한’을 짜임새 있게 구성해야 할 뿐만 아니라 추리소설의 트릭처럼 관객이 단박에 눈치채지 못하도록 연막을 잘 쳐야 한다.
영화 「8년(8 Years)」은 그런 점에서 부단히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마치 추리소설을 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난잡하게 흐트러져 있던 사건을 하나의 논리를 중심으로 뭉쳐놓으려는 노력이 가상하다.
<참으로 조촐한 구마 의식> |
그 이론이란 살인은 원한을 품고 죽은 영혼이 죽고 나서 8년 후 빙의로 몸을 빌려 자신들의 원한을 푸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어쩔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이로써 그동안 인류의 수많은 석학이 풀지 못했던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이유가 밝혀진 셈이다. 보통은 귀신이 직접 복수에 나서기 마련인데, 무슨 사정이 있어서인지 「8년(8 Years)」에선 원혼이 타인의 몸을 빌려 복수한다. 이렇게 일어난 살인 사건을 현실의 관점으로 보면 동기가 없는 살인이 될 것이다(이것이 ‘묻지마’ 살인의 원인일까?). 이 말은 원혼이 뒤에서 조종했더라도 여교사와 교장을 죽인 살인자는 결국엔 사람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하나의 반전으로서 영화 마지막에 등장한다.
그런데 왜 7년도 아니고 9년도 아닌 8년이냐고? 그것은 왜 해가 뜨고 달이 지느냐고 질문과 같다고 한다. 여기서 ‘콰당’하고 정신이 무너져 한꺼번에 모든 못 미더움을 털어버릴 수 있다면 차라리 다행이지만, 나 같은 경우는 강 위를 한가롭게 둥둥 떠내려가는 똥을 보는 기분처럼 뭔가에 홀린 기분이었다. 한마디로 정신을 놓을 정도로 어이가 없었다는 말이다.
A4용지 한 페이지도 못 채울 것 같은 ‘8년 도래설’ 이론과 정화수를 소반에 받쳐 장독대에 올려놓고 소원을 비는 것만큼이나 소박해 보이는 구마 의식은 좀 성의가 없어 보였지만, 엉성한 연기와 캐스팅 실수를 생각해보면 전체적인 이야기 흐름이나 구성은 나쁘지 않았다. 시작부터 모든 패를 꺼내놓지 않고, 퍼즐을 짜 맞추듯 조금씩 조금씩 패를 보여주는지라 보는 이에 따라선 얼굴에 비닐봉지를 씌운 것처럼 답답하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단서들을 하나둘씩 모아 차근차근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추리소설 같은 전개 방식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시간이 남아돌 때 한 번쯤은 감상해볼 만하다.
수위에 한계가 있는 TV 영화라서 그런지 임팩트 있는 장면은 없지만, 별 기대 없이 봐서 그런지 나쁘지 않았다. 「학교기담」 나머지 시리즈도 살짝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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