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서운 이야기(Horror Stories, 2012) | 두려움의 생리에 관하여
보기 좋게 발달한 골격, 성숙해 보이는 짙은 화장, 볼록한 가슴 언저리에 걸친 이름 석 자가 뚜렷하게 새겨진 명찰, 그 명찰을 물리적으로 붙잡고 있는 하얀 셔츠, 셔츠를 유니폼처럼 받치고 있는 남색 치마 등등. 얼핏 봤을 땐 은행 창구에서 일하는 아가씨로 보인다. 하지만, 설정은 ‘여고생’이다. 역시 난 노안? 아니 노땅이다.
문제는 그녀가 은행원이냐, 여고생이냐가 아니다. 대충 봐도 고운 그녀가 사악한 남자에게 납치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녀를 걱정해야 하나? 아니면 나쁜 짓을 했지만, 전혀 나쁜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는 납치범을 부러워해야 하나?
아니 지금 무슨 돼먹지 않은 말을 하는 거지?
아무튼, 그저 살인미소를 쓱 날리는 것만으로도 여고생의 여린 마음을 심쿵하게 만들어 별도의 수고스러운 ‘작업’이나 ‘수작’ 같은 것을 할 필요가 없을 것 같은, 그래서 납치 같은 흉악하고 몹쓸 짓 없이 여자를 당당하게 낚을 것 같은 잘생긴 납치범은 자신에게 닥칠 온갖 나쁜 일을 상상하며 질질 짜기 직전인 고운 여고생에게 뜬금없는 요구를 들이댄다.
“잠이 안 와. 재워줘.”
피가 거꾸로 솟아야 피곤하고 졸린다는 (그럼 구양봉처럼 물구나무서서 무공이나 연마하면 될 일을 가지고) 납치범은 여고생에게 무서운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협박한다. 마른하늘에 날벼락도 유분수지, 납치당해 결박당한 것만으로도 무서워 죽을 것 같은 무서운 상황에서 무서운 이야기를 들려달라니. 어처구니가 없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설정이라는 것을 떠올리고 자시고 할 여유가 없는 여고생은 마치 오늘의 일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그럼으로써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무서운 이야기를 잘도 늘어놓는다. 우스운 상황에서 우스갯소리가 절로 나오듯 무서운 상황에선 무서운 이야기가 절로 나오는 것이 인지상정이었던가?
상황이 상황인지라 파르스름하지만, 그 맛은 달콤하기 그지없을 것 같은 여고생의 입술에서 무섭고 끔찍하고 잔인하고 피처럼 비린 이야기가 한 편이 아니라 보따리 터진 듯 네 편씩이나 쏟아져 나오다니,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만큼이나 소름 돋는 인연이다.
3편, 2편, 그리고 1편. 제일 맛있는 것은 제일 나중에 맛봐야 한다는 신념으로 역순으로 영화 「무서운 이야기(Horror Stories)」 시리즈를 감상했다. 납치범처럼 무서운 이야기를 들어야만 반드시 잠을 이룰 수 있는 절박한 지경은 아니지만, 나도 무서운 이야기를 자장가처럼 즐길 줄 아는 도락가다. 그래서 그런지 호불호를 가리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로 세 편 모두가 내겐 기꺼이 즐겁고 유쾌하고 참신한 경험이었다. 시리즈가 계속 이어지길 바라는 간절한 바람으로 이 리뷰를 쓴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믿는 것을 본다. 귀신을 믿는 사람은 앞뒤 분간하기 어려운 으스스한 상황에선 귀신을 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사람의 시각 능력은 연산 부담을 줄이고 빠른 처리를 위해 패턴화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해와 달」의 소녀처럼 일상에서 흔히 사용하는 평범한 물건들이 음침한 조명을 허름하게 걸치고 작당이나 한 듯 서로 기괴하게 어우러져 있는 모습에서 흠칫 놀랄만한 무언가를 보는 경우가 종종 있다. 뭔가에 대한 두려운 마음으로 떨고 있을 때, 우리의 뇌는 주변에서 두려움의 대상을 발견하고자 패턴화에 의지한다. 특히 앞을 제대로 볼 수 없는 밤에는 더더욱 그러하다. 왜냐고? 두려운 대상은 멀리할수록 생존에 유리하니까.
생각해봐라. 어두운 밤에 길을 걷고 있는데, 저 앞에 뭔가가 웅크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이 맹수일 것이라고 착각한 사람은 뒤도 안 보고 도망간다.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사람은 가던 길을 재촉한다. 그것은 그냥 돌덩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정말로 맹수가 지나가는 먹잇감을 노리고 숨어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진화는 시각적인 패턴화 능력을 얻은 사람에게 위험을 피할 기회를 준다. 혹시라도 마주칠 수 있는 맹수를 회피하는 이익이 의심쩍은 물체를 피하려고 일부러 길을 돌아가는 데 소모되는 비용을 보상하고도 남는다. 선사시대에는 사자, 호랑이, 표범 같은 맹수나 적대적인 부족이 그러했을 것이고, 그것들이 깡그리 혹은 거의 절멸된 문명 시대엔 귀신, 살인범, 괴물 등이 그들의 자리를 이어받는다. 고로 귀신은 두려움에 대한 고백이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이것이 얼추 맞으면 ‘패턴’이지만, 황당할 정도로 빗나가면 ‘착시’가 된다. 아는 것만큼 본다고 선사시대엔 잘못 봤다고 해도 돌덩이거나 나뭇가지 정도니 착시라고 부를 것도 없다. 하지만, 그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것을 보고 듣고 상상하는 현대인은 어떠할까?
'귀신' 하니까 생각나는 과거가 있는데, 나도 참 한심한 것이 사람이 귀신을 보는 경우는 뇌파가 서로 일치할 때라는 말을 한때는 믿었다는 것이다!
「앰뷸런스」는 동물의 기본 감정인 두려움의 장단점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두려움은 때론 우리의 이성을 마비시키기도 하지만, 때론 재빠른 선택과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도록 강력한 압박을 가하는 동기로 작용한다. 자식을 잃을 것 같은 두려움에 사로잡힌 엄마, 감염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힌 의사, 무고한 소녀를 해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의사에 맞서는 간호사.
「앰뷸런스」의 결말은 두려움의 이중성을 비극적으로 보여준다. 자식에게만 집착한 나머지 미처 자신을 돌보지 못한 엄마, 스트레쳐카에 실린 환자에게만 집착한 나머지 다른 가능성을 보지 못한 의사와 간호사. 빠른 선택과 행동을 요구하는 두려움은 위기를 모면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두려움에 잠식당하면 「앰뷸런스」의 등장인물들처럼 외골수에 빠지게 만든다. 자신을 단수에 몰아붙임으로써 빨리 행동하라고 재촉하는 것 같은 두려움의 횡포는 한때는 우리의 생존을 돕는 이해관계에서 진화한 감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학살과 전쟁의 이면에는 선수를 치지 않으면 자신들이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늘 자리 잡고 있었다.
아무튼, 「무서운 이야기(Horror Stories, 2012)」는 ─ 누군가는 약점으로 생각하기도 하는, 하지만 사람을 포함한 많은 동물의 지극히 당연한 감정이기도 한 ─ 두려움의 생리를 교묘하게 활용한 공포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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