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7/03

절대지식 일본고전 | 고전과 인연을 맺어주는 중매쟁이

절대지식 일본고전 | 고전과 인연을 맺어주는 중매쟁이

책 리뷰 | 절대지식 일본고전(日本の古典名著·総解説)
review rating

이 책을 선택한 매우 그럴싸한 명분

변기 위에 명상하듯 차분히 앉아 괄약근에 중력의 힘을 보태 지금 당장은 쓸모가 없지만, 언젠가 요긴하기 쓰일지도 모를 묵직한 덩어리를 몸 밖으로 배출해내고 있을 때, 언제 맡아도 늘 구린 냄새에 미간을 살짝 찡그리고 온몸으로 스며드는 떨떠름한 쾌감에 전율하고 있을 때, 그럴 때면 문득 창문을 후드득 두드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마냥 이렇게 쭈그리고 앉아 시간을 보냈으면 하면 찝찔한 감상에 젖어 들 때가 있다.

이런 퇴거적이고 음침한 분위기를 좋아해서인지 아웃사이더 기질이 다분한 『절대지식 일본고전(日本の古典名著·総解説)』(지은이는 마쓰무라 아키라(松村明) 외 다수)이란 책을 찾게 되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도시에 사는 이상 비가 아무리 퍼부어도 도시가 가래침처럼 뱉어내는 모든 소음을 생매장할 수는 없다. 비가 오는 날이면 나의 청력이 오직 빗소리만을 인지할 수 있는 그런 그윽하고 고적한 곳에서 사는 것이 평생소원이기는 하지만, 빗소리를 들려주는 앱으로 만족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글을 쓸 때, 혹은 책을 읽을 때 화이트 노이즈 앱을 자주 청취하는데, 소리가 아주 그럴듯하다. 자연과 더불어 살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 현실은 그럴 수 없으니 그저 자연 일부를 흉내 내는 괴상하면서도 쓸모 있는 기술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현대인의 비참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다. 자연을 파괴한 인류가 자연을 그리워한 나머지 자연을 파괴한 기술로 자연 일부를 흉내 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으니 우습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매우 안쓰럽다.

이런 밑도 끝도 없이 한가한 이야기보다는 교고쿠 나쓰히코(京極 夏彦)의 모든 소설에 걸쳐 진득하게 등장하는 일본의 신화, 전설, 설화, 민속 등에 호기심이 다분히 쏠렸던 것이 이 책을 찾은 가장 그럴듯한 이유이자 명분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다르게 말하면, 교고쿠도의 장광설을 접할 때마다 바닥을 드러내는 나의 미천한 지식을 조금이라도 채우고자 하는 지적인 오기가 발동했다고나 할까나?

결과론적으로 (내가 읽은 교고쿠 나쓰히코의 책 중에서) 『도불의 연회』와 『백기도연대 우』에 등장하는 삼시충(三尸蟲), 『광골의 꿈』에서 언급되는 남조(南朝) 정통론, 『백기도연대』의 주인공 모토시마의 불알친구 직업인 그림연극의 기원 정도가 섬광처럼 잠깐이나마 등장했기에 앞서 말한 근거가 조금이라도 맞아떨어졌다고 겸연쩍게 말할 수는 있겠다.

한마디로 교고쿠 나쓰히코의 소설을 더 잘 이해하고 깊이 음미하고자 해서, 혹은 작가가 무슨 근거로 그렇게 잘도 씨부렁대는지 그 진위를 확인하고자 하는 다소 불충한 의도에서 『절대지식 일본고전』을 선택한다는 것은 완전한 시간 낭비다(뭐, 아직 읽지 않은 교고쿠 나쓰히코의 책에는 어떻게 적용될지는 지금으로선 알 수 없는 처지라는 점에서 다소 섣부른 판단일 수도 있겠지만).

책 리뷰 | 절대지식 일본고전(日本の古典名著·総解説)
<절대지식 일본고전(日本の古典名著·総解説) 일본어판(출처: 日本の古典名著・総解説)>

일본 고전을 다루는 사전 같은 책

나에게 ‘왜 『절대지식 일본고전』을 읽어야 하는가?’라고 물어본다 해도 딱히 대답할 말은 떠오르지 않는다. 차라리 ‘왜 당신은 일본 추리소설을 읽는가?’라고 물어보는 것이 대답하기는 더 쉽다. 아니면 ‘왜 일본 라면을 먹는가?’라고 물어보던가.

「추천의 글」에서 이 책을 일본의 고전과 명저의 핵심 내용을 다루면서 책의 시대 배경과 의의를 상세하게 해설하고 있어 마치 일본 고전을 다루는 사전 같은 책이라고 칭찬하는 지명관 이사장은 고전에 관한 연구와 이해를 통해 문화적인 소통의 기회와 공간을 확대해 한일 양국이 동반자의 관계로 미래를 열어가야 한다면서 『절대지식 일본고전』의 중요성을 환기한다.

빗발치듯 침이 튈 것 같은 열정이 느껴지는 이 주장은 무난한 대의를 포함한다는 점에서 크게 나무랄 뜻은 없고, 또한 이 ‘추천의 글’이 크게 틀린 말도 아니지만, 이런 판에 박은 듯한 설명으로 간단하고 명료하고 단순하고 스피드한 동물적인 감각을 중요시하는 요즘의 독자를, 그것도 한국과 일본 양국의 역사적 괴리가 나은 불쾌감과 불신감이 여전히 남아 있는 한국의 독자를 설득시키기는 쉽지 않다. 그 증거로 인터넷 서점에는 이 책에 대한 리뷰가 전무후무하다(2019년 12월 기준).

그렇다고 나라고 한국 독자를 설득할 뾰족한 대책이 있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내가 그런 대책을 마련해야 할 상황에 있는 것도 아닌데, 뭐 하러 이런 고민에 빠져 쓸데없이 뇌세포를 혹사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이런 점 때문에 곤란해한다면, 그것은 내가 아니라 이 책을 번역해서 출판한 출판사다. 현실이 그렇지 않은가?

‘책’이 ‘책’을 유혹하다?

이 책은 다양한 분야의 고전에 대한 흥미를 불러일으키고, 그럼으로써 독서 릴레이를 이어갈 수 있는 지적 호기심을 다방면으로 자극한다. 역사 인식이니 한일 관계니 하는 그런 감정적이고 이해타산적인 논리를 밀고 나가지 않더라도 독서를 좋아하는 독자에겐 여러 방면에 걸쳐 다양한 흥미를 불러일으키게 하는 책인 것은 분명하다.

드문 경우이기는 하지만, ‘책’이 ‘책’을 유혹할 때가 있다. 즉, 다른 책을 읽도록 자극하는 책이 있는데 이 경우가 바로 그런 경우다. 사실 내 책 리뷰도 그런 의도를 가지고 나름대로 재주도 부리고 기를 써가며 글을 쓰고 있기는 하지만, 알다시피 영향력은 제로라서 마음이 쓰라리다 못해 구멍이라도 뚫릴 판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나 같은 경우는 일본 고전 중에서 ‘모노가타리’와 ‘수필 문학’과 ‘근세 소설’ 분야가 구미를 당기는데, 기회가 되면 ‘겐지 모노가타리’와 ‘도연초’와 ‘호색일대남’을 읽어보고 싶다. 『절대지식 일본고전』에 소개된 다른 책들도 읽고 싶기는 하지만, 짐작하다시피 여기 소개된 일본 고전 중에서 한국어로 번역된 책, 그리고 그중에서도 절판되지 않고 현재까지 남아 있는 책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그만큼 한국은 일본 고전에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 몇 마디 더 보태자면, 우리는 한국과 일본 사이에 떡하니 버티고 서 있는 역사 인식의 괴리를 논할 줄만 알지, 그 괴리를 줄이려는 노력은 얼마나 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일례로 현대 일본인의 사상과 가치관을 형성하는데 밑바탕이 된 일본의 고전 전부를 한국어로 번역해도 부족할 판인데, 아예 번역조차 안 된 책들이 수두룩하니 할 말을 잃게 한다. 그러면서 역사 인식을 논하다니 어불성설이 따로 없다. 일본 고전을 읽는다고 지금 당장 큰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겠지만, 이러한 노력이 꾸준히 누적된다면 ‘가깝지만 먼 이웃 나라’라는 일본에 대한 상투적인 수식어에 균열을 일어나는 날이 머지않아 도래하게 될 것이라 주장하고 싶다. 반대로 한국 고전 중 일본어로 번역된 책은 또 얼마나 될지 궁금하다.

책 리뷰 | 절대지식 일본고전(日本の古典名著·総解説)
<「도연초(徒然草)」를 쓴 요시다 겐코吉田秉好)((출처: wikimedia)>

고전을 중매하다

어찌 되었든, 『절대지식 일본고전』을 읽고 나니 일본 고전을 읽고 싶다는 욕구가 든다는 것은 이 책이 독자와 일본 고전을 이어주는 중계자 같은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는 방증이다. 한마디로 일본 고전을 소개하라는 사명을 부여받은 팸플릿 같은 책이랄까? 그래도 팸플릿은 팸플릿일 뿐인 것은 팸플릿을 읽는 것하고 팸플릿에 소개된 장소를 직접 찾아가 체험하는 것하고는 하늘과 땅만큼 이상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잘 쓴 책 리뷰라도 리뷰를 읽었다고 해서 (리뷰의 대상이 된) 책 한 권을 온전히 읽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절대지식 일본고전』을 읽었다고 해서 일본 고전을 이해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형형색색 팸플릿을 통해 뭔가에 대한 정보를 얻고 그 정보를 통해 목적을 가진 행동으로 이어지는 동기를 얻듯 독자는 『절대지식 일본고전』을 단지 읽는 것에서 그치기보다는 이 책을 시발점으로 일본 고전을 향한 고아하고 지적인 호기심을 발동시킬 뜻밖의 기회를 얻을 수 있다. 또한, 현대 독자와 고전을 중매하는 역할이야말로 아마도 이 책의 진짜 집필 의도이지 않을까 싶다.

할 일 없이 종일 노트북 화면만 마주 보며 마음속에 떠올랐다가는 사라지는 『절대지식 일본고전』을 읽고 난 후의 감상이 일으키는 쓸데없는 상념들을 두서없이 써 내려가고 있자니 묘하게도 답답해진 마음이 풀어지고, 답답한 마음이 풀어질 때쯤 되니 글쓰기도 마칠 때가 되었다(‘도연초(徒然草)‘의 서단 도입부가 왠지 모르게 마음에 들어 좀 흉내 좀 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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