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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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도연대 | 교고쿠도는 잊어라! 이번 판은 유쾌함이다

백기도연대 | 교고쿠 나쓰히코 | ‘교고쿠도’는 잊어라! 이번 판은 유쾌함이다

책 리뷰 | 백기도연대 | 교고쿠 나쓰히코 | ‘교고쿠도’는 잊어라! 이번 판은 유쾌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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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고쿠도 시리즈’의 ‘라이트 노벨’ 버전?

교고쿠 나쓰히코(京極 夏彦)의 『백기도연대 우 • 풍(百器徒然袋 雨 • 風)』은 ‘백귀야행(百鬼夜行)(일명 교고쿠도 시리즈)’에서 듣는 이의 영혼을 붕괴시키는 교고쿠도의 장광설은 대폭 삭감하고 그 빈자리를 유쾌한 장면들로 가득 채운 듯한, 그래서 교고쿠도 시리즈보다는 무게감은 확연하게 가벼워졌고 그 대신 분위기는 방방 들떠있는 유쾌한 소설이다.

당연한 것이 『백기도연대』에선 세상의 유일한 탐정이자 존재 자체가 탐정이라고 자화자찬하는 에노키즈가 장미십자탐정 사무소 일당의 우두머리로서 맹활약하기 때문이다.

듣는 사람의 영혼까지 탈탈 털어버리는 교고쿠도의 말발은 여전하지만, 이제 그는 ‘교고쿠도’라 불리지 않고 보통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자신의 성(주젠지)으로 불릴 정도로 작품에서 차지하는 위상이나 무게감이 많이 떨어졌다. 그런 만큼 알아들을 수는 있지만 이해하기는 어려운 교고쿠도의 장광설에 주눅 들지 않아서 좋고, 뇌가 혹사당하지 않아서 더더욱 좋다. 단지 교고쿠도의 장광설이 졸음과 지루함을 몰고 오는 장애물로 작용한다는 이유로 ‘교고쿠도 시리즈’를 읽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독자는 『백기도연대』를 통해 못 이룬 한을 풀 수 있어 좋다. 하지만, 에노키즈에게 들볶이는 게 좋아서 친구가 된 불운한 소설가 세키구치처럼 교고쿠도의 세 치 혀에 꾸중 듣는 듯이 놀아나는 피학적인 맛에 중독된 독자(나 같은?)는 조금은 밍밍하게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한편으론 비슷한 유머를 반복적으로 우려먹는 것이 지나치다 싶기도 하고, 유치하다. 그래서 유쾌하고 재미있다고 느껴졌던 첫인상의 산뜻했던 빛깔은 읽으면 읽을수록 물 빠진 옷처럼 조금씩 조금씩 색이 바래기도 한다. 막장까지 가면 첫인상 전부는 아니더라도 그 일부는 물리고 싶어지기도 한다.

사정이 이렇다 하더라도 남자라도 홀딱 반할만한 완벽한 외모와는 달리 행동은 미친 사람 같고 말은 바보천치 같은, 그래서 기이한 성향으로는 이 세상에 둘도 없는 탐정 에노키즈의 기상천외한 활약과 그를 추종하는 (본인들 대부분은 부인하지만) 하인들이 ‘바보’와 관련된 욕이란 욕은 다 얻어먹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타작기에 끌려들어 가는 콩 수확물처럼 사건에 말려들어 가는 불행사를 보는 재미는 쏠쏠하고 그 작태는 가관이다.

누군가 말하지 않았던가? 남의 불행은 곧 나의 행복이라고. 에노키즈의 하인들이 울상을 지으면 독자는 미소를 짓고, 에노키즈의 하인들이 침울하면 독자는 유쾌하니 기인한 재미를 자아내는 기이한 소설이다.

책 리뷰 | 백기도연대 | 교고쿠 나쓰히코 | ‘교고쿠도’는 잊어라! 이번 판은 유쾌함이다
<토리야마 세키엔(鳥山石燕)의 百器徒然袋, 상권 宝船(たからぶね)
via Wikimedia Commons>

‘세키구치’에서 ‘모토시마’로

독자의 골치를 지끈지끈 쑤시는 요괴나 (독자에 따라서는 별로 알고 싶지는 않은) 일본 고사에 얽힌 전설 • 신화에서 일반적인 범죄 사건으로 이야기 소재의 중심이 이동한 점(물론 내막을 이리저리 비비 꼬아 복잡하게 만들려고 한 점은 여전하지만, ‘교고쿠도 시리즈’처럼 불가사의한 이야기처럼 보일 정도는 아님), 장광설을 과감하게 정리해고하고 그 빈자리에 익살스러운 텍스트로 대체한 점, 사건의 피날레를 호된 말발로 결말을 짓는 교고쿠도가 아닌 응징을 빙자한 대혼란으로 결말 짓는 에노키즈에게 맡긴 점 등을 보면 아무래도 『백기도연대』는 교고쿠 나쓰히코가 작정하고 유쾌한 소설로 집필한 흔적이 역력하다. 이런 변화에 응원이라도 하듯 화자도 세키구치에서 모토시마로 변경되었다.

세키구치가 누구인가? 본문의 설명을 그대로 옮겨적어 보면 ‘세상의 불행을 한 몸에 지니고 있는 사나이, 에노키즈 일당에게 한결같이 조롱당하고 비방을 받는 하인 중의 하인, 불운한 소설가’가 아닌가(정말이지 다시 읽어도 잔인한 소개다)? 하지만, 그의 비참한 현실은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그는 어떤 굴욕을 당해도 그 누구로부터 일말의 동정심조차 받지 못하는 가련하고 처량한 신세의 표본 격인 사람이다. 가혹하기 그지없는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인물이다. 사정이 이렇고 보면, 그가 현실감 없는 삶에서 살아있다는 것을 실감시켜주는 유일한 감각인 고통과 후회에 빠져들고자 자진해서 사건에 뛰어드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만하다. 그런 그가 ‘교고쿠도 시리즈’에서는 버젓이 화자로 등장하여 이야기를 주문처럼 외운다. 왠지 모르게 소설의 분위기도 그의 우울한 인생에 물이 들어 자연스럽게 음울해진다.

하지만, 『백기도연대』에선 세키구치를 제치고 새로운 인물이 화자로 등장한다. 전기배선공사 회사에서 도면을 그리는 범용한 모토시마다. 우리 주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하고 무해한 소시민이라는 배경을 유난히 강조하는 모토시마는 조카가 당한 사건을 (지인의 소개로 알게 된 탐정) 에노키즈에게 의뢰하고자 장미십장탐정 사무소를 찾는다.

결과만 따지고 보면, 모토시마가 의뢰한 조카 사건은 에노키즈가 난입하는 난장판 끝에 유쾌하게 매듭지어지지만, 이 사건이 화근이 되어 그는 본의 아니게 제2의 세키구치로 전락하는 불행한 신세가 된다. 즉, 그는 마치 ‘에노키즈의 하인 만들기’ 같은 교과서에라도 적혀있을 것 같은 허무맹랑한 설명대로 의뢰인에서 협력자, 그리고 협력자에서 하인으로 밑도 끝도 없는 추락을 향해 내몰린다. 급기야 그는 (당연히 안 좋은 쪽으로)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포스를 지닌 세키구차와 같은 부류로 취급되기에 이른다.

『백기도연대』에 등장하는 사건들을 호통인지 세뇌인지 설교인지 여간해서는 분간하기가 어려운 주젠지의 교묘한 주술이 아니라 에노키즈의 막무가내식 난장판으로 어떻게든 (해결이라기보다는) 끝장을 보는 것도 볼만하지만, 모토시마가 의뢰인에서 협력자, 그리고 협력자에서 하인으로 서서히 몰락(?)해가는 유쾌한 흐름도 놓칠 수 없는 재미다.

책 리뷰 | 백기도연대 | 교고쿠 나쓰히코 | ‘교고쿠도’는 잊어라! 이번 판은 유쾌함이다
<토리야마 세키엔(鳥山石燕)의 百器徒然袋,  중권 槍毛長(やりけちょう)
via Wikimedia Commons>

에노키즈 할렐루야!

모토시마가 남의 일에 잘 말려드는 운명이라면, 나는 이런 유쾌한 소설에 잘 말려드는 타입이다. 『백기도연대』는 추리소설이라 해도 좋고, 탐정소설이라 해도 좋고, 범죄소설이라 해도 좋고, 아니면 코믹소설이라 해도 괜찮을 정도로 에노키즈의 언동처럼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장르의 소설이지만, ‘교고쿠도 시리즈’보다는 몇 배는 유쾌하다. 뾰족하게 한 가지 장르를 고집하기보다는 여러 장르가 혼합돼 있기에 추리소설이라는 장르로서의 특징은 두루뭉술할지는 몰라도 여러 장르가 자아내는 재미를 고루 맛볼 수 있다. 고로 손님이 뜸한 카페에 앉아 차를 음미하는 한가한 시간을 유쾌하게 보내고자 할 때, 혹은 긴 여행길의 지루한 시간을 달래고자 할 때, 이도 아니면 잠시 속세를 등지고 머리를 식히고자 뭔가를 읽고자 할 때 안성맞춤인 소설이다. 한편으론 탐정이자 신(God)인 에노키즈에 대한 봉사 활동이자 예배 차원에서라도 이 책을 읽어야 한다는 생각이 뜬금없이 들 정도인 것을 보면 어쩌면 나도 모토시마처럼 그의 하인이 되어 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바보를 읽다 보니 나도 바보가 되어가는 것일까? 알 수가 없다.

끝으로 『백기도연대 풍』에는 잠깐이지만 작가 교고쿠 나쓰히코의 역사의식을 엿볼 수 있는 대화가 나온다. 에노키즈의 공식 조수 마스다는 한일회담(韓日會談)이 난항을 거듭하는 이유는 한국인의 잘못이 아니라 일본 정치가들의 불손한 태도 때문이라고 말한다(참고로 소설의 배경은 1953년? 아무튼, 1950년대 초반이다). 이에 덧붙여 그는 식민지 통치가 은혜를 베푼 것이라고 하다니 그것은 당치도 않으며 은혜가 아니라 굴욕을 준 것뿐이라고 말한다. 비록 작중 인물을 통해 내비친 말이라 작가의 진심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글을 쓰다 보면 은연중에 작가의 성향이나 가치관이 작품에 스며드는 예도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대사다.

마스다의 말은 지극히 당연한 말이지만, 괜스레 고마운 마음이 들어 일부러 끄집어냈다. 일본인은 둘째치고 한국인 중에서도 일본의 식민 지배를 도움이나 은혜로 생각하는 파렴치한 분자들이 아직도 있다는 점에서 마스다의 지적은 통쾌하면서도 한편으론 마음 한구석에 앙금을 남긴다. 참으로 한심한 작자들이지만, 그만큼 역사의식이 아직도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이니 안타깝고도 서글픈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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