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사관 살인사건 | 오구리 무시타로 | 초인적인 독해력이 필요해!
초인적인 독해력이 필요한 거야!
지금까지 읽은 책 중에서 가장 난해한 책이었다고 치켜세워 줘야 자존심이 살 것 같은 소설. 혹은 빈말로라도 추천하기 어려운 책이라고 말해야 지금까지 유지되어 온 찬란한 악명에 먹칠하지 않을 것 같은 소설. 혹은 이해 여부를 떠나 독파한 것 자체가 인간 승리라고 자화자찬해도 전혀 과장되지 않은 소설. 일본 추리소설의 3대 기서 중 하나라고 일컬어지는 오구리 무시타로(小栗 虫太郎)의 『흑사관 살인사건(黒死館殺人事件)』을 읽고 나서 떠오르는 대로 적어본 짤막한 소감이다(나머지 두 권의 기서는 나카이 히데오의 『허무에의 제물(虚無への供物)』, 유메노 쿠사쿠의 『도그라 마그라(ドグラ・マグラ)』).
이 책의 첫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내가 어쩌자고 이런 염병할 책을 읽으려고 마음먹었는지.’ 하는 자책감이 사정없이 밀려든다. 고대 상형문자를 보는 듯한 망측한 단어들과 그 단어들의 수수께끼 조합 같은 문장들은 해괴하다 못해 마치 현학적 글의 끝장을 보려는 듯한 암호 같다. 혹사당한 독자의 뇌는 찜통에 들어앉은 고기처럼 푹 삶아져 버릴지도 모른다. 보통은 책을 읽는 도중에 포기하는 사람을 보면 슬쩍 비웃어주기 마련이지만, 『흑사관 살인사건』만은 예외로 두고 싶다.
‘이것이 과연 온전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 쓴 글이란 말인가?’ 하는 의문이 번쩍 든다. 견딜 수 없는 글을 해독하고자 안간힘을 쏟아붓기보다는 안 되겠다 싶으면 바로 포기하는 것이 뇌 건강을 위해서도 좋을 것 같다. 정말이지 이 책만은 중도에 포기했다고 해서 뭐라 할 수 있는 그런 책이 아니다. 그래도 계속 읽어나간다면 그 용기와 의지가 가상하기보다는 귀신이 씌웠어도 단단히 씐 격이고, 악마에게 홀렸다면 제대로 홀린 것이다.
난 오기로다가 읽었다. 작자가 어떻게 되먹은 사람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일제강점기 시절에 활동한 일본 작가가 마치 자신의 현학을 뽐내듯 도발적으로 갈겨쓴 되먹지도 않은 텍스트에 굴복하여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도전은 시련의 연속이었다. 읽는 내내 적련선자 이막수의 오독신장에라도 중독된 것처럼 온몸이 근질거리며 어떻게든 자리를 뜨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노리미즈(도대체 이 자식은 뭐 하는 녀석이야!)의 환상적인 박학다식함은 안드로메다에서 편찬한 백과사전이라 불리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완고하지만,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나로서는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나 다름없다.
지금까지의 문학사에서 수없이 거론되어 온 ‘수려한 문장’이라는 개념 자체를 강간하는 오구리 무시타로의 기괴한 문장만큼이나 충격적인 것은 우리의 뇌는 이런 상황에서도 안간힘을 발휘하며 나름 적응한다는 것이다. 덕분에 중반 이후부터는 노리미즈의 기벽에 가까운 현학적인 장광설에 뇌세포가 그럭저럭 반응할 수 있었다.
<뇌가 푹푹 삶아지는 것을 느끼고 싶은가!> |
문장 하나하나가 미스터리인 거야
이 작품이 〈신청년(1934년)〉에 연재되는 동안, 칭찬받거나 비방당하거나 모두 최대급의 용어가 동원되었다는 작가의 말에서도 알 수 있듯, 『흑사관 살인사건』은 작품을 평가하는 데 있어 중간은 허용할 수 없는 매우 이례적인 소설이다. 즉, 호불호가 확연히 갈리면서 그에 따라 평가도 극과 극을 달릴 수밖에 없는 기서 중의 기서다.
물론 나도 어느 정도 소문을 듣긴 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교고쿠도(교고쿠 나쓰히코(京極夏彦)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장광설은 노리미즈에 비하면 완전 걸음마 수준이다. 교고쿠도의 장광설이 감미로운 자장가라면, 노리미즈의 장광설은 인정사정없는 신경독소다. 하지만, 중반 이후 노리미즈의 장광설에 조금씩 익숙해지자, 갑자기 장님의 두 눈이 번쩍 뜨이는 것 같은 알 수 없는 기적으로 나의 두 눈도 뜨였고, 덩달아 시종일관 노리미지의 장광설을 ─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 본능적으로 거부해 왔던 나의 뇌세포도 조금씩, 그리고 부드럽게 인지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비로소 이때가 돼서야 왜 이 작품이 최고의 찬사를 받는지를 새벽 미명 속에서 지그시 일어서는 빛처럼 어슴푸레하게 깨닫게 되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추천할 수 있는 책은 아니지만, 머릿속에 멘톨이라도 박힌 것처럼 정신이 상쾌하고 또렷할 때, 그래서 책장에 구멍이라도 뚫을 수 있을 것처럼 글자 하나하나를 초집중해서 읽을 수 있는 때, 즉 쉽게 말해 육체와 정신과 영혼의 상태가 최상일 때 이 책을 읽는다면 어딘지 모르게 난잡하면서도 기괴한 운치를 자아내는, 문학적인 수준에서는 뭐라고 섣불리 재단하기 곤란한 오구리 무시타로의 독특한 문장력을 온몸의 나른함과 정신의 산란함과 영혼의 피폐함으로 느낄 수 있다. 한마디로 초인적인 이해력이 필요하다는 것!
트릭만은 고전적 구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거야!
그런 연유로 『흑사관 살인사건』은 추리소설이면서도, 감히 문학적인 수준에서의 담론도 주고받을 수 있는 매우 심오한 작품이다. 오구리 무시타로의 박학다식함만 따져봐도 아마 그 시대, 그러니까 메이지 유신 이후부터 1930년대까지 일본에 소개된 서양 지식을 총동원한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어마어마하다. 지금은 뭔가를 인용하거나 참고하는 데 있어서 인터넷 검색을 활용할 수 있지만(물론 무엇을 어떻게 검색할지는 밑천이 있어야 가능하기에 검색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불가능했던 과거에 오로지 읽거나 듣거나 배운 지식만으로 이 모든 것을 완성했다는 것은 엄청난 지적 욕구의 소유자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사정이 그러하니 작품을 통해 학식을 자랑할 만도 하다. 한편으론, 당시 일본 지식인의 ─ 나쓰메 소세키가 비판했던 것처럼 ─ 서구 문명에 대한 지나친 추종과 서구 지식을 맛본 지식인들의 집념과도 같은 허영이 엿보이기도 한다.
다만 추리소설의 묘미라 할 수 있는 트릭 구성은 확실히 고전적인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뭐, 고전이니까 당연할 수도 있다). 독자로서는 전혀 알 수도 없을뿐더러 현대 추리소설에서는 금기시되는 ─ 나로서는 지금까지 듣지도 보지도 못한 ─ 특이체질자(궁금하면 책을 읽으시라! 쌍둥이 같은 것은 비교할 바도 못 된다!)를 비롯해 비밀 통로, 열쇠 구멍에 실이 통과하여 어쩌고저쩌고하는 기계적인 트릭들이 주를 이루기 때문에 요런 점은 충분히 고려해서 읽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페이지까지 범인을 오리무중 상태로 놔두는 작가의 완고한 이야기 장악력과 그 가운데에서 우글우글 넘쳐나는 섬뜩한 수수께끼들, 그리고 웬만해선 갈피를 잡을 수 없을 정도로 꼬일 대로 꼬인 이야기는 작가의 난해한 문장 구사력에서 어느 정도 해탈한 독자의 죽어버린 집중력을 부활시킬 수 있는 유일무이한 미끼다. 여기에 한 가지 더 보탠다면 독심술 중독자 같은 노리미즈 특유의 병적일 정도로 집요한 생리적이고 심리적인 해석은 인물의 심리보다는 사건의 흐름과 구성을 더 중시하는 현대적인 추리소설에서는 접하기 어려운 또 하나의 독약이다.
<일본 추리소설 3대 기서 중 하나(사진 출처: on-the-books.info)> |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거야!
마지막으로 한 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흑사관 살인사건』에는 범죄자를 바라보는 오구리 무시타로의 성향이 은연중에 내포되어 있다. 즉, 작가는 범죄 소질이 유전된다고 생각한 것 같다(당연히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사실 이 기괴한 소설의 전체적인 플롯은 범죄 소질이 유전되느냐, 안 되느냐를 실험적으로 증명하고자 마련된 인체 실험장으로 짜여 있다(흠, 이것이 좀 스포일러가 되려나?). 물론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비윤리적이고 잔인한 실험이지만, 한편으론 상상 속에서는 몇 번이고 돌려보고 싶은 호기심 어린 실험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태어나면서부터 ‘라면(혹은 햄버거?)’만 먹고 자란 사람의 건강과 수명이 그렇지 않은 사람과 어떻게 다를지를 이제 막 태어난 아기들을 가지고 실험하는 일처럼 소설 속 실험은 현실에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다는 점에서 지극히도 소설적이다. 하지만, 그 결과만큼은 누구라도 궁금해하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로 호기심을 자극한다는 점에서 지독히도 자극적이다.
아무튼,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현학적인 문장은 구역질 정도로 끝나면 다행이고, 자칫 잘못하다간 뇌수가 인체의 아홉 구멍을 통해 쏠려 나올 정도로 지독하지만, 면역이 되거나(아니면 삼시뇌신단 같은 기가 막힌 해독약이라도 있다면 아끼지 말고 복용해라!), 혹은 어떻게든 견뎌낼 수 있다면 지금까지 읽은 어떠한 추리소설과도 현격히 다른 격의 추리소설이 되리라는 것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다만, 그러기까지의 과정이 앞에서 누누이 말했듯 대장정처럼 고난의 행군이 될 확률이 상당히 높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누가 말하지 않았던가?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물론 여기서 ‘낙’은 뭔가 새로운 앎을 얻었다는 지적 쾌락보다는 끝내 완독했다는 안도의 미소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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