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인재도 | 모리 히로시 | 폭주하는 모에, 드디어 사이카와를 무너뜨리다!
책을 읽는 재미에 관한 심심한 고찰
어느덧 S & M(사이카와 & 모에) 시리즈의 다섯 번째까지 왔다. 간 보듯 한 권 한 권 대출해 읽기 시작한 것이 전체 시리즈 10권의 절반을 넘어서고 있는 셈이다. 산 중턱에 올라선 셈이지만, ‘인제 절반이야?’라고 지친 소리를 내뱉기보다는 ‘벌써 절반이야?’라는 아쉬움 가득한 한숨이 절로 터진다. 한편으론, 내 얼굴에는 아직도 절반이 남아서 다행이라는 표정이 뾰주름하게 떠오른다.
사이카와와 모에와 함께 하는 시간은 지루할 틈조차 주지 않을 정도로 ‘읽는 재미’는 탁월했다. 정도껏 격을 갖춘 문장, 확실한 자기의식과 뚜렷한 가치관을 가진 등장인물, ─ 추리소설 독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시될만한 ─ 완성도 높은 트릭 등의 삼박자를 고루 갖춘 추리소설은 흔치 않다는 점에서 S & M 시리즈는 추리소설 마니아에겐 축복 같은 존재다. 이 자리에서 교고쿠도의 빙의를 받은 현란한 장광설을 제아무리 길게 늘어놓는다고 하더라도 결국 그 모든 말을 압축하면 ‘재밌다!’가 될 것이다. 음식은 요리한 사람의 성의를 봐서 맛이 얼마간 없더라도 ─ 먹고 죽는 독만 아니라면 ─ 억지라도 먹어줄 수는 있지만, 책은 그렇지 못하다는 점에서 ‘읽는 재미’는 꽤 중요하다. 특히 대중을 겨냥한 소설이라면 ‘읽는 재미’는 빠져서는 안 되는 맛 중의 맛이다!
책을 좀 읽는 사람들에게 왜 책을 읽느냐고 묻는다면 보이지도 않고 느껴지지도 않는 마음의 양식을 쌓는다는 판에 박힌 답변부터 시작해서 나와 나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는 고상한 답변, 지식과 경험을 쌓아 돈을 벌고 싶다는 실리적인 답변, 그냥 시간 보내기 좋아서라는 솔직담백한 답변까지 여러 말이 나오겠지만, 이것들은 약간의 허세가 가미된 ‘그럴싸한 답변’을 위한 준비된 답이다. 내가 볼 땐 책을 읽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 특히 소설의 경우는 더더욱 ─ 글을 읽는 것 자체가 재밌어서이다. 아무리 심오한 내용을 담은 소설이라도 글을 읽는 재미가 없다면, 그것이 진짜 심오한 내용인지 이해하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감흥도 떨어진다.
좀 모호하게 들릴 수 있지만, 내 말은 지식 충전? 호기심 충족? 등 그런 추상적인 것을 떠나서 글을 읽어나가는 것 자체가 재밌다는 말이다. 물론 지식 충전과 호기심 충족도 독서의 중요한 동기이지만, 아무리 좋은 지식이라도 읽는 재미가 없다면, 특히 문장이 따분하기 그지없는 책들은 머릿속에 지식을 주입하는 목적보다 잠을 주입하는 목적에 더 충실할 수 있다는 점에서 효용이 떨어질 뿐만 아니라 읽는 것 자체가 고된 노동이 될 수 있다(간혹 놓치기 어려운 내용 때문에 잠을 이겨내면서 읽어야 할 책도 있긴 하다). 그래서 교양 도서도 지적 품질만큼이나 문장력을 소홀히 할 수 없다. 학자가 아닌 이상 논문이나 교과서 같은 따분한 책을 읽고 싶은 독자는 많지 않기 때문이다.
<우린 단순히 남의 시선을 가리고자 책을 펼치지는 않는다> |
그 어떤 소설보다 ‘읽는 재미’에 충실한 소설, 봉인재도
사람은 천성적으로 어떤 일을 하든 간에 ‘재미’나 ‘이익’이 없으면 손을 데지 않는다. 하나의 일에서 ‘재미’와 ‘이익’ 둘 다를 얻어낼 수 있으면 횡재한 것이고 보통은 둘 중 하나를 얻는 것에 만족한다. 강제 노동이나 협박 같은 힘에 굴복하여 어쩔 수 없이 행하는 행위도 순간순간의 목숨을 유지해간다는 결정적인 ‘이익’이 있다. ─ 강제든, 자발적이든 ─ ‘재미’도 없고, ‘이익’도 없는 일에 힘과 노력을 시간을 쏟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지 않을까? 그래서 재미없는 책을 억지로 읽는 사람은 당연히 불행한 사람이며, 학창 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이 불행을 많이 겪어봤으리라 짐작되기에 그 부당한 고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내용이라도 매우 유익하다면 그나마 위안이 되지만, 내용마저도 졸렬하다면 정말이지 최악이다.
그런데 매년 되풀이되는 새해 다짐 목록의 간판스타로 등장하는 독서를 작심삼일로 끝내는 사람들은 책 읽는 것이 지루하고 어렵다고 말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여자의 자궁 속에서 태어나는 아이가 모두 잘 생기거나 예쁠 수 없는 것처럼 서점에 있는 책들 모두가 다 잘 만들어진 책이라고는 할 수 없다. 개중에는 유별나게 지루하고 쓸데없이 어려운 못 난 책들이 쌔고 쌨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 모든 것을 책 탓으로 돌릴 수만은 없다. 왜냐하면, 서점에 산더미처럼 쌔고 쌘 책 중에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양서들도 꽤 있기 때문이다. 단지 내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맛없다고 불평하는 것이 억지인 것처럼 자신의 독해력이나 지적 능력에 어울리지 않는 책과 무리하게 씨름하면서 지루하고 어려운 책이라고 잡아떼는 것도 억지다. 내가 쓰면서도 잘 믿기지는 않지만, 사서삼경이나 철학 같은 책도 ─ 내가 추리소설 읽듯 ─ 재밌게 읽는 사람이 이 세상 어딘가에는 반드시 존재한다! 그렇다고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이 두 능력은 책을 읽으면서 향상될 여지는 충분하다. 꾸준히 책을 읽다 보면, 오늘날의 지루하고 어려운 책이 훗날에는 감명 깊은 책으로 변신하는 기적 같은 경우를 종종 겪게 된다.
와우! 단지 모리 히로시(森博嗣)의 책을 읽는 것이 재밌다는 말을 꺼냈을 뿐인데, 이렇게나 길어졌다. 마치 길거리 캐스팅에 너도나도 얼굴 좀 비춰보겠다고 아우성치는 것처럼 단어와 단어들이 하얀 백지 위로 써 가는 내 리뷰에 마구잡이로 들이대는 꼴이 아닌가. 정말로 교고쿠도의 빙의라도 받았던 것일까?
아무튼, 모리 히로시의 S & M 시리즈는 내가 생각하는 책 본연의 임무, 즉 ‘읽는 재미’에 충실하다는 점에서 엄지를 치켜세우고 싶다. 아무리 내용이 좋더라도 읽어나가는 데 부담이 있으면 많은 사람이 읽을 수 없고, 많은 사람이 읽을 수 없다면, 글을 쓴 작가의 노력도 허사가 된다. 그래서 작가는 달리는 말 앞에 대롱거리는 당근처럼 독자를 유려한 문장력이나 재미난 이야기로 책에서 멀어지지 않도록 달궈놓을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독자는 주인 손에 매달린 간식을 쫓아다니는 흥에 겨운 강아지처럼 기꺼이 꼬리를 흔들며 책에 달려들 것이다.
사건 해석에 관한 열린 가능성
그렇다고 『봉인재도(封印再度)』의 모든 점이 마음에 든다는 말은 아니다.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한 번 책장을 넘긴 독자를 미친 듯이 책 속으로 파고들게 하는 블랙홀 같은 흡입력은 여전하지만, 추리소설만의 독특한 매력이자, 어쩌면 많은 독자가 추리소설을 찾는 가장 큰 이유라 할 수 있는 ‘트릭’의 완성도는 ‘글쎄요’라고 말하고 싶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을 땐, 무방비 상태에서 허를 찔린 것 같은 빈사 상태로 쓰러질 지경이었다. 왜냐하면, 허를 찔렸다는 감탄만큼이나 뭔가 속은 것 같다는 허망함이 머릿속에서 회오리바람으로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정말로 속았다면 속았기 때문에 행복하게 책장을 넘길 수 있었던 나로서는 할 말은 없지만, 그래도 뭔가 개운치 않은 찜찜한 기분을 떨쳐내기는 어렵다. 누군가는 이런 떨떠름한 기분을 똥 싸고 뒤를 닦지 않았다는, 확률적으로는 매일 일어날 수 있지만, 결코 자주 일어나지는 않고 자주 겪고 싶지도 않은 불미스러운 행동으로 표현하고는 하지만, 내 기분은 그 정도까지 더럽고 절망적인 상태는 아니다. 그저 약간 곤혹스러운 정도?
이런 곤혹스러움은 『봉인재도』에서 일어난 사건은 ─ 증거만 좀 변경하면 ─ 여러 시나리오로 설명될 수 있다는 다중해석 가능성에 가장 큰 이유가 있다. 가야마 家에서 일어난 사건 자체만 놓고 보면 소설 막바지에 결정적인 증거가 표면에 등장하기 전까지는 다중해석이 가능하다. 즉, 사건 해설에 대한 초 • 중반까지의 열린 가능성이 만약 독자의 추리를 함정에 빠트리기 위한 모리 히로시의 ─ 서술 트릭 같은 ─ 계획된 술책이라면 그야말로 지독히도 교묘한 수지만, 엉겁결에 나온 우연한 수라면 플롯의 허점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나로서는 도무지 진실을 알 길이 없으니 개운치 않은 것이다.
또 하나 나를 곤혹스럽게 한 것은 트릭 구성에 ‘아이’까지 등장시킨 점이다. 그것도 네 살밖에 안 된 아이를 말이다. 심리학에 정통한 독자는 아이와 몇 마디 오고 간 대화를 인지심리학으로 분석하여 사건의 실마리를 건져낼 수 있겠지만, 나로서는 겸허하게 두 손 두 발 다 들 수밖에 없었다. 맙소사, 온전한 문장이라고도 할 수 없는 아이가 내뱉은 단어 몇 개에 숨은 깊은 뜻이 사건의 미스터리를 푸는 결정적인 힌트가 될 줄이야 누가 상상이라고 했겠는가!
이것들을 개인적인 불만 정도로 치부한다면, 이번 트릭은 추리소설에 활용할 수 있는 트릭의 다양성 측면에서 충분히 괄목할만한 경험이었다. 좀 더 과장하면, ‘아, 이런 식의 트릭 구성도 가능하구나!’ 하는 탄사를 마음 깊은 곳에서 끄집어낼 수도 있으리라. 견문이나 식견을 넓혀준다고 할까나. 한편으론 트릭을 구성하는 데 있어 어떠한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어떤 형식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자재로 트릭을 구사하는 모리 히로시의 관록과 수완이 돋보이는 작품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독자의 상상력을 그야말로 우습게 초월해 버린다. 물론, 그 독자가 나의 경우로 한정될 수도 있지만 말이다.
<갑부집 딸, 모든 남자의 꿈이 아닐까?(사진: 드라마 「모든 것이 F가 된다」) |
쾌속 진도, 무너지는 사이카와의 ‘이공계’ 이미지
추리소설은 ‘트릭’으로 승부해야 한다고는 하지만, 그런데도 모리 히로시의 S & M 시리즈는 ‘S & M’이라는 머리글자가 부재로 채택될 만큼 사이카와와 모에의, 즉 사회성 젬병인 총각 교수 사이카와와 이 세상 모든 남자의 로망이 될만한 갖가지 자격과 여러 매력으로 흘러넘치는 미모의 여제자 모에의 이상야릇하면서도 어딘지 위태로운 관계를 지켜보는 것도 놓칠 수 없는 재미다. 치밀한 트릭으로 숨 막힐 듯한 긴장감을 선사한다면, 그것을 다소나마 풀어주는 것이 두 사람의 흥미진진한 연애담이다. 제삼자인 우리가 볼 땐 흥미진진하지만, 자신과 마주할 때만은 평소 주장하는 뭐든지 확실히 말하라는 신조는 어디다 엿 바꿔 먹었는지 마치 선생님 앞에서 꾸중 듣는 아이처럼 어물쩍 확답을 회피하려고만 하는 사이카와를 매번 피를 토할 듯한 심정으로 지켜봐야 하는 모에, 그리고 이런 모에의 집요한 ‘정신 공격’에 변변치 못한 답변이나 썰렁한 농담으로 빠져나갈 궁리만 하는 사이카와로서는 착잡하다 못해 괴로움으로 머리가 터질 지경일 것이다.
단조로움의 극치인 ‘학문’이라는 천국에 머무르고 싶은 사이카와와 내로라하는 석학들도 풀 수 없었던 ‘애정’이라는 달곰쌉쌀한 지옥으로 끌고 들어가려는 모에의 왕위를 두고 벌어지는 싸움보다 더 치열한 다툼은 좀처럼 끝날 것 같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둔감한 사이카와가 모에의 ‘정신 공격’에 미약하게나마 반응하면서 약간의 변화의 조짐을 보이는 선 정도에서 대충 합의를 본 상황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젠 소재가 떨어졌나 하는’ 기우가 들게 할 정도로 『봉인재도』에는 모에와 사이카와의 진도가 괄괄한 모에의 성격만큼이나 빠르게 진행된다. 물론 이런 ‘원 나잇 스탠드’ 같은 쾌속 진도는 순전히 나까지 식겁하게 한 모에의 기가 찰 트릭 때문이지만, 이 한 방에 인간 사이카와는 완전히 무너진다. 그동안 ‘이공계’ 인간형의 전형이자 대표로서 군림해 온 그의 완전무결한 이미지가 모에의 트릭 한 방으로 철저하게 붕괴한 셈인데, 이렇게까지 자신감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사이카와가, 그것도 자발적으로 ‘혼인신고서’를 후다닥 작성해서 모에에게 파드닥 받쳤기 때문이다!
결국, 모에의 혀를 차게 하는 기가 막힌 트릭으로 사이카와도 복받치는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는, 그저 우리와 같은 어쩔 수 없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한편으론 그동안 그가 우리에게 심어준 시체보다 더 차가운 이미지를 되새겨보지 않을 수가 없다. 그동안 그가 우리 앞에서 보여준 냉정하고 냉철한 모습은 가식이었나? 아니면, 그의 인간적인 내면을 덮고 있는 이성과 과학으로 중무장한 ‘사고(思考)’라는 외피가 남들보다 조금 더 견고했을 뿐인가? 정답은 독자의 공상 속에 숨어 있지만, 이로써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사고 기계의 화신으로 군림할뻔했던 사이카와의 ‘이공계’적인 이미지는 다시 재정립할 필요성이 간절해진다.
아무튼, 『봉인재도』는 툭 하면 폭주하는 모에와 발상 자체가 심상치 않은 사이카와 사이에 오고 가는 만담 같은 재미가 유별나게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그만큼 이전 작품보다 둘 사이의 아리송한 관계를 한시바삐 화장실을 방문해야 하는 급사라도 일어난 것처럼 신속하게 풀어나가는데 더 많은 페이지가 할당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쪽으로 비중이 쏠리는 만큼 나머지는 소홀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지상정이라고 한다면, 그만큼 트릭에 소홀한 것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재밌게도 이전 작품보다 확실히 페이지도 늘어났다! 그만큼 모리 히로시 소설을 읽는 재미를 만끽할 수 있다는 시간도 더불어 늘어났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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