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녹정기 | 김용 | 절박한 중년 남성의 섹스 판타지?
드라마 녹정기를 위한 예습
좀처럼 책을 가까이하려 하지 않는 소심한 교양을 가진 사람들조차 숨 가빴던 낮의 고단함과 기나긴 밤의 지루함을 잊은 채 불철주야 독서에 빠져들게 하는, 그래서 자녀를 둔 학부모에겐 공부를 방해하는 불량 친구 같은 못마땅한 존재이자 새색시에겐 밤마다 남편을 뺏어가는 질투 대상이 된 마약 같은 무협소설을 ‘에라 모르겠다. 너희들 사정이야 내 알 바 아니다’라는 식으로 대책 없이 수두룩하게 내놓은 김용(金庸)의 마지막 작품 『녹정기(鹿鼎記)』를 인제야 완독했다.
김용 소설 중 최고라는 무성한 소문 때문에 언제나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지만, 분량이 만만치 않아 차일피일 미루고 있던 와중에 중국 드라마 ‘녹정기(2020)’를 입수하게 되었는데, 드라마를 제대로, 그리고 좀 더 재밌게 감상하려면 원작을 적어도 한 번 정도는 읽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는 판단(김용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장편 드라마를 한 번 이상 감상한 사람은 이런 내 사정을 이해할 것이다)으로 드디어 책장을 펼치게 되었다. 한창 공부해야 할 때인 고등학교 시절에도 예습 따윈 해본 적 없는 내가 늘그막에 뭔 짓을 벌이고 있는지, 내가 생각해도 한심하기 그지없다.
<드라마 「녹정기(2020)」에서 위소보 역을 맡은 张一山> |
천고 제일 꼬마 망나니
비루먹을 내 사정이야 어쨌든, 『녹정기』는 김용 작품 중 가장 긴 소설이라 그런지 김용의 자찬과 소문과는 달리 지루한 부분이 (특히 역사를 부연 설명하는 부분) 없지 않아 있었으며, 김용의 이전 대작(영웅문, 소오강호, 천룡팔부 등)들에서 느낄 수 있는, 그리고 사내대장부라면 무협소설을 읽을 때 응당 기대하기 마련인 가슴 벅찬 호연지기는 쥐뿔도 기대해서는 아니 될 정도로 이전 작품들과는 뚜렷한 대조를 이루는 무협소설이다. 그것은 ‘차별화’라기보다는 이전 작품들의 진중함에 진저리 난 나머지 몸부림치며 반항하는 느낌에 가까우며, 무협소설이라기보다는 제목을 ‘위공공(韋公公) 출세기’라고 수정하고 싶을 정도로 역사소설이라는 명분과 무협소설이라는 기대감을 미끼로 삼은 천하제일 꼬마 망나니의 위인전에 가깝다.
그것은 김용의 마지막 작품이라 그런 것일까? 마치 그동안 얌전 떠느냐 필설로 옮기지 못하고 마음속에 꼬불쳐놓은 음침한 정열을 토해내듯, 임종을 앞둔 사람이 살아생전에 하지 못한 말을 쥐어짜듯, ‘정의로움’으로 압축할 수 있는 이전 작품을 천고 제일의 꼬마 망나니 캐릭터 위소보(韋小寶)로 일축하는 듯하다.
작가의 이전 작품들이 젊은이다운 낙관주의와 호연지기를 드러낸다면, 『녹정기』는 나이를 먹고 현실의 신산함을 인정하게 된 작가가 이전 작품들이 지나치게 권선징악적이고 영웅적 인물 위주로 흐르는 것에 환멸 섞인 괴리감을 느낀 나머지 장난스럽게도 모두의 기대를 저버리는 천하제일 꼬마 망나니에게 강호와 속세와 절세미인들을 주름잡게 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봐도 장점보다는 단점이 훨씬 많은 위소보는 후레자식이 맞고, 그는 후레자식에 걸맞게 살인, 방화, 갈취, 공갈, 희롱, 뇌물수수 등을 밥 먹듯이 하지만, 그런데도 흉살을 맞기는커녕 관복과 염복 등 모든 복을 고루 누린다. 이것은 마치 정직하고 선량하고 양심적인 사람보다는 적당히 비열하고 적당히 교활하고 적당히 악독한 사람이, 그리고 적당히 베풀 줄 아는 사람이 성공한다는 속세의 잔인한 세태를 풍자하는 듯하다. 잘 먹고 잘살려면, 위소보의 말대로 양심은 눈곱만큼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절박한 중년 남성의 섹스 판타지?
유교 영향이 아직 남아있는 중국, 한국, 일본 같은 사회에선 성욕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금기시되어왔다. 더 나아가 노인이 미색을 탐하거나 성을 밝히는 것은 마땅히 지탄받아야 할 추악한 행위다. 하지만, 남자의 성욕은 자연이 부과한 만고불변의 본성이다. 남자는 최대한 많은 여자에게 씨를 뿌리려는 것에 최적화되어 있다면, 여자는 가장 우수하다고 판단한 남자의 씨로 자식을 생산해 잘 길러내는 데에 최적화되어 있다. 이렇게 남녀의 본성이 상충하니 남녀가 타협하고 조율하는 과정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우여곡절과 기상천외한 범죄와 웃지 못할 일화들이 대거 양산되는 것은 당연지사다.
그런데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사실 중 하나가 남자가 나이를 먹으면 성욕도 퇴보한다는 것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육체적 능력이 퇴보하는 것은 당연하므로 남자의 성적인 육체 능력도 당연히 퇴보한다. 그렇다고 번식 욕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성적인 육체 능력이 쇠약해질수록 이에 반비례하여 번식 욕구는 더 강렬해지기도 한다. 그것은 번식 기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절박함 때문이다.
왜 김용은 위소보가 6명의 여자와 난교를 벌이게 하였는가? 그것도 정당한 방식이 아닌 강간으로!
내가 김용의 소설을 전부 다 읽은 것은 아니지만, 내가 아는 김용 소설의 남자 주인공들은 여자 앞에서 숙맥이었으면 숙맥이었지 여자를 강간하기는커녕 여자를 희롱하는 것조차 절대 용납하지 않는 그런 광명정대한 인물이다. 위소보처럼 밥 먹듯이 여자를 희롱하거나 자기를 따르지 않는 여자를 강간해서까지 강제로 소유하려는 그런 파렴치한 인물은 단 한 사람도 없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은 여러 미녀 사이에서 갈등을 겪기는 하지만 결국엔 단 한 명의 여자와 맺어진다.
김용이 녹정기를 연재할 때의 나이가 40대 중반에서 후반에 이르는 때이다. 이때면 남자의 성적인 육체 능력의 하강 곡선이 뚜렷하게 나타남과 동시에 ─ 이제 번식의 기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그 절박함으로 인해 ─ 번식 욕구는 더 강렬해질 수 있다. 그것은 강간 범죄자의 연령 분포가 한창 혈기 왕성한 나이인 20대 전후가 아니라 40대 전후에서 50대 전후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는 사실이 방증한다.
내가 볼 때 위소보의 일곱 마누라와 강간 • 난교는 작가를 포함한 뭇 남성들의 영영 충족할 수 없는 섹스 판타지의 대리만족 같은 분출이지 않을까 싶다. 작가가 세 번 결혼했다는 사실이 그가 남들보다 유난히 번식 욕구가 강하다는 것을 말한다고 하면 지나친 억측일까?
<드라마 「녹정기(2020)」, 당연히 이후 장면은 시청자의 상상에 맡겨진다> |
여자에겐 지극히 혐오스러운 소설
이것이 『녹정기』가 왜 김용 독자들에게 (그중 남자 독자들?) 유난히 칭송받는 이유이지 않을까 싶다. 뭇 남성의 망상 속 파티에서 늘 주연 자리를 차지하는 섹스 판타지를 『녹정기』는 위소보라는 시정잡배를 통해 통렬하게 지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 이름 석 자도 못 쓰는 위소보 같은 범속한 인물조차 일곱 마누라를 두었다면 그보다는 많이 배우고 그보다는 좀 더 양심적인 당신이 한두 명의 마누라를 더 둔다고 해서 세상이 무너지기라도 하겠는가! 위소보는 이런 망측하지만, 한편으론 리비도를 방종하게 분출하는 망상을 끊임없이 자극한다.
한편으론, 그런 이유로 여자가 읽으면 치가 떨릴 수도 있는 혐오 소설이다. 한 남자가 일곱 명의 마누라를 두었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여자 처지에선 이름 모를 국가의 4부리그 벤치에 있는 축구선수의 첫 번째 아내가 되는 것보단 프리미어리그 주전 선수의 두세 번째 마누라가 되는 것이 번식에는 더 유리하다. 이런 이유로 일부일처제는 여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남자를 위한 것이다) 단지 강간당하고 강간범의 아이를 뱄다는 이유로 여자가 강간범에게 고분고분하고 순종하는 설정이 못마땅하다. 탐이 나는 여자를 강간함으로써 소유할 수 있다는 남자들만의 마초적인 오해는 여자도 강간당하는 상황을 즐긴다는 얼토당토아니한 착각과 함께 가부장제가 나은 최악의 선입견이다.
어찌 되었든, 드라마를 감상하기 위한 긴 사전 준비는 마친 셈이다. 이제 차분하게 드라마를 감상하는 일만 남았지만, 그게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다. 어떤 여인은 간드러지도록 화사했으며, 어떤 여인은 온순했고, 어떤 여인은 활발했으며, 또 어떤 여인은 단정하면서도 수려했다는 위소보의 일곱 마누라를 어떤 배우가 어떻게 연기할지를 상상하면, 잠시 위축되었던 나의 섹스 판타지 망상이 또다시 고개를 쳐들 것이니 내 어찌 마음이 편안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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