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강 | 핑루 | 무엇이 보통 사람을 돌이킬 수 없는 검은 강을 건너게 하는 것일까?
자전의 곁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가 그녀의 속마음을 들여다보았다면 어쩌면 그녀가 하려는 말을 들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사랑이란 게 뭔지 몰라요. 수건으로 내 몸을 닦아주는 게 사랑인가요? 내 겨드랑이를 간지럽히고 아랫배를 쓰다듬고 아무도 만진 적 없는 곳을 만지는 것이 사랑인가요? 세상에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엄마도 날 사랑하지 않았고 아빠도 일찍 날 떠났어요. 그는 번들거리는 머리를 내게 들이대고 더러운 손으로 날 만지고 역겨운 냄새를 풍기며 나를 따라왔어요. 이 비밀을 아는 사람이 세상에 없다면 나는 자유로울 수 있지 않을까요? 내 과거를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면 내게도 사랑할 기회가 있지 않을까요?” (p198)
특별할 것 없는 특별함, 살인
살인 사건은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특별하지만, 살인자를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 역시 다른 범죄자를 바라보는 것과는 어딘지 모르게 특별하다. 그리고 무심하다.
무엇이 특별한가 하면 마치 자신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전혀 그럴 사람이 아닌 것처럼, 마치 자신은 오래전부터 ‘선(善) ’의 가치를 존중하며 살아온 군자라도 되는 것처럼 으스댄다. 이들이 살인자를 향해 입에 거품을 물고 달려드는 모습은 굶주린 하이에나가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는 안전한 먹잇감을 얻고 나서 곧 만끽하게 될 포만감을 기대하며 우렁차게 포효하는 것과 같다. 평소에는 직장 상사의 부당한 대우나 모욕적이고 비인간적인 언행에는 찍소리도 못하는 사람도 이 때문만큼은 기세등등한 장군감이다. 만약 대중의 야멸스러운 세 치 혀끝에서 놀아나는 그 대상이, 즉 이 경우에는 살인자가 어떠한 구속 없이 눈앞에 척 버티고 있다 해도 과연 그렇게 혀를 방자하게 놀릴 수 있을지 의문스럽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무엇이 무심한가 하면 가차 없는 비난을 퍼부으면서도 언론을 통해 드러난 가십거리 정도 수준의 이야기와는 매우 다를 수 있는, 살인자가 막상 살인을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그 절박한 사정이나 상황 등 사건의 진짜 동기나 가해자의 말 못 할 속사정에 대해서는 전혀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사는데 전혀 보탬이 안 될 뿐만 아니라 보는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연예인들의 시시콜콜한 사생활은 집요하게 파고들면서, 인간의 불완전함과 더불어 인간 사회의 미성숙함까지 들여다볼 수 있는 이 절호의 기회는 무심하게 그냥 흘려보낸다. 돈이나 자극적인 저질 오락거리가 될만한 것을 제외한 다른 일에 머리를 굴린다는 것은 부질없는 낭비라고 굳게 믿으며 사는 속물 중의 속물들이다. 아직도 아파트 투기와 프랜차이즈가 만연한 것을 보면 딱히 돈 굴리는데도 머리를 쓰려고 애쓰는 것 같지는 않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것 아는가?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에는 살인을 위해 특별히 태어난 특별한 사람도 없고, 살인이 일어나기에 딱 좋은 특별한 상황도 필요 없다는 것을. 즉 특별한 사람이 특별한 상황에 맞닥트린 이유로 반드시 살인을 저지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살인 사건을 완성하는 최후의 행동이라 할 수 있는 살인이 행해지는 그 마지막 장면만 제외한다면, 사건의 시작부터 살인으로 끝나기 전까지의 짧을 수도 있고 길 수도 있는 그 과정은 그리 특별할 것도 없다. 누구나 겪는 일은 아니겠지만, 많은 사람이 겪는 일이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그런 사람들 모두 사람을 죽이지는 않는다. 대부분 사람은 타인과의 대립이나 마찰로 생긴 긴장감을 해소하고자 대화나 법률에 의지한다. 아니면 약간의 쓰라림을 감수하고 그냥 포기해 버린다. 그중에서 소수만이 소소한 폭력에 의지하려 들고, 그중에서도 극소수만이 끝내 사람을 죽인다.
왜 비슷한 상황에서 누구는 뒤로 물러서는가 하면 ─ 비록 극소수지만 ─ 누구는 사람을 죽이는가? 무엇이 사람을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몰고 가는가? 무엇이 사람이 사람을 죽이게 만드는가? 인류 문명이 개화한 이래 수많은 석학이 이 간단하면서도 풀기 어려운 문제로 말미암아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지만, 진실은 여전히 소원하다. 우리 같은 범인들은 ‘천성’ 탓으로 돌리며 석학들이 풀지 못한 난제에 대해 콧방귀를 뀌겠지만 말이다.
장황한 서론을 마치고
역시나 책과는 별 상관없는 서론이 쓸데없이 길었지만, 아무튼 핑루(平路)의 『검은 강(黑水)』은 얼마 전에 읽은 마치다 고(町田康)의 『살인의 고백(告白)』처럼 실화를 기반으로 재구성한 범죄 실화 소설이다. 두 소설 다 ‘살인’보다는 한 사람으로 하여금 다른 사람을 죽이도록 몰아가는 그 쓸쓸하고 서글픈 ‘살인의 역사’에 대해 초점을 맞추고 있다.
알다시피 누구나 살면서 여러 번 살의를 품을 수 있지만, 그 살의를 품을 때마다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아니다. 아마 그랬다가는 진즉에 호모 사피엔스는 멸종했을 것이다. 다만, 사람이 살아가면서, 여러 사람과 부대끼다 보면 인생에 있어서 최소 한 번 이상 살의를 품을 수 있다는 데 동의한다면, 살인자의 고백 같은 이 두 책을 남의 이야기처럼 한 귀로 흘려듣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개운치가 않다. 거창하게 인간의 불완전함과 나약함에 천착한다는 문학의 사명까지 언급하고 싶지는 않고, 다만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카페에서 일하는 27세의 여성이 단골손님으로 알고 지내던 사업가와 여교수 부부를 계획적으로 살해한 이유에 대해 나는 알고 싶을 뿐이다.
<커피보다 천 배 만 배 쓴 것이 인생이다> |
무관심과 오해 속에 영원히 묻힌 진실
가해자 자전은 무기징역수로 복역 중이다. 이 살인 사건은 이미 법적으로 결말이 난 사건이고, 피해자를 알고 지낸 가족들 역시 버젓이 살고 있다. 그녀가 그 두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확실하기에 그녀는 전혀 무고하지 않다. 하나 분명한 것은 그녀가 왜 두 사람을 죽였는지, 왜 두 사람을 죽여야 했는지 그 동기와 연유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그것은 남에게 자신의 심중을 털어놓기를 꺼리는 가해자의 성격 때문일 수도 있지만, 사람을 죽인 자는 ‘악인’이고 ‘악인’이 하는 말은 모두 거짓말이라는 선입관으로 무장한 사회와 대중이 자신들의 억측으로 가해자의 입을 봉해버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들은 이 사건을 금품을 노린 살인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자전의 말은 다르다. 그녀는 복잡한 심리적인 상황이 이 사건에 얽혀있음을 담담하게 진술한다. 그러나 죽은 사람은 말을 할 수 없다는 점에서 자전의 말을 증명해 줄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자전이 그러한 점을 역이용해 자신의 죄를 회피하려고 거짓말을 꾸며낸 것일까? 아니면 정말로 진실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사건이 일으킨 사회적 파장이 완전히 가라앉기도 전에 용감하게 사건을 재구성한 작가 핑루도, 그리고 사건을 재판하면서 공정성을 지키지 못하고 개인적 심증을 재판에 개입시킨 심히 자질이 의심스러운 판사와 피해자를 잔악무도한 살인자로 몰아간 검사, 그리고 그녀의 굳게 닫힌 마음을 여는데 고심했던 그녀의 변호사도 알 수 없다. 진실은 오직 자전만이 알고 있지만, 그녀의 주장이 사실인지 거짓인지를 판별해낼 수 있는 증거는 이미 연기처럼 사라졌다는 점에서 이 사건의 진짜 원인은 영원히 묻히게 되고 말았다.
누구도 되묻지 않은 질문
가해자를 아니꼽게 보는 누군가에겐 『검은 강(黑水)』은 가해자를 두둔하는 당치않은 소설로 보일 수도 있다. 그들은 소설이 묘사하는 그녀의 불행했던 어린 시절과 현재의 가난, 그리고 그녀와 피해 남성 사이에 오갔던 혼란스러웠던 감정적 • 육체적 교류가 그녀의 살인을 변명해주고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범죄자들이 불행한 과거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종종 발견되고, 때론 가난과 불륜이 살인 사건을 일으키는 주요한 배경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이 소설 『검은 강』을 마녀사냥당한 가해자를 동정하는 마음으로 지어졌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이 책을 진지하게 읽은 독자라면, 그리고 약간의 상식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독자라면 그런 주장이 허무맹랑한 억측임을 간파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문제는 법과 사회는 가해자의 진술에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자신들 편한 대로 금품을 노린 살인 사건이라고 결정했다는 점이다. 이 살인 동기에 대해 가해자는 끝끝내 인정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형을 받았다. 다만 그녀는 억울했다. 자신이 두 사람을 죽였다는 죄를 짊어진 것이 억울한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을 죽인 이유에 대해 법과 사회가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도 되묻지 않았다. 치정에 얽힌 감정적 살인보다는 금품을 노린 탐욕적 살인이 더 죄악스러워 보이고, 그것이 마녀사냥의 대상으로 더 적합해서일까? 아니면 살인자라는 극악무도한 범법자에 대해 그 이상의 관심을 가지는 것은 관용의 낭비라고 생각해서일까? 만약 자전의 진술 전부가 거짓말이 아니고 그 속에 조금이라도 사실이 섞여 있다면, 그녀가 단순히 금품을 목적으로 두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은 지극히 의심스럽다.
어쩌면, 범죄 동기를 세상 사람들이 범죄에 대해 자신을 스스로 이해시키고 만족시키기 위한 환상으로 치부하는 교고쿠도(교고쿠 나쓰히코(京極 夏彦)의 ‘백귀야행(百鬼夜行)’ 시리즈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말처럼 동기는 중요하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사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누구나 살의를 품을 수 있는 만큼 ‘동기’ 역시 누구에게나 있다. 자전의 경우 검사의 주장이 맞는다면, 그것은 탐욕이다. 하지만, 자전의 주장이 맞는다면 그것은 자신의 비밀을 지키고 싶어 했던 한 여자의 방어 본능이 살의를 일으킨 것이 된다. 아니면 진실은 그 중간 어디에 있을지도 모른다. 돈도 갖고 싶었고, 비밀도 지키고 싶었다.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어찌 되었든 두 이유 다 살인을 정당화할 수는 없지만, 참작의 여지는 분명하게 갈린다. 자신의 비밀이 세상에 밝혀지는 것을 병적으로 꺼렸던 여자가, 사회의 손가락질까지 받을 가능성이 농후했던 어두운 비밀이 남에게 까발려질 것 같은 절망적인 순간은 심리적으로 막다른 골목에 몰린 것과 다름없다. 이런 가해자의 불안정하고 혼란스러운 심정을 모르고서는 사건의 본질을 온전하게 이해할 수 없기에 핑루는 과감히 붓을 들었던 것이리라.
무엇이 우리가 돌이킬 수 없는 검은 강을 건너게 하는 것일까?
이 소설이 비교적 짧은 분량이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이유는 피해 여성과 가해 여성을 대비시키는 이중의 서술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미 사건의 진범은 확정되었기에 추리소설처럼 막판에 범인이 뒤바뀌는 반전이나 트릭은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물속에 반쯤 잠긴 채 남편의 시신 옆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피해 여성의 회상 같은 독백과 자신의 비밀을 알고 있는 타인을 죽여야 자신이 자유로울 것으로 믿었을 뿐만 아니라 결국 그것을 실행에 옮겼을 정도로 타인에게 비밀을 밝히기를 극히 꺼리던 가해 여성의 넋두리 같은 독백이야말로 『검은 강(黑水)』에서 독자의 눈길을 지속해서 붙잡아 둘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다. 이 두 여성의 심정을 대비적으로 재구성한 독백 때문에 『검은 강』은 감히 인간의 불완전함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것이다. ─ 문명의 시대에서 ─ 사람은 왜 사람을 죽이는가? 왜 사람은 죽임을 당하는가? 영원히 풀 수 없을 것 같은 이 수수께끼에 대해 가해 여성과 피해 여성은 자신들의 인생으로써 답하고 있다. 한 사람은 죽음으로써 이미 답변을 완료했고, 또 한 사람은 사회와 영원히 격리되는 것으로서 답변을 대신했다.
결혼에 실패했음에도 남들 앞에서는 금실 좋은 부부처럼 행동했던 피해 여성과 드라마를 보며 행복한 미래를 다짐했던 가해 여성은 부유층과 하층민, 그리고 교수와 변두리 커피점 점장이라는 경제 • 사회적 계층으로도 대비된다. 얼핏 봐서는 서로 전혀 인연이 닿지 않을 것 같았던 이 두 사람은 또 다른 피해자인 교수의 남편을 매개 점으로 악연이 형성된다. 가해 여성과 교수 남편이 불륜 관계였는지는 검사의 주장대로 가해 여성의 진술을 제외하고는 입증할 만한 자료가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가해 여성과 피해 여성의 독백을 돌이켜보면 얼마든지 돌이킬 수 있는 지점이 있었다. 이것은 『살인의 고백(告白)』에서 마을 사람들을 잔인하게 살육한 구마타로 역시 마찬가지였다. 왜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지 물어보기에 앞서 무엇이 사람으로 하여금 사람을 죽여야만 하는 돌이킬 수 없는 지점으로까지 몰아붙이지를 먼저 물어봐야 하지는 않을까? 그것은 상대적 빈곤이라는 부의 불평등이 가져온 박탈감일까? 두 명의 피해자에게서 받은 치욕적인 대우가 남긴 모욕감일까? 아니면 트라우마가 일으킨 심리적 압박의 결과일까?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돌이킬 수 없는 검은 강을 건너게 하여 살인자로 만들었을까?
‘살의’는 살인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세 사람의 악연을 맺어낸 대만 사회는 응당 이 모든 질문에 답하도록 노력해야 할 의무가 있었지만, 그러지 못했기에 저자 핑루는 사건을 재구성하는 모험에 뛰어들었다. 그렇다면 『검은 강(黑水)』은 온전한 답을 제시하는가? 이에 대한 내 대답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고 말하고 싶다. 성의 없는 대답처럼 들리겠지만 이 소설은 추리소설이 아니다. 세상은 추리소설처럼 가해자와 피해자가 명확하게 나뉘는 것도 아니고, 동기 역시 몇 개의 문장으로 간단명료하게 이해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현실에서는 단서 몇 개만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명탐정도 없고, 명확한 목적의식으로 현란한 트릭을 선보이며 익스트림 스포츠라도 되는 살인을 즐기고 선전하는 사람도 없다. ─ 살인을 즐기는 연쇄살인범을 제외한다면 ─ 단지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이 그리 특별하지 않은 이유로 그저 그런 살인을 저지를 뿐이다.
자전이 안고 살았던 불행과 고통, 빈곤은 그녀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살의 역시 살인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렇지만 누구는 사람을 죽이고 누구는 그냥 참고 넘어간다. 층간 소음이 평범한 이웃을 살인자로 만들기도 하지만, 층간 소음에 시달리는 사람 모두 살인자가 되는 것은 아닌 것처럼 말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살인을 저지르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 자체가 크나큰 천운일지도 모른다. 살인은 기껏해야 인생에서 한 번 정도 맞닥트리게 되는 엄청난 불행일 수도, 아니면 엄청난 불운일 수도 있지만, 『검은 강』은 사람을 죽이는 사람이, 그리고 살해당하는 사람이 결코 드라마틱하고 전율적인 ‘살인 사건’을 위해 태어난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는 점을 부각함으로써 사람의 불완전한 인성과 그런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미성숙한 사회에 모종의 경고를 보내고 있는 셈이다. 다음 살인자는, 혹은 다음 피해자는 바로 당신이라고 말이다.
비록 보잘 것 없지만 광고 수익(Ad revenue)은 블로거의 콘텐츠 창작 의욕을 북돋우는 강장제이자 때론 하루하루를 이어주는 즐거움입니다
0 comments:
댓글 쓰기
댓글은 검토 후 게재됩니다.
본문이나 댓글을 정독하신 후 신중히 작성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