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명의 죽고 싶은 아이들(十二人の死にたい子どもたち, 2019) | 호기심 앞에선 장사가 없다!
"자기 생명을 부정하려고 여기에 왔어. 자살한다는 건 그런 거야. 태어난 것에 대한 항의지!"
이번에도 예쁘고 귀여운 작은 새 같은 하시모토 칸나(橋本 環奈)가 나오길래 아무런 망설임 없이 감상을 시작했다. 「12명의 죽고 싶은 아이들(十二人の死にたい子どもたち)」, 제목부터 범상치가 않은데, 만약 뇌가 편육이 되어 버린 앞뒤 꽉 막힌 사람이 제목을 본다면 어린 것들이 뭘 안다고 꼴값을 떠냐고 침까지 튀기며 말할 것 같다. 그거야말로 진짜 꼴값이다. 그런 사람에게 하루 평균 36명, 연간 1만3092명이 자살하는 이 나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본다면 어떤 기가 막힌 대답이 돌아올지 참으로 궁금하다.
대충 제목만 봐도 ‘자살’을 소재로 한 영화임은 분명히 드러나고, 나 역시 그렇게 알고 재생을 시작했다. 그래서 별다른 기대도 하지 않았다. 단지, 우리의 귀여운 칸나가 왜 ‘죽어야만’ 하는지가 궁금했을 뿐이다. 이러고 보면 나도 참 싱거운 놈이다. 하지만, 영화는 예상외의 전개로 기대치 않은 신통방통한 재미를 선물한다. 그것은 바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르인 ‘추리’가 접목된 것이다.
문 닫은 병원 지하로 12명의 소년 소녀들이 모인다. 그중에는 영화 안에서도 스타 여배우로서 인기를 누리는 칸나(료코 역)도 포함된다. 모임을 주최한 사토시의 침착한 진행으로 집단 안락사를 막 시작하려는 찰나에 12명은 뜻하지 않은 재난과 마주친다. 초대받지 않은 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도 갑작스러운 일이지만, 12명은 그 한 사람이 이미 약을 먹고 죽은 것 같다는 사실에 당황한다. 얼마나 급했으면 다른 사람들을 기다리지 않고 혼자 갔을까, 혹시 무임승차? 아니면 누군가 사람을 죽여놓고 그 사실을 얼버무리고자 이곳으로 끌고 온 것일까? 이미 죽을 각오로 온 12명이지만, 역시 호기심 앞에서는 당해낼 자가 없다. 그들은 계획했던 ‘집단 자살’은 잠시 뒤로 제쳐놓은 채 13번째 인물, 즉 ‘제로’의 신상에 얽힌 비밀을 밝히기로 하는 데 동의한다.
나름으로 추리가 재미있게 흘러가는 것도 볼만하지만, 낯선 12명이 서로의 아픔을 위로하고 토닥이며 해피한 결말로 이끌어가는 과정도 나쁘지는 않았다. 특히 외부에 의존하지 않고 그들 스스로 대화를 통해 죽음의 문턱에서 서서히 멀어지는 모습은 꽤 감동적이다. 이것은 비슷한 상황을 단 한 번이라도 맞이했던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쓰라린 경험과 값비싼 대가가 눅눅하게 녹아있는 진솔한 감개다.
역시 죽음을 결심한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대화다. 그것은 매뉴얼대로 주워 뱉는 무심한 말도 아니고, 어디서 주워들은 어쭙잖은 지식으로 위로한답시고 상대를 넘겨짚으려는 시건방진 말이 아니라 동병상련의 애틋함이 담긴 진심 어린 대화가 최상의 효과임을 영화는 보여준다. 그래서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최소한 한 번 이상 죽음을 진지하게 고민한 사람이 아니라면 제대로 이해하기는 어려울지도.
사실 이런 영화는 자살률이 OECD 평균보다는 높지만, 한국보다는 현격히 낮은 일본이 아니라 한국에서 만들어야 제격인데, 어찌 된 일인지 한국에선 이런 영화가 도통 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아니면 내가 못 찾은 것일까?). 한국은 여전히 높은 자살률을 무턱대고 덮으려고만 한다. 그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각도 마치 자기들은 생에 한 번도 죽음을 생각하지 않을 것처럼 여전히 차갑고 냉소적이긴 마찬가지다. 살아가면서 단 한 번도 자살을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엄청나게 복 받은 사람이거나, 한없이 온순한 다운증후군 환자이거나, 아니면 거의 다운증후군 환자에 가까운 지적 편력으로 일관하는 누군가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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