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3/31

드라마 서검은구록(書劍恩仇錄, 2009)

드라마 서검은구록(書劍恩仇錄, 2009)

드라마 리뷰 | 서검은구록(청향비, 書劍恩仇錄, The Book and the Sword)
review rating

원작을 액자식으로 껴안은 우만정의 이야기

김용(金庸) 작품들과 격렬하게 친해지는 과정 중 하나는 원작을 읽으면 그에 상응하는 드라마를 감상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원작 소설 감상 후 (그 원작을 각색한) 드라마 감상하기’가 일종의 의무처럼 보이지만, 사실 김용 소설을 읽고 나면 그 소설을 각색한 드라마를 감상하지 않고는 못 배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만큼 소설은 재밌고, 그래서 (김용 소설을 각색한) 드라마도 기대된다.

드라마 「서검은구록」의 이야기 흐름은 크게 두 가지 줄기로 나눠진다. 하나는 관외에서 ‘우만정(于萬亭) vs 건륭(乾隆)’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이야기, 다른 하나는 관내(중원)에서 ‘홍화회(紅花會) vs 건륭’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이야기다. 관내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는 몇몇 생략/축소된 사건들을 제외하면 원작을 그대로 활용했다. 하지만, 관외(서역)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는 완전히 새롭게 추가된 것이다.

원작을 읽은 사람은 알겠지만, 원작에서 우만정은 홍화회를 설립한 총타주이자 건륭과 진가락(陳家洛)의 비밀을 최초로 드러낸 인물로 나오지만, 이미 죽은 사람이므로 그의 영향력은 선배 고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하지만, 드라마에서 우만정은 강희제의 9황자이자 건륭의 숙부인 애신각라 윤당(愛新覺羅 允禟)으로 변신하고, 윤당이 옹정제와 대립하다 색사흑(塞思黑, 돼지 새끼)으로 개명되고 유폐되는 수모를 겪은 역사적 사실도 그대로 빌렸다. 다만, 실제 윤당은 건륭이 황제로 즉위할 땐 이미 죽은 사람이지만, 드라마에선 ‘죽은 척’한 것으로 설정된다. 그렇다면 선황에 대한 개인적 원한을 품고 있는 윤당이 ‘우만정’으로 이름을 바꿔 홍화회를 설립한 목적은 좋은 뜻일 리는 없는 것이다.

소설 서검은구록 | 싹수 있는 김용의 첫 작품

우만정과 장소중

드라마 리뷰 | 서검은구록(청향비, 書劍恩仇錄, The Book and the Sword)
<우만정과 장소중>

꼭 무협이라는 장르를 꼭 집어 말하지 않아도 세상 모든 ‘이야기’에서 악당이 빠지면 김빠진 맥주처럼 흥도 재미도 맛도 빠진 밋밋한 이야기로 전락하기 일쑤다. 원작에서 악역은 장소중이 도맡았다. 무당파의 패륜아인 장소중은 진가락이 막판에 기연으로 얻은 미지의 무공을 습득하고서야 대적할 수 있을 만큼 (어마어마한 문파에서 나온 배신자에 걸맞은) 어마어마한 무공을 지닌 인물이다. 홍화회의 대활약이 이 장소중 앞에서 막힌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한마디로 장소중은 권력의 개노릇을 하는 진짜 밥맛인 인물이다(장소중은 배우 리동린(李东霖)이 연기).

장소중이 적나라하게 무식한 악역이라면, 우만정은 비열하게 지능적인 악역이다. 우만정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강호의 철칙인 의리와 도리를 악용하는 비열하고 음흉한 인물이다. 하지만, 우만정이 자신의 복권을 목표로 홍화회를 기만하고 건륭과 대립함으로써 드라마 「서검은구록」은 원작에 없는 새 이야기를 시청자에게 선물할 수 있게 된다. 김용 드라마에서까지 정치적인 권모술수를 봐야 하는 것이 마뜩잖은 사람도 있겠지만 말이다(우만중은 대만 배우인 리우 더카이(刘德凯)가 열연).

건륭과 황태후

드라마 리뷰 | 서검은구록(청향비, 書劍恩仇錄, The Book and the Sword)
<황태후와 건륭>

건륭의 첫인상은 후줄근한 아저씨 같아서 황태후의 치맛자락에서 놀아나는 나약한 황제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사람을 첫인상만으로 속단할 수 없듯 건륭은 시간이 갈수록 노련한 정치적 수완과 우만정의 계략을 뛰어넘는 지략, 그리고 막판엔 황태후의 치맛바람마저 누르는 강인한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그는 이상주의에 빠진 진가락 앞에서 형제애를 느끼는 척하는 얄미운 기지까지 발휘한다. 한편으론 천하에 백성과 신하만 있을 뿐 지기는 없는 황제의 고단하고 고독한 심정을 간간이 드러내며 황제도 역시 사람임을 새삼스레 일깨워주기도 한다.

아무튼, 건륭은 겉과 속이 다를 뿐만 아니라 왼손이 하는 일은 오른손이 모르고 왼발이 디딜 방향을 오른발이 모르게 하는 얄미운 정치인의 모범 격이다. 이런 식으로 건륭은 원작의 단조로운 이미지에서 탈피한 입체적이고 생동감 있는 주인공으로 재탄생한다(건륭은 홍콩 배우인 정샤오추(郑少秋)가 연기).

툭하면 여자는 내정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면서도 은근하게 압력을 행사하는 황태후를 연기한 첸 샐리(陈莎莉)는 다른 작품에서도 황태후 역을 맡았던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한마디 한마디에 뼈와 위엄이 서슬처럼 서려 있는 것이 포스가 무시무시하다. 그렇지만, 결국 그녀는 관록이 붙을 대로 붙은 건륭에게 밀리고 만다.

진가락과 곽청동과 향향공주

드라마 리뷰 | 서검은구록(청향비, 書劍恩仇錄, The Book and the Sword)
<황제와 의기투합한 진가락>
드라마 리뷰 | 서검은구록(청향비, 書劍恩仇錄, The Book and the Sword)
<곽청동과 향향공주(객사려)>

진가락의 첫인상은 듬직함/진지함과는 거리가 멀다. 앳된 얼굴이 장난꾸러기 같다고 할까나? 하지만, 반강제적으로 홍화회 총타주가 되고부터는 경험이 쌓이면서 서서히 관록을 떨치게 된다. 친형이라는 이유만으로 황제를 털썩 믿는 여전히 순진한 진가락이지만, 여자 앞에서의 답답한 모습은 많이 사라졌다. 드라마의 진가락은 곽청동과 향향공주 앞에서 주저하는 대신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낸다. 그래서 그는 막판에 향향공주를 건륭에게 진상하는 대신 서역으로 도망 보낼 것을 계획한다. 알다시피 원작에서 진가락은 대의를 위해 향향공주를 건륭에게 돌려보낸다(진가락은 차오젠위(乔振宇)가 연기).

배우 저우리치(周励淇)의 첫인상은 여장군 같은 듬직한 곽청동과 아주 잘 어울린다. 원작과는 달리 어렸을 때부터 진가락과 함께 성장하면서 서로 사모하게 된 그녀는 동생 향향공주의 행복을 위해 기꺼이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을 정도로 사사로운 정에 얽매이지 않는 영웅적인 인물이다.

향향공주 역은 배우 잉거(颖儿)가 맡았는데, 연약하고 순진하면서도 아름답고 우아한 천상의 요정 같은 외모가 정말로 눈부실 정도로 빛난다. 원작을 읽으면서 향향공주 같은 절세미인을 완벽하게 소화할 류이페이(劉亦菲) 같은 배우가 중국에 또 있을까 하는 걱정이 살짝 있었는데, 역시 중국엔 사람이 많은 만큼 인물도 많다. 다만, 아쉬운 것은 시나리오상 너무 늦게 등장한다는 것. 향향공주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드라마 「서검은구록」은 완전히 새로운 재미로 접어든다.

낙빙, 이원지, 주기

드라마 리뷰 | 서검은구록(청향비, 書劍恩仇錄, The Book and the Sword)
<낙빙, 이원지, 주기>

살짝 까무잡잡한 피부가 쌍칼을 휘두르는 여도적 캐릭터에 잘 어울리는 치팡(齐芳, 낙빙 역), 개구쟁이 미소년 같은 외모지만, 숙맥 여어동을 향한 일편단심이 애틋한 이원지를 연기한 루첸(路晨), 낙빙이 신혼 첫날밤에 남편과의 기 싸움에 대해 언급하자마자 칼로 결판내면 된다고 말하는 드세지만 귀엽고 천진한 주기를 연기한 리청위안(李呈媛) 등의 미모와 연기를 감상하는 것도 쏠쏠하다.

드라마 리뷰 | 서검은구록(청향비, 書劍恩仇錄, The Book and the Sword)
<천산쌍응(天山雙鷹), 우측의 그분은 소림축구의 '무쇠 머리' 그분임>
드라마 리뷰 | 서검은구록(청향비, 書劍恩仇錄, The Book and the Sword)
<어떻게 저런 자세로 죽을 수 있지?>

마무리

2009년 작품이라 그런지 지금의 눈높이로 보면 액션 수준이나 촬영 장소/세트도 평범하다(의상은 볼만). 그래서 초반은 다소 실망스러울 수도 있다. 하지만, 원작을 색다르게 개작한 효과는 초반보단 후반부로 갈수록 드러나기 때문에 후반부로 갈수록 이야기가 꽤 흥미진진해진다.

특히 권력욕과 원한에 불타오르는 우만정의 ‘한 번뿐인 인생이니 더 명예롭게 살아야지’라고 하는 세속적인 인생철학과 ‘죽으면 그만인 인생 다 부질없는 짓이에요. 기껏해야 수집 년인 인생 얽매여 살아 무엇하겠어요’라는 포천가의 ‘인생무상 공수래공수거’의 극명한 대비는 모를 듯 말 듯 뭔가가 숨겨져 있는 것 같아 울림이 남는다. 우만정은 자신의 욕망을 음모적으로 추구하다 음모에 휘말려 결딴나고, 포천가는 우만정의 불타는 야욕에 불살라진다. 아, 인생은 이토록 허망한 것인데, 왜 우리는 죽기 살기로 경쟁해야만 하는가! 의리와 도리를 중시하는 강호의 규칙은 왜 현실과 조화할 수 없는가!

드라마로 리메이크된 횟수를 보면, 김용의 첫 작품이라 그런지 영웅문 시리즈만큼 잘 알려지지 않은 듯하다. 하지만, 소설 『서검은구록』은 건륭, 홍화회, 진가락, 우만정 등 딱히 중심이 되는 주인공이 없는 다중 주인공물로써 누구누구를 중심에 세우고 대립시키느냐에 따라 개작의 묘미를 살릴 여지가 많다. 그래서 잊을 만하면, 그리고 보고 싶을 만하면 리메이크되는 영웅문 시리즈만큼은 못 되더라도 간간이 리메이크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새로운 향향공주를 느긋하게 음미하는 재미도 빼놓을 수 없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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