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륭전기(钱塘传奇, 2014) | 아, 해도 해도 너무해
앞서 감상한 「강희왕조(康熙王朝, 2001)」와 「옹정황제(雍正王朝, 1999)」처럼 작가 얼웨허(二月河)의 제왕삼부곡(落霞三部曲) 시리즈를 각색한 작품인 줄 지레짐작했는데, 이게 완전히 일생일대의 오판이 되어버렸다. 역사에서 인물만 빌려 왔을 뿐, 인물들의 전기나 성격, 활약 등은 얼웨허의 소설과도 역사와도 완전 딴판이다. 그렇다고 대체 역사 장르라고 하기엔 줄거리는 말도 안 되고, (주요 배우 몇몇을 제외하곤) 배우들의 연기는 민망스럽고, 똑같은 액션 장면을 몇 번이고 우려먹는 연출은 성의 없어 보인다. 한마디로 이도 저도 아닌 드라마.
그나마 봐줄 만한 것은 의상과 소품 정도인데, 이것도 똥 무더기 속에 빠진 잡초처럼 나머지 요소들이 너무 후져서 반강제로 돋보이는 것이지 좀 유명하다 싶은 사극에 비하면 역시 부족하다.
알고 보니 「건륭전기(钱塘传奇, 2014)」는 얼웨허의 소설이 아니라 「전당전기(钱塘传奇, 2002)」라는 드라마를 리메이크한 작품이라는데, 아무리 감독과 시나리오 작가의 상상력이 홍수 난 것처럼 봇물 터질지라도, 그래서 역사를 엿 바꿔 먹고 싶은 충동에 휩싸일지라도 개연성 없는 막무가내식 이야기 전개는 황당하다 못해 짜증스럽다. 한국어 제목에 속은 것 역시 짜증 난다.
1인 2역, 건륭(乾隆)
<훗날 황후 자리를 넘보는 아란과 건륭> |
배우 유샤오쿤(余少群)은 태산처럼 묵직한 건륭제(홍력)와 낙엽처럼 가벼운 진방국이라는 정반대의 개성을 가진 두 인물을 맡아 열연.
옹정제가 자기 딸을 한족 신하의 아들과 몰래 바꿔치기했다는 건륭 출생을 둘러싼 비밀은 김용 소설의 『서검은구록(書劍恩仇錄)』처럼 야사에서 가져왔고, 황궁 밖으로 새어 나간다면 천하를 발칵 뒤집고도 남을만한 이 소재가 드라마의 주요 긴장감과 유치찬란한 권모술수를 초래하는 구심점이 된다.
드라마 「건륭전기(钱塘传奇)」에 등장하는 역사적 인물들의 성격은 얼웨허가 묘사한 그것과는 정반대인 경우가 대부분인데 유일하게 얼웨허의 구상과도, 그리고 역사적 사실과도 부합하는 사실이 있다면, 그것은 건륭제의 여성 편력 성향이지 않을까 싶다.
얼웨허는 건륭을 황궁 안에서건 미행 잠복 중이건,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면 자빠트리고 봐야 직성이 풀리는 사랑 넘치는 황제로 묘사했는데, 말이 좋아 ‘풍류 황제’이지 (건륭의 아버지) 옹정제와 비교하면 호색한 수준이다.
아무튼, 세상 모든 여자가 황은을 받아 황자를 잉태하길 원하는 만큼 황제의 구애를 마다할 여자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감독은 이런 뭇 남성들이 꿈꾸는 하렘 판타지를 무척이나 시기했는지, 「건륭전기(钱塘传奇)」의 건륭은 여기저기 찝쩍대지만 끝내 결실은 보지 못한다. 한마디로 쌤통이다.
1인 2역, 진방국(陈邦国)
<여사낭, 진방국, 진여낭> |
입만 열면 청나라를 뒤엎겠다는 뜬구름 잡는 소리를 밥 먹듯이 하는 허풍쟁이.
동네 애들이 모여 장난치듯 심심하면 오합지졸을 긁어모아 역모를 일으키는 진방국이고, 그래서 몇 번이고 멸문지화를 당해 남아날 친인척이 없어도 하등 이상한 것 없는 진방국이지만, (드라마 설정상) 황제의 친동생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건륭의 ‘관대한 정치’의 영향 때문인지 끈덕지게 살아남는다.
모용복(慕容復)의 씁쓸한 최후를 연상시키는 그의 결말은 매우 안쓰럽지만, 골백번은 죽어도 할 말이 없는 그로서는 그마저도 홍복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열넷째 황자, 윤제
<숙부 윤제에게 제자의 예를 올리는 홍력> |
강희제의 열넷째 황자이자, 건륭의 숙부가 되는 윤제는 훤칠한 이마, 송충이 같은 눈썹,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내려와도 될 정도로 탄탄대로인 콧등 등 외모가 얼핏 주윤발을 연상시키는 배우 탕진종(汤镇宗)이 맡아 열연했다. 참고로 바이두에 의하면 그는 중국 본토에 진출한 최초의 홍콩 배우라고 한다.
옹정제(넷째 황자 윤진)와 같은 어머니 배 속에서 태어난 친동생이기도 한 윤제(胤禵)는 여덟째 황자 윤사(胤禩)와 함께 틈만 나면 머리를 맞대고 역모를 일삼으면서 진방국과 함께 끊임없이 사달을 일으키는 요주의 인물들이다. 진방국이 단순 무식하게 외향적으로 사달을 일으키는 부류라면, 윤제와 윤사는 먹물깨나 먹은 사람답게 뒤에서 꿍꿍이를 꾸미는 음모가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효성헌황후(孝聖憲皇后) 유호록(鈕祜祿)씨
<황후 유호록씨와 옹정제> |
건륭의 친어머니인 황태후 역은 장린징(蒋林静)이 맡았는데, 흥미롭게도 그녀는 (「건륭전기」의 원작인) 「전당전기」로 연예계에 정식 입문했다고 한다. 물론 그때 그녀가 맡은 배역은 (또우반 드라마 정보에서 배역에 대한 설명이 없는 것으로 보아) 단역인 듯.
아무튼, 남편 옹정제가 살아 있을 땐 얌전한 규수처럼 행동하다가 남편이 죽자마자 후궁은 정치에 참여할 수 없다는 원칙을 개가 밥그릇 핥아먹듯 깔끔하게 무시한 채 시종일관 건륭의 황제 자리를 압박하고, 황후 부찰씨를 괴롭히는 표독한 여자로 변신한다. 효심이 남다른 건륭으로선 참으로 골치 아픈 엄마.
효현황후(孝賢皇后) 부찰씨(富察氏)
<그윽한 미소가 아름다운 황후 부찰씨> |
건륭이 일생에 걸쳐 가장 사랑한 여인이자 검소하고 현숙해 국모로서 손색이 없었던 황후 부찰씨(富察氏)는 배우 우차오(吴恙)가 맡아 열연했다.
사실 여자 등장인물 중 진방국의 누나이자 홍력과 바꿔치기 된 옹정제의 친딸 진어낭, 가문이 멸문지화 당한 복수를 감행하는 여사낭, 역적질하는 남편 진방국을 친정 재산까지 모두 털어 도와주는 백치 같은 현모양처 화요요 등 부찰씨보다 비중 있는 인물들이 두루 있지만, 그 미녀들을 외면하고 굳이 부찰씨 이야기를 꺼낸 것은 이유 없이 냉대하는 남편 건륭을 앞에 두고도 웃는 얼굴에 침 뱉느냐는 식으로 시종일관 미소로 화답하는 우차오의 그윽한 눈빛이 보기 좋기 때문이다.
마치면서...
<‘왕후장상의 씨가 어디 따로 있는가?’, 이기는 자가 황제!> |
천하의 모든 여자를 품을 수 있는 황제의 권위에 크게 먹칠하는 험난한 건륭의 로맨스와 황제 자리를 노리는 궁중의 암투가 주요 줄거리지만, 술에 취한 듯 흔들어 대기만 하는 액션 장면과 유치하고 엉성하기 짝이 없는 시나리오 때문에 추천하기는 어려운 드라마다. 다만, 안개처럼 가볍고 공기처럼 부담 없이 감상할 수 있는 드라마를 찾거나, 혹은 브라질과 미얀마의 축구 시합조차 손에 땀을 쥐며 흥미진진하게 감상할 수 있는 빼어난 근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럭저럭 볼만할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장면마다 단점이 까발려지고, 시청자의 교육 수준이나 IQ를 모욕하는 듯한 줄거리 때문에 열에 여덟은 중도에 하차할 것이 분명하고, 나처럼 리뷰를 쓰겠다는 오기로 버티는 사람만이 완주할 수 있을 듯하다.
참고로 「노구문(老九门, 2016)」 에서 야터우 역을 맡은 배우 위안빙옌(袁冰妍) 단역으로 출연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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