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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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멸종 연대기 | 이 모든 일이 나와는 상관없다지만

대멸종 연대기 | 피터 브래넌 | 이 모든 일이 나와는 상관없다지만

책 리뷰 | 대멸종 연대기(The Ends of the World)』 | 피터 브래넌(Peter Brann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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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번식, 진화, 그리고 대멸종

죽음과 얽힌 이야기는 귀를 솔깃하게 한다. 그것은 결코 우리가 죽음을 좋아해서도 아니고, 우리가 살아 있는 뭔가를 죽이는 것을 즐기는 것 때문도 아니다. 단지 타인의 죽음을 통해 언제가 닥칠 죽음을 한시적으로나마 유보하게 되었다는 안도감과 지금 내가 살아 있다는 현실 감각에서 얻어지는 도취감이 우리의 비루한 호기심을 부추기기 때문이다. 타인이 짊어진 불행과 고통을 자신의 현실과 저울질함으로써 현재 나의 행복과 기쁨이 차지하는 무게감을 확인하려는 비겁하고 잔인한 욕망의 발로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죽음은 지구 생태계에 의존하는 모든 생명체가 피해 갈 수 없으므로 타인의 죽음을 통해 내 죽음을 상기할 때마다 떠오르는 두려움과 불안감을 회피하는 데도 한계가 있다. 언제가 내가 죽게 된다는 두려움은 현실에 집착하거나 욕망에 충실함으로써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지만, (모든 생명체가 그러하듯) 자신의 복제품을 가능한 한 많이 생산하는 것이야말로 죽음과의 정면승부에서 우리가 의미 있게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이다. 즉, 자식을 가능한 한 많이 만드는 것이다.

내가 죽어도 나의 유전자뿐만 아니라 일생을 통해 벌어들인 재산과 명예의 일부를 (자기 유전자를 50% 물려받은) 복제품과 공유한다는 개념은 ‘영생’이라는 이룰 수 없는 꿈 일부분을 충족시켜준다. 영리한 유전자는 무럭무럭 성장한 반쪽짜리 복제품을 바라볼 때마다 만족감, 안도감, 뿌듯함 등을 느끼게 하는 (쾌락이라는 육체적 보상으로 번식을 유도하는 섹스 욕구와는 다른) 정신적 보상을 우리의 뇌에 배선해 놓음으로써 번식을 부추긴다. 개체는 죽을지언정 유전자 일부를 남김으로써 종은 영생을 향해 달려간다.

수억 년이라는 짧지 않은 지구 생명의 역사는 유성생식이야말로 탁월한 번식 전략이었음을 증명하고도 남는다. 통계를 낼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종이 유성생식을 통해 다양한 생태 환경과 변덕스러운 기후 변화에 적응했다. 지구에서 일어난 불꽃 축제처럼 화려한 생명의 역사를 보면 진화는 정말 만병통치약처럼 보인다. 진화는 폭발적인 생명 다양성을 위해 거침없이 달려왔다. 만약 볼 수만 있다면 진화의 얼굴엔 100M 세계신기록을 기록한 육상선수 얼굴에서나 볼 수 있는 의기양양함이 배어 있으리라.

하지만, 자세히 보면 진화의 온몸은 백전노장에서나 볼 수 있는 갖가지 크고 작은 상처로 도배되어 있다. 팔다리에는 잘랐다 붙인 것 같은 흔적이 역력하며, 목 언저리엔 한치나 더 깊숙이 들어갔어도 생명의 역사가 끝장났을 것 같은 깊게 팬 상처는 AMOLED 패널에 남은 잔상처럼 눈에서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지난 수억 년 생명의 역사는 꽃처럼 화사한 것만은 아니었다. 진화의 릴레이를 끝장낼 수 있었던 대멸종이 무려 다섯 차례나 있었으며, 일부 과학자들은 현재 인류는 여섯 번째 대멸종 시기를 살아가고 있다고 서슴없이 충고하기도 한다. 물론 그들이 여섯 번째 대멸종을 일으킨 주범으로 지목한 용의자는 알다시피 인류다.

책 리뷰 | 대멸종 연대기(The Ends of the World)』 | 피터 브래넌(Peter Brannen)
<외계인이 인류를 멸종시키면 6번째 대멸종은 중지될 것인가?>

‘시간’에 의한 박멸이 아닌 ‘사건’에 의한 박멸

결국, 지구 생명의 역사에서 영생을 얻게 될 행운의 종은 아무도 없으리라는 것이 성실한 과학자라면 해줄 수 있는 가장 명확한 답변이자 『대멸종 연대기(The Ends of the World)』(피터 브래넌, Peter Brannen)의 결론이기도 하다.

나처럼 공상 과학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아직 지구에서 생명이 살아갈 수 있는 좋은 환경이 유지되는 수천만 년 안에 인류가 다른 행성으로 이주할 수 있는 기술을 획득한다면 (인류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고기를 제공하는 소나 돼지 같은 가축 등을 포함한) 최소한 몇 종은 당분간은 멸종 목록에 등재되는 불행을 비껴갈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상상할 수는 있겠다. 하지만, 어렵게 옮겨간 행성도 지구처럼 언젠가 종말을 맞이할 테고 그런 식으로 우주의 모든 별이 하나둘씩 먼지로 회귀하면서 영원할 것 같았던 우주도 죽음을 준비할 것이다.

시작에 비하면 허무하고 무상한 것이 죽음인데, 대멸종은 그 죽음의 무더기라 할 수 있으니 한 사람의 죽음은 슬퍼할 줄 알면서도 수천수만 명의 죽음은 그저 통계 숫자 정도로 인식할 수밖에 없는 깜냥을 지닌 우리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사건이다.

그런데도 흥미롭다. 대멸종엔 보이지 않는 모든 곳에서 늘 일어나고 있는 죽음과는 다른 특별한 뭔가가 있다.

한두 생명의 죽음이 감정이 분비하는 슬픔과 연민이라는 효소로 소화되어 기억 속에서 산화된다면, 대멸종은 머리카락을 쭈뼛 서게 하는 섬뜩함 속에 생명의 진득함을 반박하는 시간의 힘과 그런 시간의 힘을 과시하는 우주의 오만함으로 가득 차 있다.

인류의 집요한 박멸 의지에도 오뚝이처럼 되살아나는 바퀴벌레나 잡초처럼 지구 생태계는 다섯 번의 대멸종을 이겨냈다. 설령 지금 여섯 번째 대멸종이 진행 중이라고 해도, 그럼으로써 페름기 말에 일어났던 대멸종처럼 거의 100%에 가까운 종이 멸종한다고 하더라도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지질학적으로 약간의 시간만 주어진다면 지구는 일곱 번째 대멸종의 제물이 될 생명으로 금세 가득 찰 것이다. 하지만, 생명이 이론적으로는 번식을 통해 무한히 종의 의지를 이어갈 수 있다 하더라도 물리 법칙의 지배 아래 있는 지구는 유한하다. 대멸종 같은 괴이한 이벤트가 일어나지 않더라도 지구에 사는 여러 종은 너나 할 것 없이 시간에 의해 박멸될 것이다. 물론 이런 일이 일어나면 바퀴벌레는 인류보다 더 오래 생존할 것이고, 잡초는 바퀴벌레보다 조금 더 오래 생존할 것이다(아마 최종 승자는 세균?).

대멸종은 그것을 읽는 사람에게 감당할 수 없는 시간의 무자비함과 양자역학처럼 이해할 수 없는 우연이 우리의 운명을 지배하고 있다는 인생무상의 공허한 진리로 압박을 가하지만, 한편으로는 괴팍한 사람이라면 품을 수 있는 맹목적인 호기심에서 비롯한 전율을 선물한다. 그 누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멸종을 연구하는 몇몇 과학자를 제외하고는) 대멸종 같은 것을 염두에 두겠는가? 그러하기에 이 대멸종을 향한 은밀하면서도 지식의 틀을 벗어나는 듯한 퇴폐적인 호기심은 원자 폭탄을 터트리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파괴적인 전율을 품고 있다.

『대멸종 연대기』는 과학으로 읽을 수도 있고, 그렇게 읽는 것을 추천하지만, 만약 그렇지 못하고 염세주의 농축액이 2% 첨가된 불순한 호기심으로 읽게 되면 이런 얼토당토않은 글을 쓰게 되지 않을까 싶다.

책 리뷰 | 대멸종 연대기(The Ends of the World)』 | 피터 브래넌(Peter Brannen)
<그날이 오면 「지구가 끝장 나는 날」처럼 멋진 이들이 "짜잔!" 하고 지구를 구할지도>

과학적 글쓰기와 문학적 글쓰기

마이클 벤턴의 『대멸종』은 명확한 이해를 추구하는 과학적인 서술에 초점이 맞춰진 과학도서라면, 피터 브래넌의 『대멸종 연대기』는 저널리스트가 쓴 글답게 기교 있는 텍스트가 인상적인 과학도서다.

과학적 서술 방식과 문학적 서술 방식의 장 • 단점은 분명하지만, 과학도서에 지나치게 문학적인 텍스트를 남발하는 것은 독자의 과학적 이해를 방해하는 한 요인이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브래넌의 글은 수사적 표현이 좀 지나친 감이 없지 않아 있다. 내가 볼 때 과학도서는 간결하고 명확한 텍스트로 과학 지식을 독자에게 이해시키는 것이 중요한데, 피터 브래넌의 유려한 문장은 보기는 좋지만, 때론 도를 넘어서는 비유가 과학적 이해를 방해할 때도 있다. 물론 나의 독서력이 떨어져서 그런 것이겠지만, 아무튼 조금 아쉬운 부분이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괜찮은 글쓰기라고 할 수 있다. (과찬해서 말하면) 독자에게 과학적 이해에서 얻을 수 있는 지적 쾌감과 글을 읽는 즐거움을 동시에 안겨준다는 점에선 과학적 글쓰기와 문학적 글쓰기 사이의 균형이 적절하게 잡힌 책이라고 할까나? 특히 <모나리자>의 미소 같은 알쏭달쏭, 뭉크의 <절규> 같은 공포,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같은 신비로 몇 곁이고 덧칠해져 형태를 알아보기 어려운 <대멸종>이라는 그림을 과학적 탐구와 문학적 통찰로 복원하는 것 같은 흥미진진함과 여섯 번째 대멸종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은 이 책을 많은 사람에게 추천하라고 선동질한다.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고 질문할 수 있는 최초의 종

끝으로 『대멸종 연대기』에 등장하는 다섯 번의 대멸종과 곧 있을 것으로 예상하는 여섯 번째 대멸종은 이미 지난 과거이거나 한참 후에나 결과를 알 수 있는 일이다. 싹수없게 말해 지금 사는 우리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다. (인류가 일으킨 것이 확실한) 기후 변화, 생태계 파괴, 환경 오염, 자원 고갈, 인구 폭발 등이 심각한 문제라고는 하지만, 그 심각성을 현재 삶의 궤적을 재정비할 정도로, 혹은 현재 누리는 문명의 안락함과 편안함을 스스로 포기할 정도로 (예를 들면, 지금 당장 자가용 사용을 포기하고, 가까운 거리 이동은 자전거를 활용하고, 가공식품을 멀리하고, 실내 온도를 정부 기준에 맞추는 등) 뼈저리게 느끼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에 따라 앞으로 어떤 사달이 발생하든 이 모든 것들은 길어야 100년을 사는 우리에겐 감당할 수 없는 매우 긴 시간 걸쳐 조금씩 조금씩 인류와 생태계를 압박해 올 것이다. 무책임하다고 힐난할지라도 과거에 벌어진 다섯 번의 대멸종이 그랬던 것처럼 여섯 번째 대멸종 역시 지금의 나와는 상관없는 일인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우리를 포함한 생명체는 언젠간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해서 지금 당장 눈앞에 닥친 죽음에 쉽게 굴복하지 않는다. 어떻게든 살려고 발버둥 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살아 있는 생명체의 의무이자 여태껏 지구에서 죽은 모든 생명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것이라는 점에 동의한다면, 지난 다섯 번의 대멸종은 지구에서 가장 높은 지능을 갖춘 종으로서의 인류가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데 필요한 절대적 지식이 함축되어 있다. 즉, 앞으로 일어날 수도 있는 여섯 번째 대멸종은 지난 다섯 번의 대멸종 때처럼 속절없이 당할 수만은 없다는 것이다. 지난 대멸종으로 사라진 그들이 단말마로 사라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면, 지금의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는 점에서 그들보다 훨씬 유리한 위치에 있다. (진화의 일부인) 일상적인 죽음이 아닌 생명 순환의 고리 자체를 영영 끊어버린 종들의 무더기 멸절 대멸종,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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