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루조당 파효 | 교고쿠 나쓰히코 | 당신은 어떤 책을 원하십니까?
책들의 무덤, ‘조당(弔堂)’
동치미 국물에 잠긴 국수처럼 정신이나 육체나 절반 이상 책에 담가진 사람이라면 꼭 가보라고 권해주고 싶은 곳이 있다. 바로 교고쿠 나쓰히코(京極夏彦)의 소설 『서루조당 파효(書樓弔堂:破曉)』 속에 등장하는 책방 ‘조당(弔堂)’이다.
‘서루(書樓)’라는 말뜻에서 언뜻 그 생김새를 엿볼 수 있는 조당은 누가 봐도 육지 위에 세워진 등대처럼 보인다. 바다 위에 세워진 등대는 항해하는 배가 길을 잃지 않도록 불을 비춰준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조당을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쉽게 책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이정표 같은 것이 아닐까 하고 추측하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조당 주인이 긴 장광설 끝에 내놓는 ‘당신은 어떤 책을 원하십니까?’라는 말에 비추어보면 완전히 틀린 추측은 아니지만, 읽히지 않는 책을 애도하고 읽어줄 사람의 곁으로 보내 성불시키는 것이 자신의 오래 묵은 인연이라고 말하는 조당 주인의 신념에 비추어보면 서루(書樓)에는 또 다른 의미나 깊은 사연이 숨겨져 있을 법하다.
그래서 형이하학적으로 보면 조당의 생김새는 영락없는 등대지만, 형이상학적으로 보면 조당의 역할은 육지 위에 세워진 거대한 추모비다. 그 거대한 추모비 안에 여타 서점과 다를 바 없이 정연하게 정리된 책들 하나하나는 무덤이다. 역시 무덤은 무덤인지라 사람의 뼈를 묻은 무덤처럼 음침한 그곳에서 조당 주인 료텐은 읽히지 않는 책들을 애도한다. 그래서 서점 이름도 ‘조당(弔堂)’인 것이다.
<책이 있으면 그렇게 외롭지도 않을 것 같다> (Pixabay로부터 입수된 mollyroselee님의 이미지) |
책을 성불시킨다는 것
조당 주인의 말에 따르면 읽히지 않는 책은 죽은 책이다. 그래서 그런 책 하나하나는 무덤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책 무덤이 사람 무덤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아무리 수많은 사람이 참배하더라도 무덤 속에 묻힌 뼈에 다시 새살이 돋아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설령 그런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은 축하할 일이 아니라 (공포영화를 통해 익히 보아왔듯) 재앙이자 참극이다.
하지만, 책 무덤은 다르다. 사람에게 읽히지 않을 땐 시체지만, 사람에게 읽히면 예수처럼 되살아난다. 되살아날 뿐만 아니라 그 책을 읽은 사람에게 그 사람이 경험하지 못한 또 다른 현실을 선물한다. 책에 쓰인 문자라는 부적을 읽고, 말이라는 주문을 왼다. 그럼으로써 책을 읽은 사람은 그 책을 읽은 사람만이 경험할 수 있는 또 다른 현세를 마음과 정신으로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책을 읽은 수만큼 세계가 생겨날 것이고, 그만큼 많은 현세를 체험함으로써 유복한 경험을 얻게 된다. 그래서 책을 읽는 사람이 있다고 조당 주인은 말한다(아마 나도 그런 바보 멍청이 중 한 명일 것이다).
그런 깊은 뜻으로 조당은 읽히지 않는 죽은 책들을 애도하는 공동묘지가 된 것이고, 전혀 서점일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그 기괴한 외관은 거대한 추모비가 된 것이다. 조당 주인은 책과 그에 어울리는 독자를 만나게 해주는 것을 공양으로 생각하며 오늘도 책을 성불시키고 있다. 절에서만 들을 수 있는 인사말 ‘성불하십시오’를 그는 사람이 아니라 묵묵히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책들에 정중하게 건네고 있는 셈이다.
일생의 단 한 권뿐인 책을 만날 때까지
그렇다면, 나는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책을 성불시켰을까? 이것은 비교적 간단하게 계산할 수 있다(대략 천 권을 약간 웃도는 수준?). 반면에 얼마나 많은 책이 여전히 죽어있는 것인지는 내 통계 능력으로는 도저히 감당해낼 수 없는 범위의 일이다.
책을 사랑하는 독자로서 셀 수 없이 수많은 책 시체가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 학살 현장처럼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쌓여있다고 해서 슬퍼할 필요는 없다. 사람은 단 한 번이라도 죽으면 만사가 끝장이지만, 책은 사람과 달리 오래 보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래 보존할 수 있으므로 언젠가 독자와 인연이 맺어지면 맺어질 때마다 부활할 수 있다. 한마디로 동면과 해동을 밥 먹듯이 해가며 오래 살 수 있다는 말이다. 물론 책 대부분은 깨어 있는 시간보다는 잠들어 있는 시간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이 함정이라면 함정이지만, 어쨌든 그들은 동면 속에서 자신들을 읽어줄 호기심 진득하고 영명한 독자와 우연히 만나는 꿈을 꿀 것이고, 세월이 허락하는 한 언젠가 한 번쯤은 그 소박한 꿈은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그러나 이러한 조촐한 기대에 찬물을 끼얹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책을 애도하는 조당 주인이다. 그는 책을 많이 읽고 적게 읽고는 차이가 없다고 말한다. 사람의 일생에 있어서 책은 단 한 권으로도 충분하다. 일생의 단 한 권뿐인 소중한 책은 현세의 일생을 사는 것과 비슷할 정도로 다른 삶을 준다. 그래서 단 한 권만으로도 충분한 것이다. 우리가 계속해서 책을 읽는 이유는 그 소중한 책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생에 있어서 단 한 권뿐인 소중하고 소중한 그 책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행복할 것이다.
이래서는 책의 꿈이 이루어질 확률은 더욱더 낮아질 수밖에 없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런 인생의 책을 만나는 사람보다 만나지 못하는 사람이 더 많다는 것이다. 나 역시 만나지 못했다. 그리고 무슨 기약 같은 것도 없다. 그저 닥치는 대로 읽고 또 읽을 뿐이다. 사실 조당 주인의 가르침을 받기 전까지는 그런 운명적인 만남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렇다고 잘못된 것은 하나도 없다. 일생의 단 한 권뿐인 운명 같은 책을 만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책을 읽는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하니까 말이다.
아무튼, 읽어볼 때까지는 알 수 없고, 읽지 않으면 만날 수도 없다. 고로 난 계속해서 책을 읽을 것이다. 반려자 같은 내 인생의 책을 만나게 될 때까지, 혹은 만나지 못하더라도. 그러하니 책들은 아직 좋은 주인을 만나지 못했다고 해서 너무 상심할 필요는 없다. 아무리 요즘 현대인들이 책을 안 읽는다고 하더라도 읽는 사람은 나처럼 꾸준히 읽기 마련이다. 돈맛을 알아버린 사람이 평생 돈에서 헤어 나올 수 없듯, 한번 책에 재미를 붙인 사람은 죽을 때까지 손에서 책을 놓을 수는 없는 법이다. 그리고 인연이란 때때로 그 어떤 역경과 난제도 허무하게 느껴질 정도로 냉수 들이켜듯 간단하게 극복해내는 기이하고 묘한 것이다. 그러니 책들은 너무 걱정하지 말고 때가 올 때까지 좋은 꿈이나 실컷, 그리고 달콤하게 꾸는 것이 상책이다.
<평생의 주인을 만나지 못하고 낙엽처럼 바스러져 간 책들> |
역사의 빈틈을 문학적 상상력으로 채우다
책을 가지고 이런 상상을 펼칠 수 있다니, 교고쿠 나쓰히코라는 작가는 정말로 책을 좋아하나 보다. 물론 지금까지 읽은 그의 소설에서 성스럽게 빛나는 박학다식함만 보더라도 그가 얼마나 많은 책과 지식을, 그리고 다양한 장르에 걸쳐 두루 섭렵했는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지만, 『서루조당 파효(書樓弔堂:破曉)』는 책을 사람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책의 입장에서 다뤘다는 점에서, 그리고 사물인 책에 아직 인류도 벗어나지 못한 죽음과 삶이라는 자연의 속박에서 해방되는 영광된 비전을 하사했다는 점에서 참신하다. 이로써 책은 한낱 사물에서 탈피하여 나름의 운명과 삶을 지닌 생명체로 거듭나게 된 거나 마찬가지다. 학식뿐만 아니라 책 자체에 달관한 사람만이 떠올릴 수 있는 기발한 생각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 책은 얼마 전에 읽은 『절대지식 일본고전(日本の古典名著·総解説)』의 진가를 드러내는 기회의 장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바로 메이지 시대 초기에 활약했던 시대적 인물들과 그들에게 영향을 주고받은 수많은 고전이 이제 막 물에서 건져낸 생선처럼 팔딱팔딱 활개를 치며 대거 등장하기 때문이다.
일부는 각각의 에피소드에 주연 격으로 등장하기도 하는데, 마지막 우키요에 화공 쓰키오카 요시토시(月岡芳年)(「첫 번째 탐서 • 임종」), 이즈미 쿄카(泉鏡花)(「두 번째 탐서 • 발심」), 일본 최초로 해군을 양성했고 신정부군과 바쿠후를 중재함으로써 에도를 전쟁에서 구한 가쓰 가이슈(勝海舟)(「세 번째 탐서 • 방편」, 검술의 달인 오카다 이조(岡田以蔵)와 교육자 나카하마 만지로(中濱万次郎)(「네 번째 탐서 • 속죄」), 일본 아동 문학의 선구자 이와야 사자나미(巖谷小波)(「다섯 번째 탐서 • 궐여」) 등이 그러하다. 이들은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소설의 배경이 되는 1892년 일본에 실제 생존했던 인물이다. 그리고 예외인 그 단 한 사람은 무사 오카다 이조다. 기록으로 그는 1865년에 참수당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조당에 나카하마 만지로와 함께 나타난 오카다 이조는 유령인가? 이 부조화는 작가의 상상력으로 해결된다.
과거에 실제로 일어났던 일련의 사건들 사이에 이빨처럼 빠진 부분이나 누군가의 게으름 때문에 미처 채워놓지 못한 미흡한 부분을 소설의 에피소드로 끌고 와서는 허구적 상상력으로 덧칠하고 땜질하여 진짜 일어났던 일처럼 그럴싸하게 장식해 놓는다. 그뿐만 아니라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사소한 부분까지 역사적 사실과 인과관계를 연결 지으려는 그 노력의 결실은 그 시대를 잘 아는 독자일수록 허를 찔리는 반전의 깊이도 남다를 것이다. 이런 구성이야말로 이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이지 않을까 싶다.
여전하지만 듣기 좋은 장광설
우연히든, 안내를 통해서든, 소문을 듣고서든 조당을 찾아온 그들은 원인이야 어찌 되었든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들이다. 격변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답게 번뇌에 사로잡힌 사람들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들의 고민이 아니라 그들이 그 고민을 어떻게 풀어나가느냐이다. 그리고 여기서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교고쿠 나쓰히코하면 빼놓을 수 없는 현학으로 철철 넘치는 장광설이다.
(교고쿠 나쓰히코의 백귀야행(百鬼夜行) 시리즈를 읽어본 독자라면 쉽게 예상할 수 있는) 조당 주인의 설교성 짙은 유려한 말발에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들 역시 압도당한다. 조당 주인의 예리한 장광설에 현혹된 그들은 조당 주인이 끝판에 권해주는 인생의 책을 감사한 마음으로 받으면서 에피소드 한 편을 마무리한다. 또한, 그들은 조당 주인과의 진중한 토론을 나눈 끝에 번뇌를 잠재울 뿐만 아니라 덤으로 영감까지 얻어 간다. 마치 그들이 역사에 길이 남을 공적을 남길 수 있게 된 그 뒷배경에 마치 조당 주인이 유령처럼 으스스하게 서려 있는 것 같다.
한편으론 말발 하나로 번뇌에 빠진 자를 구원하고, 슬럼프에서 빠진 자를 회복시켜 기사회생시키니 한 사람의 세 치 혀가 부릴 수 있는 재주의 극치를 보는 것 같다. 물론 이런 현학성 짙은 토론이 거듭되는 것에 일부 독자는 거부감을 느끼기도 할 것이다. 특히 『서루조당 파효』에서 추리라고는 조당 주인이 상대를 꿰뚫어 보는 어림짐작 정도가 전부이니 추리소설이라고 생각하고 읽으면 다소 실망스러울 수도 있다.
임종을 앞두고 선택할 책
조당 주인은 말한다. 서책에는 쓴 사람의 마음이 봉인되어 있고, 마찬가지로 읽은 사람의 시간도 봉인되어 있다고. 그 말이 사실이라면, 책장에 스며든 주인의 시간에 비례하여 책장은 물에 퉁퉁 불은 피부처럼 너덜너덜해진다는 말이다(이것이야말로 종이책만이 자아낼 수 있는 멋있는 운치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과연 난 나와 함께 늙어가는 책을 몇 권이나 가졌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아직 그런 책을 한 권도 얻지 못한 난 도대체 무엇 때문에 책을 읽고 있는 것일까? 갑자기 모든 책읽기가 공허해진다.
임종 전에 읽을 인생의 마지막 책을 찾으러 왔다는 (마지막 우키요에 화공) 쓰키오카 요시토시의 사연은 처연하면서도 한편으론 엄숙하다. 병 때문에 이미 두 눈을 잃은 사람이 죽기 전에 책을 읽겠다고 하니 당연히 처연한 생각이 들지만, 인생의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독서에 쏟아붓겠다고 선택한 그 결의만큼은 엄숙하다 못해 경건하기까지 하다. 나 역시 책을 좋아하는 한 사람이지만, 임종을 앞둔, 그래서 일분일초 매 순간이 절박한 그 찰나의 흐름 속에서 지금처럼 선뜻 독서를 선택할 수 있을까? 만약 임종을 앞둔 순간에 어떤 책을 원한다고 묻는다면 무어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다.
조당, 그곳은 어지간한 것은 다 있다는 책방, 시체로 동면한 책들이 자신들을 입양해 갈 주인들을 기다리며 말없이 묻혀 있는 곳. 정말 그런 곳이 있다면 난 묘지기가 되어도 좋으니 그런 곳에서 살고 싶다. 먹여주고 재워준다면 월급도 필요 없다. 자신의 가치를 알아줄 주인을 기다리는 책을 말동무 삼아 나의 가치를 흔적도 없이 제거해 줄 임종을 기다리겠다. 죽음에서 생명을 기다리는 책의 조바심과 생명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나의 초조함은 기다림이라는 너른 감정이 잉태한 형제라는 점에서 조당에 잠들어 있는 책이야말로 나와 가장 잘 통할 수 있는 친구다. 그런 음침한 곳에서 살다가 그런 음침한 곳에서 죽고 싶다. 난 그토록 음침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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