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의 생각에 관한 생각 | 프란스 드 발 | 우리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들
당신은 동물들이 얼마나 똑똑한지 알 만큼 충분히 똑똑합니까?
『동물의 생각에 관한 생각』이라니, 동물을 단순한 ‘자극 – 반응’ 기계로 보거나 본능에만 의존하는 로봇으로 보는 사람들의 신경을 꽤 거슬리게 하는 제목이다. 누군가는 “사람도 아닌 동물이 생각할 수 있다니, 그런 터무니없는 이야기가 어디 있나요? 안 그런가요?”라고 되묻는다. 그러한 되물음에는 동물에 대한 근거 없는 멸시에서 비롯한 혐오감을 품고 있다.
원제목은 더욱더 가관이다. 『Are We Smart Enough to Know How Smart Animals Are?』, 한국어로 번역하면 ‘우리는 동물들이 얼마나 똑똑한지 알 만큼 충분히 똑똑할까?’이다. (이 책이 던지는 핵심 질문이기도 한) 이 질문에 당신은 무엇이라고 대답할 것인가? 당신이 인간 중심주의자이건, 동물혐오자이건, 아니면 동물애호가이건 딱히 뾰족한 대답이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이렇게 투덜대며 질문 자체를 부정하려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다.
동물이 똑똑하다면 얼마나 똑똑하다고….
사실 ‘똑똑하다’라는 기준 자체가 명확하지 않다. 시험 감독관에게 들키지 않고 커닝해서 1등 한 사람과 커닝을 못 해 고만고만한 성적을 받은 사람 중 누가 더 똑똑한 사람일까? 시험 성적이 좋으면 똑똑한 것인가? 돈을 잘 벌면 똑똑한 것인가? 지위와 명성이 높으면 똑똑한 것인가? 특정한 기준으로 걸러냈을 때 상위 1% 정도 될까 말까 하는 소수에게만 ‘똑똑하다’라는 명예를 준다면 (나를 포함하고, 이 글을 읽는 당신도 포함될 가능성이 매우 농후한) 나머지 99%는 똑똑하지 않다는 말이 된다. 혹은 누구든지 노력하면 1% 안에 들 수 있다는 희망 고문에 속아 평생을 노예처럼 일만 하다 죽어간다는 의미에서 나머지 99%는 멍청하다고도 볼 수 있다.
<우린 저 눈빛의 의미를 알아낼 수 있을까?> |
그들은 필요한 만큼 충분히 똑똑하다
우리가 누군가를 두고 (좋은 의미로든 야유의 의미로든) 똑똑하다느니, 멍청하다느니 라고 시부렁대는 기준 자체가 인류의 대표적인 편견 • 편협 제조기인 인간 중심적이고 물질주의적이고 출세 지향적인 사고방식의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이 기준을 동물에게까지 적용하는 것이야말로 매우 똑똑하지 못한 처사다. 자기 종을 기준으로 다른 종의 능력을 평가하려는 시도 자체가 매우 멍청한 일이다(이런 식이라면 지구를 방문할 정도의 기술력을 지닌 외계 지적생명체가 볼 때 인류는 야만인이나 다름없다!).
각각의 종이 살아온 자연사와 생태 환경이 다르고, 그에 따라 각각의 종마다 처한 생태적 지위와 진화사가 다르다는 점을 고려하면, ‘똑똑하다’라는 칭찬은 단순히 지능이 높은 종에게 수여하기보다는 긴 시간 동안 번식을 이어온 종이 누려야 하는 영광이다. 그렇다면 이 지구에서 수백만 년, 아니 수천만 년 이상이라는 영겁의 세월을 굳건히 버텨온 종들에게 용기 있게 똑똑하다고는 말하지 못할망정 감히 멍청하다고는 말하지 못할 것이다.
(사람의 기준으로 볼 땐) 현재 지구에서 서식하는 종 중에서는 사람이 가장 영리하게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다(어쩌면 우리가 이룬 과학 기술만을 보면 진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류가 멸망하고 나서도 한참 시간이 지난 먼 훗날, 지구를 방문한 외계 지적생명체가 태양계에서 가장 괄목할만한 문명을 이룩한 종이 어쩌다 화석화된 뼈만 남아있는지 그 이유를 골몰히 생각할 때, 그들은 최소한 우리가 똑똑한 종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이것은 우리가 이스터섬(남태평양에 있는 섬)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나무를 벤, 그럼으로써 이후 역사가들에게 이스터섬을 문명 붕괴 사례의 교과서 격으로 자리매김하게끔 만든 그 불운한 사람을 똑똑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이유와 같다.
갑작스러운 운석의 습격으로 재수 없게 멸종한 공룡은 무려 1억 년 이상 번영을 누렸다. 우리와 가장 가까운 친척인 침팬지만 해도 700~800만 년 동안이나 생존해왔다. 사람을 바보 취급할 때 쓰는 종종 언급되는 ‘원숭이’의 역사는 그보다 더 긴 수천만 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리고 공룡의 직계 후손이자 멍청이의 직격탄인 ‘새대가리’라는 불명예를 안고 사는 조류는 공룡이 살았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이들은 생태 환경에 적응하고 그 변화에도 대응할 수 있을 만큼, 그러면서 자신들의 진화사를 꾸준히 유지해 올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똑똑하다. 개의 뇌가 우리보다 작은 것은 그 정도의 뇌가 처리할 수 있는 연산 능력만으로도 자연 선택의 압력을 버텨낼 만큼 충분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지능이 유달리 강조되는 것은 인류가 특별한 종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고, 신의 선택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단지 우연히 그렇게 되었을 뿐이다.
어찌 되었든 그 잘난 지능, 혹은 필요 이상으로 뛰어난 지능 때문에 자멸할 위기에 처해있는 인류가 지구에서 수백 수천만 년 이상을 조용히 지낸 여타 동물들을 의지도 없고 목적도 없고 동기도 없이 오로지 자극과 반응, 그리고 본능에만 의존하는, 그래서 마음도 없고 지능도 거의 없다시피 한 동물이라고 깎아내리고 싶다면 굳이 말리지는 않겠다. 다만, 이것은 하루살이가 시간이 너무 안 간다고 투덜대며 하품하는 일만큼이나 가소로운 일이다. 내가 볼 땐 그런 말은 앞으로 최소한 백만 년 이상은 더 버티고 나서 해도 늦지는 않다. 하지만, 백만 년 후 지구에 현재 인류가 그대로 남아있을지는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우리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들이 진짜 특별한 것일까?
왜 우리는 우리에겐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들을,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우리를 특별한 존재로 생각하게끔 착각하게 하는 것들을 (예를 들어 인지, 지능, 의식, 생각, 마음, 감정, 의지, 목적, 동기, 장래 계획, 협력 등등) 동물에게 적용하는 것에 불편함을 느끼는 걸까? 한 사람이 자신을 특별하게 여기듯 우리가 우리를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우리에게 특별한 만큼 동물들도 그 자신들을 특별하게 생각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는 없을 것일까? 그리고 진화의 연속성을 인정한다면, 그동안 우리를 특별난 존재로 오해하게 만들었던 모든 능력을 다른 동물들에서도 찾아낼 수 있다는 과학적 믿음이 그토록 허무맹랑한 소리가 아니라는 것도 인정할 때가 된 것은 아닐까? 만약 진화론이 옳은 이론이라면, 우리가 가진 모든 능력에 상응하는 능력들을 여러 종에게 걸쳐 고루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속속 밝혀지는 발견들은 진화론을 옳은 이론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있다. 설령 진화론을 인정하지 않더라도 은근히 잔혹한 자연사에서 오로지 ‘자극 – 반응’, 그리고 본능에만 의존해서 그 긴 세월을 영속해왔다는 말은 믿을 수가 없다.
일례로 침팬지는 사육사의 시선보다 동료들의 시선을 더 관심 있게 지켜보고, 우리가 그러한 것처럼 다른 종보다 자신들을 더욱 특별하게 여긴다. 앵무새 앨릭스는 수학 재능과 대상 범주화 능력 등을 선보임으로써 조류에게도 인지 능력과 그것을 마음속에서 결합하는 지능이 있음을 증명했다. 고래는 자신이 아는 것을 알기 위해 자신의 기억을 점검하는 메타인지 능력을 갖춘 것이 증명됨으로써 동물 지능 연구의 한 획을 그었다. 카드 한 벌을 다 외우는 능력으로 유명한 영국의 암기력 챔피언과 경쟁하여 당당히 승리한 침팬지 아유무는 지능에서만큼은 최고임을 자부해온 인류의 자부심에 일침을 가했다(아유무의 비상한 사진 기억 능력은 니시노소노 모에의 뛰어난 기억력이 문자 기억이 아니라 스크린샷 같은 사진 기억 능력을 기반으로 한다는 설정을 떠올리게 한다). 또한, 열 살짜리 코끼리가 자기를 기르던 사람이 호수에 빠져 죽어가면서 내지른 소리를 1km 밖에서 듣고 달려와 구해준 이야기는 동물의 지능과 감정에 연관시키지 않고는 도저히 설명할 길이 없다. 이러한 관찰과 실험 결과를 보고도 여전히 동물은 ‘자극 – 반응’ 기계라는 등등의 나부랭이 말을, 그것도 과학적 근거보다는 이념적이고 감정적인 근거에 믿음을 둔 되지도 않는 이야기를 지껄이고 있다는 사람의 뇌는 광우병 걸린 불행한 소의 뇌처럼 푸석푸석할 것이라 확신한다.
이외에도 프란스 드 발(Frans de Waal)의 『동물의 생각에 관한 생각』을 읽어보면 지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믿기지 않는 놀라운 일들이 동물인지를 삐딱하게 바라보는 독자의 시선을 혁파하기 위해 야심 차게 준비되어 있다. 한편으론 이 책은 진화인지가 아집과도 같은 인간 중심주의적인 편견과의 경쟁에서 이겨내고 동물 행동 연구의 최전선으로 나아가는 짧지 않은 역사를 기록한 과학사이자, 그 변화의 물결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것 이상의 열정으로 진화인지 분야가 어엿한 과학으로 성장하는데 한몫 단단히 담담한 저자가 겪었던 여행이기도 하다. 이 책에는 진화인지 분야가 비과학적인 방법론을 허용한다는 조롱에서 벗어나 엄밀한 관찰과 통제된 실험이라는 과학적인 궤도에 들어설 수 있도록 이끈 많은 과학자의 노력과 그 과학자들에게 기꺼이 자신들의 재능을 보여준 많은 동물의 헌신과도 같은 협력이 감동적으로 깃들여 있다.
동물을 사랑하든, 사랑하지 않든, 그리고 진화론을 믿든 믿지 않든, 『동물의 생각에 관한 생각』이 과학적으로 증명하려는 동물의 생각에 대한 인류의 생각은 지적인 구미를 당긴다는 의미에서 놓칠 수 없는 지식의 만찬이다. 어쩌면 바로 이점, 즉 순전히 호기심 때문에 적응도(번식 능력)와 관련 없는 지식에도 관심과 열정을 쏟아부을 수 있는 지적인 순수함이야말로 우리의 유별난 지능이 낳은 특별한 능력이지 않을까 싶다.
<아유무(출처: BBC)> |
이제 막 첫걸음을 뗀 진화인지
‘진화인지’라는 단어를 나처럼 처음 듣는 독자도 있겠지만, 따지고 보면 진화인지가 뭐 별거 있는 것도 아니다. 지금까지 많은 과학자가 인정하기를 꺼렸던 그것을 진화인지는 연구의 시발점으로 삼고 있을 뿐이다. 그것이란 다음 아닌 지금까지 등장한 동물행동학, 비교심리학 등등의 동물을 연구하는 분야가 명확하게 거부했던 것, 즉 그들도 우리처럼 ‘생각’이란 것을 할 수 있다는 전제를 진화인지는 중심 테제로 삼고 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그들은 동물이다.
우리가 암만 부정해도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 것처럼 동물은 우리의 이념이나 의견 따위가 어떠하든 개의치 않고 그들 나름의 생각을 품고 세상을 살아왔고, 지금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은 그들이 생각할 수 있다고 해서 그 생각, 그리고 그 생각이 작동하는 방식이 우리의 것과 반드시 같다고는 할 수 없다. 문어가 여러 발에 달린 신경계를 마치 클라우드 컴퓨터처럼 활용해 복합적인 지능을 구현하듯 인지, 생각, 지능, 마음, 감정 등에도 수렴진화는 충분히 적용될 수 있다. 내가 볼 땐 각각의 동물에 인지, 지능, 생각, 마음, 감정 등이 진화하도록 작용한 선택압에 얽힌 비밀을 밝혀내는 것도 진화인지 분야가 해결해야 할 과제 중 하나이다.
진화인지는 동물도 우리처럼 정보를 활용하고 조작하여 상황에 맞는 행동을 도출하고, 때론 미래도 계획하고 실행으로 옮긴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재밌는 사실은 인류가 새로운 뭔가를 인정하기까지는 (과학적 근거에 의해서든, 아니면 감정적이거나 이념적인 근거에 의해서든) 꽤 많은 난관에 부딪히기 마련이고, 그 때문에 새로운 이론이나 가설이 세상에 빛을 발하기까지는 몇 세대를 건너뛰는 긴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인류가 마음을 다잡고 뭔가를 인정하고 나면 그 이후부터 인류는 새로운 것에 봇물 터지듯 관심을 집중하고 그에 따라 연구도 활발하게 진행되곤 한다. 마치 댐이라도 터진 것처럼 말이다. 『동물의 생각에 관한 생각』도 그런 점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인류는 이제야 동물을 편견 없는 시선으로 바라보며 그들도 우리와 같은 존재적 가치와 능력을 지녔음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나는 인류가 가장 똑똑하다고 고집할 만큼 멍청하지는 않지만, 나는 인류가 동물들이 얼마나 똑똑한지 인정할 만큼은 충분히 똑똑하다고 생각할 만큼은 똑똑하다. 우리가 타인의 생각을 완벽히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동물의 생각을 끝내 읽어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식으로 뭔가에 도전할 수 있는 용기와 무모함을 적절히 겸비한 그 위대한 정신이야말로 인류의 전매특허는 아닐까? 진화인지 연구가 동물의 생각을 완벽히 이해할 수는 없더라도, 인류와 동물 사이의 소원해진 관계를 회복시키는 데 크게 이바지할 것이라는 사실 정도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반려동물과의 교감이 정서에 미치는 훈훈한 영향력을 인정한다면, 많은 동물이 우리의 새로운 이웃으로 자리매김하는 새로운 시대를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다.
음식 재료 다양성의 기원은 굶주림?
끝으로 『동물의 생각에 관한 생각』에 등장하는 흥미로운 관찰과 실험 중 특히 기억에 남는 실험 한 가지를 언급하고 싶다. 야생 원숭이의 동조성에 관한 실험에서 버빗원숭이들은 처음에는 파란 옥수수와 분홍 옥수수(파란 옥수수는 맛있고, 첨가물을 넣은 분홍 옥수수는 맛없다) 중에서 파란색 옥수수를 선호하기 시작했고, 이것은 학습되어 세대와 지역을 걸쳐 전파되었다. 그런데 분홍색 옥수수에 넣은 첨가물을 제거해도 (이제 파란색 옥수수와 분홍색 옥수수는 맛에서는 차이가 없다) 버빗원숭이들을 계속 파란색만 고집했다. 새로 태어난 새끼 27마리 중 26마리는 자기 집단이 선호하는 색깔의 옥수수만 먹도록 배웠다. 그렇다면 누가 맛없다고 소문난 (한때는 진짜 맛이 없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은) 분홍색 옥수수를 먹었을까?
(마치 거지가 쓰레기통을 뒤지듯) 무리 중 서열이 아주 낮은 탓에 배가 너무 고픈 원숭이가 분홍색 옥수수를 먹었고, 이런 어미에게서 태어난 새끼 역시 어미의 섭식 습성을 그대로 따라 했다. 이 실험은 인류의 음식문화가 포용하고 있는 다양한 음식 재료의 기원을 유추할 수 있는 의미심장한 실험이라고 생각한다.
즉, 우리가 상식적으로 떠올리기 어려운 재료들을 가지고 음식을 해 먹는 사람들의 조상은 사회적 지위가 매우 낮아 밥 먹듯 굶주리는 사람일 확률이 높다는 말이고, 이 말은 중국처럼 기상천외한 요리들이 많은 민족의 조상들은 그만큼 굶주린 사람들이 많았다는 뜻이다. 만약 농업 혁명 이후 사람들이 음식을 고루 분배한 덕분에 다른 식자재를 찾아야 할 만큼 굶주리는 사람이 나오지 않았다면, 어쩌면 우리는 쌀밥과 몇 가지 반찬만으로 하루 세끼를 때우고 있었을 것이고, 이러한 조촐한 식단으로도 충분히 만족했을 것이다. 다양한 재료를 활용한 음식의 다양성, 놀랍게도 그 기원은 굶주림이었다! 물론 이것은 순전히 내 억측이지만, 꽤 그럴듯하게 들리지 않는가?
진화론에 매혹되면 매혹될수록 사람과 동물의 정신적 차이는 종류의 차이라기보다는 정도의 차이라는 찰스 다윈의 유명한 발언을 되새길 수밖에 없다. 사람과 동물의 정신적 차이는 종류의 차이라기보다는 정도의 차이라는 말, 지금으로서는 다른 말을 떠올릴 수가 없다.
동물의 감정에 관한 생각 | 프란스 드 발 | 감정, 협력과 이타주의 진화의 견인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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