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가축, 그러나 개는 늑대다 | 레이먼드 피에로티, 브랜디 R. 포그
개와 늑대에 관한 선입관을 혁파시키는 책
사람은 누구나 (경험에 의해서든, 지식에 의해서든, 교육에 의해서든) 선입관이 적당히 버무려진 가치관으로 사물을 바라보고 세상을 이해한다. 선입관은 공정하지 못한 판단을 내리거나 새로운 도전의 기회를 저버리는 원인 중 하나로 작용할 때도 있지만, 한편으로 선입관은 사물, 사건, 행위를 인지할 때마다 요구되는 정보를 수집하고 처리하는 프로세스 과정을 간략화하거나 생략함으로써 빠르고 효율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틀이 되기도 한다.
수렵채집인의 삶뿐만 아니라 현대인의 삶도 상당 부분이 반복적인 행위의 연속일 뿐만 아니라 매일 같이 비슷비슷한 사물, 비슷비슷한 사람들, 비슷비슷한 사건들과 반복적으로 마주친다는 점을 고려하면 선입관은 인지 프로세스 과정에 소모되는 뇌의 에너지, 시간 등이 낭비되는 것을 방지해 준다는 점에서, 그리고 (앞에서도 말했듯) 별도의 복잡한 사고 과정 없이 빠른 판단을 내리는 데 도움을 주는 일정한 사고 틀(CPU의 MMX, SSE 같은 명령어 세트?)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진화심리학적으로 선택의 이점이 있다. 또한, 선입관은 집단의 가치관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사회적 결속력을 유지하고 강화하는데도 도움이 되고, 새로운 선택으로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이나 손해도 줄여준다. 다수의 기호나 선택을 따르는 것이 무난한 사회생활의 출발점임을, 그리고 무엇을 먹을지를 선택하는 작은 일부터 직업을 선택하는 중요한 일까지 선입관은 끊임없이 우리 선택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편견이나 선입관을 지니고 있다는 것 자체가 큰 결점일 수는 없다. 그 사회 속에서 통용되는 선입관은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경험이 축적된 결과인 경우가 많으므로 대체로 유용하다. ‘맛집’이 평균 이상의 맛을 보장해주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자신이 지닌 선입관이 옳지 않거나, 혹은 더욱더 나은 기회로 이어지는 선택을 가로막는 장벽으로 작용하는 것을 입증하는 새로운 지식을 접했음에도 기존의 생각을 고집하는 것은 우물 안 개구리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익을 가져올 새로운 기회를 저버린다는 점에서 불행한 일이다. 그 사람의 뇌에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일 여유가 없어서 그런 것이라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기존의 선입관이 종교 같은 믿음으로 굳혀져 버린 상황이라면 돌이키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위험할 수도 있다. 인류가 자행한 홀로코스트 같은 인종 청소의 배경에는 믿음으로 굳어진 편견이나 선입관이 음흉하게 사람들을 조종하고 있었음을 잊지 말자. 믿음으로 굳어진 선입관은 뇌가 썩어 흙이 될 때까지 유지된다.
오늘 소개하는 책이 편견이나 선입관을 혁파하는 지적 충격과 함께 앎의 기회가 불러일으키는 지적 청량감을 선사하는 책이라고 설명한다는 것이 역시나 삼천포로 빠지고 말았다. 그것도 아주 장황하게 말이다.
영어 제목은 『The First Domestication: How Wolves and Humans Coevolved by Raymond Pierotti, Brandy R. Fogg』, 한국어 제목은 『최초의 가축, 그러나 개는 늑대다(레이먼드 피에로티, 브랜디 R. 포그)』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이 책은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 같은 경우는) 크게 세 가지의 선입관을 혁파한다. 첫째, 개는 늑대가 아니다. 둘째, 늑대는 사람이 버린 음식쓰레기를 주워 먹는 것을 시작으로, 그리고 사람의 주도로 현재의 개로 진화했다. 셋째, 늑대는 괴물이다.
<인류에게 배신당한 격인 늑대> |
호모 사피엔스는 늑대의 도움으로 지구를 장악했다?
일단, 두 번째부터 이야기해보자.
지금까지 난 늑대와 사람이 엮이게 된 최초의 연결고리를 사람이 먹다 버린 음식이라는데 일호의 의심도 없었다. 하지만, 『최초의 가축, 그러나 개는 늑대다』는 그것은 수많은 유럽 편견(Euro-bias)의 예시 중 하나일 뿐이라고 설명한다. 여기서 저자들이 설명하는 유럽-편견이란 유럽인과 유럽-미국인의 경험만이 종 사이의 생태적 • 사회적 관계를 평가할 때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다. 이런 유럽-편견에는 비인간 사회와 인간 사회 모두에서 협력보다 경쟁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도 포함된다. ‘적자생존’을 뒷받침하는 이런 편견은 제국주의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의 한 축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람이 아닌 종들 사이에서 보이는 행동의 85~95%는 공격적이거나 경쟁적이지 않으며 친화적이거나 협력적이다. 이 사실을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사람과 늑대 사이의 첫 만남도 상호 호혜를 바탕으로 한 협력적인 관계로 시작했을 것으로 추리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 책이 자신만만하게 주장하는 가설은 상당히 진보해 보이는 앞의 추리(사람과 늑대 사이의 첫 만남은 협력적인 관계로 시작했을 것이라는 추리)조차 매우 고루해 보일 정도로 충격적이고 혁신적이다.
이 책은 늑대와 사람의 첫 만남을 늑대가 주도했을 뿐만 아니라, 이 만남으로 사람은 늑대의 사냥 기술뿐만 아니라 사회 체계와 심지어 윤리 체계까지 늑대로부터 물려받았다고 주장한다. 늑대가 사람을 동반자로 받아들인 덕분에 호모 사피엔스는 네안데르탈인, 데니소바인, 호모 에렉투스를 밀어냈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는 기존의 유럽 편견을 가진 학자들이 시종일관 무시해 온 민족지학 자료이다. 민족지학 자료란 쉽게 말해 아메리카 인디언 같은 원주민 부족민의 역사와 문화를 가리킨다. (지금은 어떨지 몰라도) 늑대와 원주민들이 처음 마주쳤을 때, 둘 다 최상위 포식자인 그들은 서로 경쟁하기보다는 서로의 삶을 공유했을 때 더 오래 살고 더 안전하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늑대는 기후변화 때문에 아프리카를 떠나 새롭고 낯선 지역에 도착한 호모 사피엔스에게 추위를 피하는 법과 사냥하는 법을 가르쳤다. 한마디로 늑대 덕분에 배부르고 등 따스하게 지낼 수 있었다는 말인데, 이 이상 뭐가 더 필요하겠는가!
호주, 시베리아, 아메리카 등 많은 원주민의 삶에서 늑대는 동료 • 형제로서, 때론 스승 • 창조자로서 존경받고 추앙받는 존재로 시종일관 묘사된다. 이뿐만 아니라 북유럽 신화와 일 본 신화에선 늑대는 신에 가까운 존재다. 로마 신화에서 늑대는 로마 건국에 일조한 중심인물이다. 사람이 먹다 버린 쓰레기더미를 뒤지던 부랑자 같은 늑대를 신격화하는 일이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 하물며 ‘가축화’에 대한 개념도 없고, 그것이 가져올 이득도 모르는 선사시대 인류가 늑대 새끼를 훔쳐 가축화했다는 주장은 (늑대가 인류의 최초의 가축이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을 다른 인종의 문화와 역사를 귀담아들을 수 있는 지적 포용력과 다른 인종의 문화와 역사를 인정할 수 있는 상상력이 부족했던 서구 학자들은 의도적이라기보다는 무의식적으로 외면한 셈이다. 원주민 부족들은 늑대와의 역학관계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유일한 사람들이라는 점, 그리고 늑대와 사람과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시기(최소 3만~4만 년 전)에 음식쓰레기가 발생할 정도로 호모 사피엔스의 식생활이 풍족했을까 하는 점을 고려하면 늑대와 사람의 첫 만남이 이루어진 무대를 성의 없게도 쓰레기장으로 기술한 기존의 연출력은 너무나 인간 중심적이고 빈곤한 상상력이 나은 선입관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내가 볼 땐 원주민 부족민의 역사와 문화가 이 책이 내세우는 혁신적인 가설을 착상해 낼 수 있게 한 가장 큰 영감으로 작용한 것이 아닌가 싶다. 민족지학 외에도 이 책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또 다른 중요 근거는 생태학과 진화론이다.
한편으론, 현재 늑대 모피가 많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수입으로 이용되고 있다는 사실이 늑대와 사람과의 우호적이었던 전통적인 관계가 서구 문명의 영향으로 깨졌다는 현실을 시사하는 것 같아 애석할 따름이다.
‘모든 개는 늑대다. 하지만 모든 늑대가 개는 아니다’
이 간단한 개념은 오래도록 학자들 사이에서 혼란과 분쟁을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일반인과 동물 관련 법을 재정하고 집행하는 의원과 공무원, 그리고 소위 동물전문가라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명확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지금도 모든 개가 늑대라는, 즉 개와 늑대가 같은 종이라는 말을 이해하는 사람보다는 의아해하는 사람이 더 많을 것 같다. 한 번 더 말하자면, 개는 늑대의 아종도, 변종도 아니고 그냥 늑대다.
‘모든 개는 늑대다’라는 명제는 비교적 단순하고 명확하지만, 여기에 ‘하지만, 모든 늑대는 개가 아니다’라는 명제가 덧붙여지면 확실히 혼란스럽기는 하다. 이런 혼란은 ‘야생(wild)’과 ‘가축화된(domesticated)’이라는 개념의 모호성에서 기인한다. 연속선상에 있는 이 두 개념은 그 경계가 명확했던 적이 없었고, 둘 다 형태와 핵심적인 의미 면에서 그대로 유지되면서 1000년 동안 존재해왔지만, 이 개념들을 둘러싼 언어는 변했다. 그래서 미국의 사학자 해리엇 리보(Harriet Ritvo)의 설명처럼 이해가 불가능할 정도는 아니지만 쉽지는 않은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가축화를 명확한 상태나 종착점으로 보는 관점 역시 혼란과 오해를 부추기는 요인이다. 『최초의 가축, 그러나 개는 늑대다』는 가축화를 결과물이 아닌 일종의 진화적 과정으로 본다. 이것을 받아들 수 있을 때, 앞선 두 개의 명제가 일으킨 혼란은 가라앉는다.
개와 늑대를 둘러싼 혼란은 개의 기원에서부터 시작된다. 아프리카에는 늑대가 살았던 적이 없었다는 점에서 사람과 늑대와의 첫 만남은 호모 사피엔스가 아프리카를 떠난 이후에 이루어졌다는 것은 확실하다. 현생인류가 아프리카 밖으로 이주하기 시작한 시기는 5만 년 전후로 보고 있지만, 최근 발견은 이 이주 시기를 22만 년 전으로까지 앞당기고 있다. 이 때문에 사람과 늑대와의 첫 만남이 이루어진 시기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하지만, 개가 단 하나의 기원이 아니라 여러 개의 기원, 즉 다계통발생적(polyphyletic)이라는 정황은 유전자 분석에서, 그리고 민족지학 자료에서 드러난다. 종이 되기 위해서는 혈통이 단 하나의 기원을 가져야 하므로, 개는 하나의 종도 아니고 아종도 아니다. 개는 늑대다.
늑대와 개를 하나의 종으로 봐야 하는가, 아니면 별도의 종으로 봐야 하는가 하는 혼란은 늑대 보호법이나 광견병 접종 같은 법이나 동물 • 보건 관련 체제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점에서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늑대 보호법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늑대와 개가 같은 종이라면, 사람만큼이나 많은 ‘늑대’를 굳이 보호해야 할 필요가 있냐고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갯과 동물을 포함해 같은 종에 속한 모든 동물에 효과가 있는 광견병 백신을 늑대에게 접종하는 것에 대한 수의사들의 의심 역시 늑대와 개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에서 비롯된다.
비록 『최초의 가축, 그러나 개는 늑대다』라는 책을 읽었고, ‘모든 개는 늑대다. 하지만 모든 늑대가 개는 아니다’라는 개념이 저자들의 주장처럼 간단하다고는 해도, 소위 동물전문가라고 자칭하는 사람들도 늑대와 개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인 요즘에 나 역시 뭔가가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늑대와 개가 같은 종이라는 사실은 생물학적으로, 진화론적으로, 생태학적으로는 쉽게 이해할 수 있지만, 모든 개가 늑대라는 사실은 감성적으로, 정서적으로 다소 거부감이 느껴진다. 개와 늑대와 관련된 법, 행정, 문화에서 발생하는 정체성의 혼란은 아마도 이런 정서적인 문제에서 기인하는 경우가 가장 클 것 같다. 이제 세 번째 선입관으로 넘어가자.
<늑대의 외형을 물려받은 개도 있지만, 전혀 다른 개도 있다> |
늑대는 괴물이다?
소설이건 영화이건 게임이건 늑대는 괴물의 대명사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 신화와 원주민들의 역사 속에서 동료이자 스승으로 존경받는 늑대의 이미지와는 정반대다. 사실 갯과에서 위험한 종은 늑대가 아니라 가축화된 개, 그중에서 대형견이 위험하다. 통계적으로도 과거나 지금이나 늑대에게 살해당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형견이 위험한 이유는 유형성숙(neoteny)에 의해 성격은 어리지만, 힘은 센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런 큰 개들은 어른이 된 늑대의 몸 크기와 힘을 가진 상태에서 성질과 사회적 발달 정도는 반쯤 자란 늑대 새끼 수준밖에 안 된다. 한마디로 대형견은 정신적 • 사회적으로 미숙한 상태에서 덩치만 믿고 날뛰는 격이다.
낯설고 위험한 것들로 가득 찬 야생에서 함부로 날뛰는 개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낯설거나 새로운 것들과 마주칠 때마다 성질을 부리는 것이 진화적으로 도움이 될까? 동물이 야생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신중함과 인내심을 동반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이러한 차이는 야생동물이나 (결과적으로 사람을 다치게 한) 개가 낯선 사람과 마주칠 때의 반응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야생동물은 신중하게 낯선 사람을 살피고 상황을 파악하면서 앞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가늠한다. 하지만, 사람을 다치게 했던 개들은 다짜고짜 낯선 사람에게 달려든다. 이래서 야생동물과 마주쳤을 때 손짓 눈짓 발짓 하나로 목숨이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것이다.
야생동물과 마주쳤을 때 가장 어리석은 행동은 육식동물 앞에서 등을 보이며 도망가는 것이다. 이러면 육식동물은 도망가는 사람을 먹잇감으로 인식할 수가 있다. 개가 사회적으로 미성숙하게 발달하는 이유에는 유형성숙 등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사람의 과잉보호나 학대도 그 이유가 될 것이다. 늑대 사회에선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는 행동을 하는 새끼들은 확실하게 응징함으로써 훈육한다(혼자, 혹은 치마폭에 싸여 성장한 아이가 제멋대로인 것처럼 동물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동물 사회건 인간 사회건 가정교육이 중요!).
사람과 함께 자라면서 사람의 왕성한 식탐을 그대로 물려받은 (늑대는 필요한 양만 먹기에 체중이 일정하다) 덕분인지, 아니면 선택 교배의 영향인지 개는 늑대보다 덩치가 커질 수 있다. 앞에서도 말했듯, 사람을 죽이는 개는 사회 능력과 정신 수준은 덜 발달한 상태에서 이렇게 덩치만 커진 개다. 일부 개가 늑대보다 위험하게 발달하는 것은 가축화 과정, 과잉보호가 나은 부작용이다.
반면에 늑대는 매우 사회적이고 한편으론 독립심도 강한 동물이다. 늑대가 수렵채집인을 받아들였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들이 얼마나 인내심이 강하고 협력적인 동물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최초의 가축, 그러나 개는 늑대다』에 소개된 사람과 함께 사는 것을 받아들인 늑대 사절 세렌과 피터가 인간 사회에 보여준 강한 인내심과 수준 높은 이해심은 쉽게 믿어지지 않는다.
늑대를 받아들일 수 있는 환경적 여건과 늑대와 함께 사는데 필요한 지식, 그리고 늑대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라면 늑대는 (사람을 포함한) 그 어떤 동물로도 대신할 수 없는 훌륭한 동반자가 될 수 있다. 그러했기에 많은 원주민은 늑대가 내민 협력적이고 우호적인 손길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공진화의 길을 선택했다. 하지만, 수만 년 이상 지속한 늑대와 사람의 공진화는 유럽 문명이 원주민 사회를 침략하면서 처참히 무너진다. 그 원흉은 바로 기독교다.
교회는 많은 사람이 자신들이 믿는 신이 아닌 늑대나 곰 같은 동물을 토템으로 숭배하거나 존경하는 것을 받아들 수 없었다. 기독교에서 창조자는 논란의 여지가 없이 단 하나의 존재여야 했으며 그 존재는 당연히 하나님이다. 하지만, 늑대와 협력적인 관계를 구축한 원주민 문화에서 창조자는 불경스럽게도 하느님이 아니라 늑대였다. 농경 사회를 구축한 (하지만 그들의 문화적 무의식 속에는 수렵채집 생활의 흔적이 아직은 남아 있는) 중세 유럽인들도 동물에게 영혼이 있음을 받아들였으며, 곰과 늑대를 조상이자 토템으로 인식했다. 교회가 사람과 늑대와의 우호적이었던 관계를 송두리째 뿌리 뽑으며 파탄을 일으키기 전까지는 ‘암흑시대’의 유럽인은 늑대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결국, 이를 참을 수 없었던 교회는 곰과 늑대를 악마와 연결해 마녀사냥처럼 열심히 박해 운동을 벌였고, 그 결과 곰과 늑대가 멸종 위기로 몰렸다. 이는 단지 기독교가 자행한 수많은 악 중의 하나일지도 모르지만, 창조자, 동반자, 스승으로 존경받던 늑대에게 ‘괴물’이라는 되지도 않는 오명을 씌운 죄는 아무리 많은 면죄부를 사들여도 영원히 지울 수 없다. 여기에는 교회뿐만 아니라 동물과의 감성적 유대를 인정할 수 없었던 기계론적 사고관도 한몫했으며, 이것은 지금까지도 동물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매우 편협한 이념이다.
최초의 만남이 있었던 후, 한 종은 번영하고 한 종은 멸종으로
교고쿠도라면 모르겠지만 나의 박약한 말발만으로는 늑대와 개에 관한 모호한 정체성, 그리고 그와 관련된 선입관이나 편견을 혁파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래도 늑대와 개에 관한 모호한 정체성에 대한 담론을 나누는 앎의 한 단락 정도는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깊이는 없어도 나름 진지했으며, 내가 아는 것과 느낀 것, 그리고 말해주고 싶은 것을 거짓 없이 진정으로 토로했다. 누군가 내 리뷰를 읽고 늑대와 개에 관한 호기심이 주체하기 어려울 정도로 끓어오른다면, 나야말로 보람과 긍지를 느낄 것이며, 기꺼이 지적 호기심의 바통을 『최초의 가축, 그러나 개는 늑대다』에게 넘길 것이다.
개를 가족으로 받아들인 지도 어느덧 17년이 넘었지만, 늑대와 개의 관계가 이렇게 복잡하고 미묘할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다. 늑대와 개에 관한 정체성 혼란은 전적으로 사람의 잘못이지만, 그 결과는 늑대를 멸종 위기 동물로 몰아가고 있을 정도로 참담하다. 늑대를 경험한 사람들의 말로는 늑대는 (사람과 늑대가 진정한 사회적 관계를 구축한다면) 사람보다 더 신뢰할 수 있는 우아하고 품위 있는 동물이라고 말한다. 늑대는 머리도 좋고, 적응 능력도 뛰어나며, 무엇보다 혼자 있으면 사람처럼 외로움을 심하게 탄다는 점에서 감수성도 예민한 동물이다.
늑대는 유라시아에 첫발을 내디딘 호모 사피엔스의 미숙한 사냥 모습을 보고 동정을 금치 못한 나머지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을 것이다. 혹은, 늑대의 완숙한 사냥 모습을 보고 반한 호모 사피엔스가 먼저 늑대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그 요청을 늑대가 수락했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이때 늑대가 네안데르탈인도 아니고 데니소바인도 아니고 호모 에렉투스도 아닌 호모 사피엔스를 선택한 이유다. 이것은 영원히 풀 수 없는 수수께끼로 남을지도 모르지만, 그 선택, 즉 사람과의 공진화를 선택한 것이 자신들을 멸종으로 몰아가게 될 줄은 그들 역시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이로써 진화는 미래를 미리 내다보고 설계하는 능력이 없다는 것이 증명된 셈이기도 하지만, 왠지 모르게 기분이 썩 개운치가 못하다. 이 개운치 않은 기분은 돌풍처럼 거세게 일어났다 죽은 듯이 사라지는 동정심이라기보다는 뭔가 새로운 앎을 얻었음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나에 대한 무한한 연민과 연예인의 사생활만큼도 관심을 일으키지 못하는 멸종에 대한 인류의 지독한 무관심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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