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량의 상자(魍魎の匣, 2007) | 각색 자체가 대단한 도전?
<1952년 도쿄 재현을 위해 상하이에 촬영했다고 한다> |
한편에선 교고쿠 나쓰히코의 작품은 영상화가 불가능하다는 불평 같은 논평이 새어 나올 때 한편에선 그런 논평을 교고쿠도의 기세 좋은 말발의 위세를 빌려 되받아치려는 듯 보란 듯이 영화로 제작된다. 그렇게 해서 「우부메의 여름(姑獲鳥の夏)」의 뒤를 이은 두 번째 영화가 제작되었다.
<똘망똘망 빛나는 눈동자가 압권인 아베 히로시> |
내가 보기에 교고쿠 나쓰히코의 소설이 영상화하기가 어려운 이유는 단지 분량이 길어서만은 아니다. 얼핏 봐선 궤변인지 정론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교고쿠도의 현학적인 화술의 정수를 관객에게 어떻게, 그리고 얼마만큼 전달해야 하는가 하는 고민도 있겠지만, 소설 『망량의 상자』 리뷰에서 언급했듯 소설의 플롯과 이야기 전개 자체가 ‘불쾌한 우연의 집적과 확산으로 복잡하게 뒤얽힌 사건’들이다. 고로 이것들을 얼마나 압축하고 어떤 식으로 재구성해야 원작의 묘미를 잃지 않으면서도 영화가 끝났을 때 관객이 어리둥절해서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는 ‘쉬운 감상’을 끌어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이 관건이지 않을까 싶다.
‘독서’보단 덜 집요한 집중력으로 임하는 ‘영화 감상’에서 교고쿠 나쓰히코 소설의 영화화는 감독들에겐 대단한 도전일 것이다.
<잘나가는 교주조차 덥석 엎드리게 만드는 교고쿠도의 위력> |
IMDB 평점이 이전 작품 「우부메의 여름」보다 조금 더 높은 만큼 확실히 더 볼만하다고는 생각된다. 그건 ‘토막 살인’, ‘신체 개조’ 등 소재 자체가 워낙 엽기적이고 흥미로워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우부메의 여름」과는 달리 원작을 읽지 않은 관객이라도 영화만으로도 퍼즐을 완성하는 데 큰 무리가 없을 정도로 각색 • 연출 등에 신경을 쓴 흔적이 역력하다(그만큼 사건들이 단순화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감독, 각본 등의 제작진은 대거 변경되었지만, 세키구치를 맡은 배우만 신병 때문에 교체되었고, 그 외 대부분은 「우부메의 여름」에서 이어져 온 친숙한 배우들이라는 점도 몰입도 향상에 약간은 이바지하고 있다.
<교고쿠도 일당> |
교고쿠 나쓰히코 소설은 서로 아무 관련이 없어 보이는 사건들이 그물처럼 얽히고설킨 끝에 그 누구도 손댈 수 없을 정도로 아수라장이 되면, 마지못해 교고쿠도가 나서서 벼락같은 호통과 위엄 등등한 위세의 힘으로 위장한 불제 의식으로 명탐정이 사건을 마무리하듯 사건을 해결하는 것이 특징인 만큼, 대사도 많고 설명도 많을 수밖에 없다. 고로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특히 교고쿠도가 설교할 때) 이야기를 따라잡지 못하는 불상사가 발생하니 시청에 특별히 주의해야 한다.
<신체 개조, SF 냄새를 맡을 수 있다> |
원작에서 교고쿠도는 범죄에서 동기는 중요하지 않을뿐더러, 동기는 범죄가 발생하기 전에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범죄가 저질러지고 나서 누군가에게 질문을 받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설교하는 등 범죄 동기에 대한 새로운 일리를 들고나오지만, 이것이 동기를 잣대로 범죄를 이해하고 판단하려는 보통 사람들에겐 혼란만 줄 것이라 예상했는지 깔끔하게 제거되었다(사실 이야기 따라가기도 벅찬데 어느 틈에 그런 것을 고민하고 있나?). 이외에도 사건의 복잡성은 원작보다 훨씬 단순해졌고, 그래서 집중력만 잃지 않는다면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 무리는 없다. 원작의 사건 구성이 너무 복잡하고 방대해서 그렇지 이 정도만 산만하지 않게 잘 압축시킨 것이다.
이후로 교고쿠 나쓰히코의 작품은 (나의 기대와는 달리) 아직까진 영화 • 드라마로 각색되지 않은 것을 보면 확실히 그의 소설은 감독에겐 망량 같은 원작이다. 「와라우 이에몬(Warau Iemon)」도 있는데 영상은 둘째치고 자막을 구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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