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량의 상자 교고쿠 나쓰히코 | 세 치 혀에 농락당할지라도 재밌으면 그만
“보통은 그런 짓은 하지 않지. 충동은 대부분 참을 수 있네. 하지만 ― 참을 수 없을 때가 있어. 시간으로 따지자면 겨우 몇십 분의 1초일세. 그 잠깐 사이에, 도리모노가 그녀의 안을 지나간 걸세. 따라서 그녀는 가나코의 등을 밀었을 때 밉다든가, 원망스럽다든가, 그런 축축한 인간의 감정을 갖고 있었던 건 아니야 ― .”
교고쿠도는 그렇게 말하며 두 손을 내밀었다.
“그녀에게는, 그저 가나코의 등에 난 여드름이 보였을 뿐이지.”
(『망량의 상자(下)』 , p168)
‘동기’는 조연도 안 된다!
두 권짜리 추리 소설은 오랜만이다. 읽는 도중에는 간간이 길다고 느껴지긴 했지만, 다 읽고 나니 소설이 꽤 길다고 느꼈던 불과 조금 전 감상이 새빨간 거짓말처럼 믿어지지 않는다. 이 말은 겉으로는 상관없어 보이는 서로 다른 사건들(소설 속에서)의 전개가 독자에게 혼란과 지루함을 가져올 수도 있지만, ─ 세 치 혀만으로 세상을 헤쳐나간다는 위대한 현학자 교고쿠도의 표현을 빌리자면 ─ ‘이 불쾌한 우연의 집적과 확산’으로 복잡하게 뒤얽힌 사건들의 진상이 하나하나 풀어지는 계몽의 시기는 그야말로 말이 트이고 눈이 뜨이는 천지개벽의 시간이다. 그래서 재밌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 동료로부터 시종일관 바보 취급당하는 가엾은 소설가 세치구치처럼 ─ 왠지 모르게 선생님으로부터 핀잔을 듣는 학생과도 같은 불편하면서도 거북한 마음도 없지 않아 있다. 끝내 진상은 밝혀지지만, 범죄 동기를 세상 사람들이 범죄에 대해 자신을 스스로 이해시키고 만족시키기 위한 환상으로 치부하는 교고쿠도의 여우 같은 설교에 한 번 빠져들고 보니, 그동안 추리 소설 속의 사건을 구성하는 요소 중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던 동기를 탐색하고 밝히는데 적지 않은 뇌세포를 동원해 왔던 나로서는 도무지 뭐가 뭔지 알 수가 없다.
산 채로 사람의 사지를 절단하고, 하나뿐인 친구를 달려오는 기차 앞으로 밀어 넣고, 엄마가 딸을 유괴할 계획을 모색하는 등 법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범죄가 분명한 사건들이 발생해도 ‘동기’는 중요한 것이 아니란다. 여기에 한술 더 떠 교고쿠도는 동기만이라면 세상 사람 누구에게나 있을 뿐만 아니라 살인 계획도 다들 세우고 있다면서 단지 실행하지 않을 뿐이라는 섬뜩한 주장을 불쾌한 얼굴로 불쾌하게 설명한다. 솔직히 말해 층간소음을 유발하는 이웃들을 어떻게 죽여야 완전 범죄로 만들까 하는 변변치 못한 궁리를 하는 파렴치한 나를 보면 그의 주장에는 일말의 진실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범죄에서 동기는 중요하지 않을뿐더러, 동기는 범죄가 발생하기 전에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범죄가 저질러지고 나서 누군가에게 질문을 받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하니, 그동안 ‘동기’에 천착해 온 나로서는 역시 어리둥절할 뿐이다.
범죄는 막상 ‘그’가 찾아올 때, 일어난다!
교고쿠도에게 범죄는 언제나 찾아왔다가 떠나가는 ‘도리모노(通り物)’ 같은 것이다. 도리모노란 지나가던 집이나 만난 사람에게 재앙을 끼치고 나서 순식간에 지나가 버린다는 요괴다. 교고쿠도는 괴상망측한 도리모노를 설명하고자 인기척 없는 심야의 전철역을 상기시킨다. 인기척 없는 심야의 플랫폼 가장자리에 소녀가 서 있고, 거기에 전철이 들어온다. 당신은 그 소녀의 등 뒤에 서 있고, 지금 소녀의 등을 밀어도 목격자는 아무도 없다. 기회는 한 번밖에 없다. 전철이 멈추기 직전, 빨라도 늦어도 안 된다. 아주 약간만 타이밍을 놓쳐도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 전철은 점점 다가오고,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우연히 이런 미묘한 상황에 놓이면 소녀의 등을 밀고 싶은 충동을 정말 느낄까? 아니면 느껴야 할까? 살의라고 부르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미덥지 못한 이러한 충동을 대부분 사람은 잘 참아낸다. 참아내니까 세상은 그나마 살 만한 것이다. 나 같은 경우 위층이나 아래층에 사는 사람을 종종 계단에서 마주칠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사람이 계단 위쪽에서 구르기 시작하여 아래쪽까지 도착하는데 몇 번을 굴러야 하나 시험해 보고 싶은 충동을 간절하게 느낀다. 그렇지만, 이 글을 ─ 감옥이 아닌 ─ 집에서 쓰고 있다는 것은 대견스럽게도 내가 그 충동을 잘 참아내 왔기 때문이다(이런 점 때문에 층간소음을 일으키는 이웃을 계단이나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는 일은 내겐 일종의 고문이다). 하지만, 참을 수 없을 때가 있다. 1초도 안 되는 그 잠깐 사이에, 도리모노가 그 사람 안을 흩고 지나간다. 심야의 플랫폼 가장자리에 서 있던 소녀의 등을 민다. 그 소녀가 미워서도 아니고, 원망스러워서도 아니다. 그것은 그저 ‘도리모노’일뿐이다. 그렇다면 연쇄살인범은 도리모노에게 영혼이 강탈된 자인가? 아니면 도리모노 그 자체인가?
아무튼, 사정이 이러하니 교고쿠 나쓰히코(京極夏彦)의 『망량의 상자(もうりょうの匣)』를 읽고 난 뒷맛이 개운할 리가 없다. 이제 막 긴장이 풀어진 뇌세포를 휴식 상태로 전환해놓고, 허탈해하는 오장육부를 휘돌아 나오는 깊은 한숨을 내쉬면서 책장을 덮는다. 이쯤 되면 오롯이 남아있는 것은, 약간은 허망하면서도 그다지 불쾌하지는 않은, 억울하지만 분하지는 않은 알쏭달쏭한 미련이다. 시체를 먹는 귀신을 망량이라고 하지만, 한편으론 상당히 오래된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이자 흐릿한 경계도 망량(魍魎)이라고 한다. 추리 소설과 환상 소설의 흐릿한 경계를 배회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이 책 『망량의 상자(もうりょうの匣)』야말로 내겐 ‘망량’이다.
<당연히 '교고쿠도'는 이런 서점은 아닐 것이다> |
취향에 따라 희비가 크게 엇갈릴 수 있는 작품
반 다인(S. S. Van Dine)이 창조한 탐정 파일로 반스(Philo Vance)보다 더 현학적인 교고쿠도의 화술에 농락당하다 보면 거북한 그의 논리가 궤변인지 정론인지도 알지 못한 채 그냥 압도당하고 마는 , 『망량의 상자』는 그런 추리 소설이다. 독자는 음울한 사소설을 쓰는 소설가이자 처음부터 끝까지 동료에게 이해력이 떨어진다고 핀잔받는 가련한 세치구치처럼 ‘이 불쾌한 우연의 집적과 확산’으로 복잡하게 뒤얽힌 사건들이 어리둥절해서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래서 끝을 보고도 석연치 않다. 그렇게 미련은 남는다. 누군가에게 이 미련은 시기를 놓쳐 버리지 못하고 남은 쓰레기처럼 불쾌할 수도 있고, 누군가에겐 꼭 쓸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뭔가 색다른 것을 발견한 것 같은 소박한 흥분감을 느끼게 해줄 수도 있다. 무엇이 정답인지는 읽은 사람만이 알 수 있지만, 한가지 장담할 수 있는 것은 지금까지 읽었던 추리 소설들과는 달라도 많이 다른, 현학적으로 집요한 맛이 느껴지는, 태생부터가 어딘지 다른 돌연변이 같은 추리 소설이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충고하자면, 교고쿠도의 현학적 언변이 색다른 탐구의 길을 모색했다는 반가움과 지적 흥분감을 느끼게 할 수도 있지만, 수다스러운 허풍쟁이의 궤변에 지나지 않는다는 불쾌감을 줄 수도 있다. 물론 선택은 당신의 자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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