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적 사적 잭 | 모리 히로시 | 사이카와, 이공계의 화신? 그저 특이한 남자?
뜻밖에 떠오른 오답에 갇힌 나의 추리
아쉽게 됐다. 범인이 누구인지는 맞히었다. 범인이 어떻게 세 번째 밀실을 만들 수 있었는지, 범인이 남긴 증거 중 어느 것이 경찰 수사에 혼란을 주기 위한 ‘가짜’인지도. 내가 제시한 해법도 ─ 물론 내 사고의 테두리라는 명백한 한계 내에서 ─ 사건을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풀이로써 ‘특별한 문제점’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명백한 실수였다. 그리고 터무니없는 오만이었다. ‘특별한 문제점’을 찾을 수 없었던 나의 사고력의 한계, 혹은 ‘특별한 문제점’을 찾지 않으려고 했던 나의 사고력의 게으름이 내가 제시한 해법보다 더 깔끔한 다른 해법이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일소해버렸다. 결국, 난 내 머릿속에 떠오른 해법만이 유일하게 사건을 설명하는 답이라는 있을 수 있는 자만에 빠져들었고, 지난번(『웃지 않는 수학자』)에 이어 또다시 작가를 이겼다는 지적 흥분으로 일찌감치 승리를 자축한 나의 심장은 벌떡거렸다. 나이에 맞지 않게 바보처럼 날뛰는 심장을 간신히 달래고, 수전증 걸린 사람처럼 후들거리는 손길로 간신히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그 몸서리치도록 이지적인 사이카와의 값비싼 세 치 혀가 내가 찾아낸 해법 그대로 형사들 앞에서 강의하는 것을 상상했을 때의 그 짜릿함이란 이루말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내가 던진 사고 그물에 내가 갇히고 만 격이 되었으니 꼴 좋게 되었다. 사이카와가 제시한 최종 해법은 무릎을 '탁' 칠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헉, 한 방 먹었다!’라고 감탄할 정도는 충분했다. 이번에도 정보가 부족했던 것이 아니라,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내가 어쩌다 생각해 낸 해법이 사건을 어쭙잖게나마 설명하는 기적 아닌 기적이 일어나는 바람에, 사건을 더 매끄럽게 설명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생각할 조차 하지 않고 스스로 사고의 장벽을 세워 그 안에 갇히고 말았으니, 우쭐거리다 스스로 우물에 풍덩 뛰어든 격이다. 이래서 냉정한 사고력을 유지하고, 또한 그 결과물에 (나처럼) 쉽게 현혹되지 않는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다. 그런 면에서 어떤 경우에든 절대온도의 균형을 잃지 않는 사이카와의 냉정함과 평정심은 지독히 무섭다.
<내가 커피를 마시는 이유는 오직 ‘읽기’와 ‘쓰기’ 때문!> |
‘이공계’라고 어물쩍 넘기기에는 석연치 않은 사이카와 세계관
액수가 크니 군사 목적이라고 넘겨짚으며 어마어마한 이익을 남기는 거래를 단박에 거절한다. ‘취미’와 ‘일’은 돈을 받고 안 받고의 차이가 아니라 본질에서 같다. 남녀평등은 직업과는 무관하며 뭔가를 배우는 행위는 그 자체로 평등해지기 위해서다. 연구란 뭔가에 흥미가 있어서 하는 게 아니라 연구 그 자체가 재밌어서 하는 것이기에 재미만 있으면 세금 낭비는 아니다. 거대한 콘크리트를 들이부어 만든 창문조차 없는 ‘새하얀 감옥’ 마가타 연구소는 이상적인 직장이다. 속임수야말로 인간성의 추구고 그 인간성을 확보하려는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은 가상현실 기술밖에 없다. 네트워크만 이어져 있다면 어디든 좋다. 현실이라는 게 무엇인가, 하고 생각하는 순간에만 인간의 사고에 드러나는 환상이 현실이다. 일하는 건 사람의 본질이 아니니 빈둥거리는 게 훨씬 더 창조적이다. 인간의 진정한 능력은 문제를 푸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만드는 것, 그리고 문제가 무엇인지를 발견하는 것이다. 인류 역사상 최대의 트릭은 그건 사람들로 하여금 신이 있다고 믿게 한 거다.
『시적 사적 잭(詩的私的ジャック)』에서뿐만 모리 히로시(森博嗣)가 창조한 사이카와의 독특한 세계관을 넌지시 알려주는 언동은 ‘S & M(사이카와 & 모에)’ 시리즈 전반에 걸쳐 골고루 분포되어 있다. 대충으로나마 이렇게 모아 놓고 보니 마오쩌둥처럼 ‘사이카와 어록’을 편찬해도 될법하다. 누군가는 지극히 이공계적인 사람의 이공계적인 사고관을 반영하는 이공계적인 세계관이라고 말하고 싶겠지만, 주변에 널린 대학 졸업자 중에 절반 정도는 (나를 포함해서) 이공계 졸업생이라는 점에서 앞의 말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고로 큰 범주 안에 억지로 욱여넣는 것은 무리이고, 사이카와라는 한 사람의 개성과 인격과 소양이 함축된 세계관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만약 세상 이공계 졸업생의 절반 정도가 사이카와와 비슷한 세계관을 공유한다면 세상은 지금보다야 평화롭겠지만, 그 평화는 감정이라는 불순물을 허용하지 않는 빙하 시대 같은 몸서리치도록 차가운 평화일 것이다.
특별히 사이카와 세계관을 문제 삼고 싶어서 이야기를 꺼낸 것은 아니다. 다만, 지금까지 보아온 탐정과는 엄청난 괴리감이 느껴지는 특이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자연스럽게 눈길이 간다. (나 역시 그처럼 커피는 오직 블랙만을 마시지만) 블랙커피 같은 짙고 고아한 지성의 향기를 발산하며 자유로운 사고로의 확장을 도와주는 그만의 독특한 세계관은 달고 느끼한 커피믹스에 길든 사람을 불법 유턴시켜 블랙커피로 관심을 돌리게 할 정도로 사람의 마음을 확 끌어당기는 뭔가가 있다. 변덕스럽고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의 감정으로 달궈진 현실 감각을 싸하게 식히는 뭔가가 있다.
‘현실’이라는 담론에서 사이카와는 과연 존재 가능할까?
사이카와 본인은 ‘탐정’ 역할을 맡은 것을 철저하게 부인할 것이고, 그럴 만큼 그는 ‘살인’이니 ‘죽음’이니 ‘동기’이니 하는 인간사에 얽매이는 것을 애초에 싫어할 뿐만 아니라 얽매이고 싶어도 그의 둔감한 감수성으로는 달에서 토끼 찾기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는 결국엔 마지못해, 그리고 귀여운 모에의 집요한 ‘정신공격’을 견디지 못해 미궁에 빠진 사건을 해결하고 그것도 모자라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형사들 앞에서 강의를 펼친다. 텔레비전도 안 보고 신문도 안 읽는 것처럼 범죄뿐만 아니라 바깥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관심 없는 그가 왜? 그것은 강의 중에 잠을 자도, 강의실에 들어오거나 멋대로 나가도 화내지 않는 이유가 단지 자신은 돈을 낸 학생들에 고용된 사람일 뿐이라는 지당한 논리처럼 그가 모리 히로시 작품에서 막판에 약속이나 한 듯 사건 강의를 펼치는 것은 독자가 지급한 책값에 대한 반듯한 예의리라. 이런 사람이 천체물리학도 아니고 건축학사를 가르치는 교수라는 사실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사정이 이러하니 30대 중반까지 모친과 여동생을 제외하고는 여성과 단둘이서 식사하거나 차를 마신 경험이 없다는 사실이 그리 놀랍지도 않다. 이보다 사이카와도 사람의 배에서 태어난 누군가의 자식이라는 점과 사이카와의 ‘여성 버전’이라 할 수 있는 여동생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더 놀랍다. 앞으로 사이카와의 여동생이 등장할지 안 할지는 좀 더 두고 봐야 알겠지만, 가치관이나 성격 등 모든 면에서 평범함을 벗어난 오빠를 생각하면 그녀가 어떤 사람일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데 사이카와 같은 세계관을 가진 사람을 찾는 것보다 ‘조교수’, 혹은 그와 비슷한 사회적 지위에 오른 남성 중에서 30대 중반까지 여자와 단둘이서 식사하거나 차를 마셔 본 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을 찾기가 더 어려울 것 같다. 그가 고자가 아니라면 그의 여성에 대한 무관심은 어렸을 때 여자와 관련된 트라우마를 겪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무참하다. 어쩌면 중년 남자의 넋 나간 성욕마저 당장 원위치시킬 수 있을 정도로 유혹적이고 자극적인 상황이라 할 수 있는, 즉 기분 좋을 정도로 술기운이 도는 아리따운 아가씨 모에가 눈앞에서 애정을 고백하는 모든 남자의 상상 속에서 못 해도 수천 번은 등장했을 법한 심쿵한 상황에서 냉정함을 유지하는 것이 가능한 사이카와는 도를 닦는 도인이라도 된단 말인가? 여러모로 모에만큼이나 비현실적인 인물이다. 아니면 세상 모든 남자를 늑대의 한 부류로 보는 나의 선입견이 잘못된 것일까?
앞으로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떤 식으로 결말이 날지 엄청나게 궁금하지만, 지금까지 보여준 사이카와의 이미지를 고려하면, 그리고 사이카와에 대한 모에의 깊고도 진한 연정을 생각하면 둘이 결혼하거나, 아니면 둘 다 독신으로 남아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시적 사적 잭』에서 모에의 집요하고도 요령 있는 집중 공세에 서서히 변해가는 사이카와를 떠올리면, 두 사람의 미래는 낙관해도 괜찮을 것 같다.
한편, 사이카와의 여동생은 어떤 인물일까 하는 하등 쓸데없는 상상을 펼쳐보면 딱 떠오르는 남매가 있다. 바로 교고쿠 나쓰히코(京極 夏言) 소설 속에 등장하는 교고쿠도와 그의 누이동생 아츠코다. 이 두 사람의 성격은 『타고난 반항아』을 쓴 프랭크 설로웨이(Frank J. Sulloway)의 형제전략 이론의 예시로 사용해도 될 만큼 확연히 다르다. 고로 사이카와의 여동생은 오빠처럼 목석이지도 않을 것이고, 대인관계 역시 오빠보다는 훨씬 유연할 것이다. 직업을 가졌다면 아마도 예술 계통이지 않을까 하고 내 멋대로 짐작해 본다.
<밀실 트릭, 현실에서도 가능할까?> |
‘감정’ 없는 살인, 천재인가? 사이코패스인가?
오늘은 정작 밀실 트릭에 관한 이야기는 없고 사이카와에 대한 두서없는 이야기만 있다. 아마도 개운치 않은 패배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무의식적인 회피이자 외면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도 나 같은 아둔한 독자도 도전해보고 싶은 의욕을 샘솟게 한다는 점에서 모리 히로시의 소설은 먹기도 좋고 맛도 별난 간식이다. 독자가 해법을 찾는 것을 자존심의 상처로 받아들이는 작가들이 심술을 부리듯 트릭을 억지로 비비 꼬지도 않는다. 누구라도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을 십분 불러일으킨다는 말을 듣고는 얕잡아 볼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밥상을 차려놓고 ‘어서 드십쇼’라고 할 만큼 만만하지는 않은 적절한 난이도의 트릭이다.
『시적 사적 잭』에는 총 세 번에 걸쳐 밀실 트릭이 등장하지만, 앞의 두 트릭은 사이카와의 도움이 없이도 모에 혼자서 해결할 만큼 대단한 것은 아니다. 이 두 트릭에 사용된 기계적인 수법은 앞의 세 작품에 비하면 약간 퇴보한 듯한 느낌의 고전적인 트릭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트릭도 트릭 자체만을 놓고 보면 ‘억’하는 탄성을 자아낼 정도까지는 아니다. 내가 생각해 낸 해법도 세 번째 트릭만을 놓고 보면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추리한 해법이 사이카와가 추리한 해법으로부터 멀어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바로 ‘동기’였다. 나는 당연하다는 듯 범인의 살인 동기를 보통의 살인 사건처럼 사람의 부정적인 감정, 즉 질투, 시기, 증오, 분노 등에 기인한 것으로 오인했다. 뭐 눈엔 뭐만 보인다고 그동안 읽어온 추리소설들에서 간접적으로 경험했던 사건들, 즉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대는 감정적인 동기가 반드시 따른다는 선입관을 아무 생각 없이 적용한 것이다.
하지만, 애초 감정적인 면에서는 둔감한 사이카와는 ‘감정’이 배제된 상태에서 순수한 이성과 논리만으로, 그리고 사실과 증거만으로 사건을 해석할 수 있었으니 나처럼 그럴듯한 ‘동기’를 멋대로 떠올리고 그에 맞추어 사건을 재구성하는 오류는 범할 수가 없다. 일반적인 살인 사건에서는 동기가 밝혀지면 쉽게 용의자를 추려낼 수 있지만, 범행 흔적마저 깨끗하게 인멸한 자가 누군가에게 목격될 위험을 감수하고 노력과 시간을 들여 밀실을 준비한 이번 사건에서는 동기에 천착하기보다는 밝혀진 사실과 눈앞에 드러난 증거만으로 사건을 재구성할 수 있어야 했다. 사이카와는 그렇게 사고했지만, 난 범인이 누구인지 짐작하자마자 그 범인을 중심으로 어떠한 동기로 어떻게 사건에 관여했는지 하는 쓸데없는 상상에 몰두하느냐 얼마 되지도 않는 사고력을 낭비하고 말았다. 아마 이것이 익숙하기도 하고, 쉽기도 하기 때문이리라.
사람의 판단력을 흐트러트리는 불쾌한 감정에서 기인한 평범한 동기 따위를 고려하는 것 자체가 범인에 대한 모독이 되지는 않겠냐고 여겨질 정도로 범인은 사이카와와 견줄만한 높은 지성을 갖추었다. 범죄에 감정이 개입되지 않았기에 동기를 추적하기도 어렵고 그만큼 용의자를 추려내기도 어렵다. 감정적인 문제에 쉽게 휩싸이는 우리 같은 보통 사람이나 아예 감수성이 둔감한 사이카와 같은 사람으로서는 좀처럼 이해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감정’ 없는 살인은 천재가 저지른 한때의 오류일까? 아니면 사이코패스일까?
현실에서 밀실 살인 사건이 진짜로 일어났다는 이야기는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아마도 그것은 범죄자의 지능이나 지식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발각될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리고 ─ 밀실 트릭에 사용된 장치나 수법이 범죄자의 특성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 공을 들일 만한 이점이 없기 때문이지 않을까? 그런데도 우리는 밀실 트릭에 환호한다. 그것은 사람의 감정에 오염되지 않는 순수한 추리와 논리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것이 세상만사에 무관심한 사이카와를 살인 사건으로 끌어들이는 유일무이한 인력이니라.
마치면서...
가면 갈수록 더해지는 사이카와만의 독특한 세계관, 그리고 그가 세상을 소화하는 독특한 방식이 묘하게 끌린다. 그의 얼음처럼 차가운 이성과 강요하지 않는 순수하고 자유로운 지성으로 내가 가진 편견을 알알이 깨부수고, 이제 막 숨이 끊어진 시체처럼 딱딱하게 굳으려는 뇌를 마사지하고 기름칠하여 소생시킨다. 그럼으로써 사람의 사고는 우주처럼 무한하게 뻗어나갈 수 있다는 확신을 새삼스레 심어준다. 처음에는 ‘그냥 별난 사람도 있구나’ 하는 정도로 끝났던 감상이 이제는 경외의 대상으로 격상했다. 뭐 하나 부족할 것 하나 없는 모에가 외모만 보고 평가한다면 은둔자와 다를 바 없는 그에게 도깨비에 홀린 것처럼 빠져든 것도 절대 평범하지 않은, 그것보다는 평범한 사고방식이나 지성의 평범한 운용을 절대적으로 거부하는, 그렇게 세상을 초월하는 듯하면서도 그 세상 한구석에서 자유롭게 유영하고 보란 듯이 활보하는 사이카와만의 독특한 처세술과 세계관이 자아내는 매력 때문이니라. 인재가 인재를 알아보고 특이한 사람이 특이한 사람을 알아보는 것처럼 첫사랑에 빠진 남자처럼 사이카와의 매력에 어쩔 줄 몰라 하는 나 역시 특이한 사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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