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천룡팔부(2003) | 원작을 음미하는 소소한 재미
아마 중학교 3학년이었을 때다. 그 독이 든 성배를 누가 가장 먼저 교실에 들여놨는지는 그때도 지금도 알 수 없지만, 그 파장은 꽤 심각했다. 왜냐하면, ─ 주로 칠판에서 먼 쪽에 앉은 학생들에 한해서였겠지만 ─ 여러 학우의 수업 시간을 잠식했기 때문이다.
그땐 지금과는 달리 교실 안이 여유롭지가 않았다. 그때의 관점으로 봐도 내가 다녔던 8학군의 중학교 학급 인원수는 콩나물시루에 비유될 정도로 바글바글했었고, 마치 극장 관람석이라도 꾸미려는 것처럼 자리를 키순으로 배치했다. 개인의 성향과 신체적 능력 차이(주로 시력)를 무시한 이런 자리 배치는 고등학교에 와서야 사라졌지만, 이 때문에 나처럼 뒤쪽에 앉은 학생은 수업 시간에 앞에 앉은 학생의 등을 독서대 삼아 선생님 몰래 독서삼매경에 빠질 수 있는 특권을 누릴 수 있었다. 특권이라 표현은 했지만, 특권을 누리는 만큼 수업은 듣지 못하였기에 제로섬 게임이나 마찬가지다. 뭔 짓을 해도 성적이 좋은 재수 없는 녀석들에겐 별로 문제 될 것도 아니지만, 그렇지 못한 학생들에겐 낭패가 아닐 수 없다.
아무튼, 그때 사감의 눈을 피해 여자 기숙사를 드나들듯 선생님의 수업을 피해 김용(金庸)의 무협 세계를 심심치 않게 드나들었다. 그렇게 『소오강호(笑傲江湖)』와 『영웅문(英雄門)』을 읽었다. 누가 뭐래도 이 두 작품은 이후로 적어도 세 번 이상 읽었을 정도로 김용 작품 중 최고의 무협소설이다.
나의 애잔한 삶이 도탄에 빠졌다고 느낄법한 절망적인 순간마다 정신의 안식처를 제공해 주는 것이 무협소설이었고, 그중에서 김용의 작품이 단연코 일품이었다. 마치 첫사랑에 대한 추억을 회상하듯 잊을만하면 김용의 작품을 찾으면서도 왜 ‘소오강호’와 ‘영웅문’을 제외하곤 다른 작품을 읽을 생각을 못 했는지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알 수가 없다.
시간은 흘렀고, 천지가 개벽할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도서관이 코로나 사태로 장기간 휴관한 틈을 이용해 ─ 인터넷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텍스트본으로 ─ 소설 『천룡팔부(Demi-Gods and Semi-Devils)』를 읽게 되었고, 당연한 절차로 TV 드라마 ‘천룡팔부(2003, 총 40편)’도 감상하게 되었다(참고로 유튜브, mgoon 등에서 무료로 감상할 수 있다).
드라마는 원작 소설과는 달리 소봉의 거란족 비화에 얽힌 비극적인 전투를 1편 첫 장면으로 댕겼다는 점, 그리고 단예가 삽질하는 초반의 지루한 부분을 많이 생략한 점 등을 제외하면 ─ 김용 소설을 드라마로 각색한 다른 작품들처럼 ─ 원작에 충실하다. 아마 원작이 워낙 출중하다 보니 원작을 충실히 재현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작업이 되는지도 모를 일이다.
원작에 충실한 만큼 뭔가 새로운 것을 경험하는 재미보다는 소가 여물을 되새김질하듯 음미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고로 나처럼 소설을 먼저 읽고 디저트를 음미하듯 드라마를 감상하면 꽤 유쾌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고 호언장담까지는 아니더라도 추천할 수는 있다. 반대로 드라마를 먼저 감상하고 소설을 읽는 것은 약간은 김빠지는 결과를 초래하지 않을까 싶다. 소설은 드라마처럼 영상미나 배우를 품평하는 재미가 별로 없으므로 드라마로 인한 스포일러 때문에 읽는 재미가 반감될 것이다. 트릭과 범인을 아는 상태에서 추리소설을 읽는 것처럼 말이다.
김용의 소설을 각색한 드라마의 재미는 뭐니 뭐니 해도 배우 품평이다. 원작을 읽으면서 소록소록 상상했던 등장인물들의 야무진 개성이 해당 역할을 연기한 배우들의 이미지와 흡족하게 매칭되는지 요모조모 따져보는 재미 말이다.
우람한 체격에 호기 넘치는 인물인 교봉(喬峰)을 연기한 후쥔(胡军)은 독보적인 미모의 소유자 왕어언(王語嫣)을 연기한 류이페이(刘亦菲, 유역비)에 견줄 수 있을 만큼이나 괜찮은 캐스팅이었다. 드라마 속 후쥔의 인상은 앞에 선 사람을 주눅 들게 할 위엄으로 충만하다. 겉모습은 나약해 보이지만, 불의 앞에서는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 다정다감한 남자 단예(段譽)를 맡은 린즈잉(林志穎)의 까불까불 연기도 엄지를 치켜세우고 싶다. 어리숙하고 답답한 원칙론자로 보이기도 하지만, 소봉(교봉)과 단예와 결의 형제를 맺을 수 있을 만큼 정의감 넘치는 허죽(虛竹)을 맡은 가오후(高虎)는 코만 좀 더 납작했다면 정말 그럴싸했을 것이다. 가오후는 선량해 보이는 서글서글한 눈매가 자비로운 허죽과 잘 어울린다. 교활한 모용복(慕容復)을 연기한 시우칭(修庆)도 나쁘지 않았다. 목완청(木婉淸)을 연기한 장신(蒋欣)의 톡 쏘는 외모는 참말로 매혹적이었다.
내 마음에 가장 와닿지 않는 캐스팅은 아자(阿紫) 역을 맡은 첸하오(陈好)다. 너무 나이 들어 보이는 것은 그렇다 치고, 역대 최고 악녀로 꼽히기에는 독기와 악랄한 포스가 다소 부족하다. 그런데 아자 역은 누가 맡았어도 소화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미모와 악랄함이라는 기묘한 앙상블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감정 기복의 롤러코스터를 만끽하게 할 정도로 인류의 타고난 직관을 조롱하는 설정이다.
천룡팔부(天龍八部)』는 2003년도 작품이라 그런지 화질도 좋지 않고, 액션도 요즘 무협 드라마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지만, 워낙에 원작의 장대한 구성이 흥미진진하니만큼 중국 산천을 유람한다는 기분으로 느긋하게 즐기면 그럭저럭 흡족할 만한 시간은 내줄 수 있는 드라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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