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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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의 침팬지 | 멸종 위기, 자업자득? 도약의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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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의 침팬지 | 재레드 다이아몬드 | 제3의 침팬지의 멸종 위기, 자업자득인가? 도약의 기회인가?

농업의 기원을 연구하는 고고학자는 우리에게 인간이 역사상 가장 중요한 결단을 내렸을 때의 상황을 재현해준 것이다. 인구 억제와 식량증산의 갈림길에서 인간은 후자를 선택했고, 그리하여 기근과 전쟁과 독재의 길을 걷게 되었다. 오늘날 인류 역시 똑같은 갈림길에 놓여 있다. 다만 그때와 차이가 있다면 오늘날의 인류는 과거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 (p291)

당신은 ‘제3의 침팬지’를 인정? 아니면 무시?

지구상에서 여러모로 인류와 가장 가까운 동물이 침팬지라는 것 정도는 어느 정도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다들 인지하고 있는 사실이다. 이미 오래전에 이를 입증하는 유전자 비교 분석이 완료되었고, ─ 인류와 침팬지의 유전적 차이를 정확히 몇 퍼센트로 봐야 할지는 이론이 분분하지만 ─ 유전적 차이가 그 어떤 동물과도 비교한 것보다 매우 적다는 것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런 점을 강조하면 재레드 다이아몬드(Jared Diamond)가 호모 사피엔스를 ‘제3의 침팬지(The Third Chimpanzee)’라고 부른 것도 그렇게 틀린 말은 아니다. 그의 설명대로 인류가 멸종한 먼 훗날, 외계의 고생물학자가 지구를 탐사하고, 지구의 화석을 연구하면서 오로지 DNA 분석만으로 인류와 침팬지를 분류했을 때, 인류가 ‘제3의 침팬지’로 분류되어도 ─ 누군가에게는 땅을 치고 울부짖을 정도로 억울하고 짜증 나는 일일지라도 ─ 우리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 유전자는 인류의 가장 가까운 종으로 침팬지를, 그리고 침팬지의 가장 가까운 종으로 ─ 고릴라가 아니라 ─ 인류를 지목하고 있다.

그렇다고 인류가 ‘제3의 침팬지’로 불리는 것이 쌍수를 들고 환영할 만한 유쾌한 일은 아니다. 사실 나처럼 동물과 사람의 차이를 ─ 높고 낮음, 유무의 차이로 보기보다는 ─ ‘정도(程度)’의 차이로 보는 사람에겐 인류가 ‘제3의 침팬지’라는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주장은 의외라기보다는 매우 적절한 표현으로 들린다. 그러나 평소에 자신이 타인보다 인간성이 매우 풍부하다고 오해하며 유난히 ‘인간성’을 강조하는 인간 중심적인 편견에 사로잡힌 사람에게 인류가 ‘제3의 침팬지’라는 주장은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나 다를 바 없으며, 이 말은 듣는 즉시 ─ 이런 터무니없는 주장을 낸 과학자에게 위협하듯 ─ 고릴라처럼 가슴을 쾅쾅 두드리며 펄쩍펄쩍 날뛸지도 모른다.

수북한 털로 뒤덮인 침팬지의 겉모습만 얼핏 봐도 인류와는 꽤 다른 것처럼 보이는데, 독보적인 문화와 눈부신 문명을 이룩한 인류가 단지 유전적으로 가깝다는 이유로 ‘제3의 침팬지’라는 소리를 들어야만 하는 걸까? 많은 사람이 무고하게 감옥에 갇힌 죄수처럼 억울함으로 분노를 터트리고, 우리는 절대 ‘제3의 침팬지’가 아니라고 온갖 지랄 발광을 떨며 항변해도 사실 우리가 변명할 말은 그렇게 많지 않다.

인류 멸종 위기, 이 모든 것이 자업자득인가?

사람을 사람으로 만드는 요소는 생각보다 극히 미미하며, 사람이 지닌 여러 특성은 동물에게 이미 존재하고 있으며, 단지 정도의 차이일 뿐이다.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그 예로 도구, 언어, 집단 학살, 약물 남용, 심지어 예술까지도 동물에게서 그 선례를 찾아낸다. 사실 ‘정도의 차이’라는 것도 따지고 들어가면 사람과 동물 간의 지능 차이에서 연유한 것일 수도 있으므로 사람과 동물의 다른 점이 매우 많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사람만의 독특한 특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사람은 농업혁명을 성공시켰다. 덕분에 더 많은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게 되었고, 잉여는 많은 사람에게 자유 시간을 남겨주었다. 자유 시간은 좀 더 수준 높은 예술과 기술을 개발할 시간적 여유와 기회를 제공했고, 예술과 기술의 발전은 문명을 진보의 길로 들어서게 한 진정한 조타수이자 문화를 이루며 살아갈 수 있는 든든한 토대다. 확실히 우리의 삶은 모든 점에서 과거 어느 시대 사람보다 ─ 최소한 물질적으로는 ─ 더 나은 삶을 누리고 있다. 풍부한 음식, 편리한 도구, 안락한 기술, 그리고 장수까지. 이 모두를 미련 없이 포기하고 과거로 돌아가 조악한 창과 도끼로 힘겹고 위태롭게 짐승들을 사냥하며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원시적인 삶으로 돌아가고 싶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 사람의 다양한 쾌락을 추구하려는 유난스러운 기질은 사람이 살지 않는 오지의 정글이나 야생을 탐험하며 원시성과 야만성을 일시적으로 만끽하는 레포츠 정도의 일탈은 허용하겠지만, 만약 그런 곳에서 문명의 혜택 없이 평생을 살라고 강요한다면, 99.999%는 자식의 취업을 청탁하는 부모의 간절한 마음처럼 자신이 지금까지 일구어 온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벗어나려 할 것이다.

농업혁명이 인구수를 기하급수적으로 증가시켰고, 덕분에 문명과 문화가 싹틀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영양실조, 기근, 전염병, 불평등, 계급차별 등의 갖가지 부작용을 촉발한 것도 사실이다. 이뿐만 아니라, ─ 사람의 독특한 성질이라고 볼 수 있는 ─ 서로 죽이는 것과 환경 파괴라는 두 가지 성향을 더욱 가속하면서 이제는 인류의 존재마저 위태롭게 하고 있다.

그렇다. 재레드 다이아몬드가 인류의 지난 300만 년의 무궁한 역사를 돌아보며 인간다움의 본질을 굳이 파헤치려는 이유는 동물 학대와 사냥을 스포츠처럼 즐기고, 사람을 위한 동물 실험을 손뼉 치며 열렬히 환대하고, 동물의 열등함으로 자존감을 자위하려는 사람들을 격려하고 우쭐하게 만들려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의 얄팍한 호기심이나 만족시키려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룩한 이 모든 진보를 한순간에 엎어버릴 수 있는 기술력과 그 기술력에 대한 지나친 과신, 그리고 과도한 남용이 재앙처럼 몰고 온 대량 멸종과 환경 파괴가 많은 사람이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서서히 우리의 멸종을 앞당기고 있음을 경고하기 위함이다.

The Third Chimpanzee: The Evolution and Future of the Human Animal by Jared Diamond
<사람들은 그들이 ‘생각’을 하고 ‘감정’을 느낀다는 사실을 믿지 않으려고 한다>

숲이 사라져도 슬퍼하지 않는 사람들

‘제3의 침팬지’로서든 ‘만물의 영장’으로서든 인류는 진화적으로 성공한 종(種)일까? 진화적 성공 여부의 기준을 오로지 종의 생존 기간으로만 설정한다면, 인류는 아직 건재하고 있기에 실패한 종이라고는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아프리카 이브’ 기원설에 따라 호모 사피엔스가 대략 20만 년 전부터 진화했다고 한다면, 지구 생명의 역사에서 고작 20만 년은 어디 명함을 내밀지도 못하는 매우 짧은 시기다. 고로 인류를 성공한 종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대단한 시기상조다. 공룡처럼 최소한 1억 년 정도는 생존했어야 성공한 종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인류가 가야 할 길은 지구에서 안드로메다 성운까지의 거리보다 몇백 배나 더 멀다. 그야말로 까마득하다. 이렇게 놓고 보니 공룡을 비롯한 파충류는 정말 대단한 생존력을 지닌 종이었음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다(그래서 미니시리즈 「브의(V)」에서 외계인의 정체를 파충류로 설정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만약 6.500만 년 전에 운석이 지구를 강타하지 않았다면, 영장류뿐만 아니라 대형 포유류가 감히 진화의 가지를 뻗어나 갈 수 있었을까? 공룡의 직계 후손인 조류가 아직도 번성하는 것을 보면, 공룡의 멸종이 없었다면 영장류의 탄생은 더 먼 미래에나 가능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운석 충돌이나 대량의 화산 폭발 등 대멸종을 일으키는 몇몇 요인들도 우연이고, 새로운 종의 탄생을 예고하는 돌연변이 역시 우연인 것을 보면 진화의 역사에서 우연은 ─ 사람의 인생처럼 ─ 앞길의 향방을 결정하는 꽤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이 모든 것이 우연의 연속으로 빚어진 결과물이라니, 그저 어리벙벙할 따름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또 다른 역작 『문명의 붕괴(Collapse: How Societies Choose to Fail or Succeed)』에서도 볼 수 있듯, 인류는 자멸할 능력이 충분하며, 그 가능성 또한 낮다고 보기 어렵다. 여전히 포기하지 않는 핵무기, 여전히 별다른 진전을 보이지 못하는 기후 변화에 대한 대응책, 여전히 개선할 의지가 안 보이는 생태계 파괴 등의 환경 문제, 여전히 끊이지 않는 전쟁, 여전히 인류의 도덕성을 위협하는 대량 학살의 전조 등 우린 여전히 많은 위험과 문제점을 해결하지 못한 채, 여전히 문명의 파괴적인 민낯을 외면한 채,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다. 누군가에게는 이 모든 것이 개인의 양심과 도덕심에 거머리처럼 들러붙는 ‘불편한 진실’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생각해 볼 가치도 없는 되먹지도 않은 소리처럼 들린다. 이기적이고 기회주의적인 대부분 사람에겐 자기 앞길 헤쳐나가는 것도 벅차다는 이유로 현재로선 자신들과 별 상관없어 보이는 지구적인 문제는 등한시하지만, 별 상관없어 보였던 그 문제들이 언젠가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발목을 물귀신처럼 붙잡고 늘어질 날이 오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인류가 과거의 역사에서 뭔가를 배울 수 있다면, 미래를 낙관할 수 있다고 희망하지만, 그리고 그런 사명감으로 역작들을 내놓았지만, 내가 볼 땐 현재로서는 가능성일 뿐이다. 예전보다 환경과 생태계 보호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도 사실이고, 기후 변화로 말미암은 피해가 가면 갈수록 증가하면서 국가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지구 환경에 관심을 좀 더 기울이게 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예전처럼 여전히 우리 주변은 생태계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 불도저식 개발로 숲과 산이 사라지고 있다. 내가 다니는 산책로에 있는 하천만 해도 주변에 아파트 단지와 대형 쇼핑몰이 들어선 이후에는 ─ 10여 년 전에는 맡으려야 맡을 수 없었던 ─ 악취가 코를 찌르고 있다. 예전엔 생태공원이라고 선전했던 공원도 여기저기를 인위적으로 개발해 놓으면서 얼마 남지 않은 야생 동물의 숨통을 조임과 동시에 남아 있던 야생의 경치도 사라졌다(왜 우리나라 사람들은 사람의 발길이 닿는 곳을 그냥 놔두지를 못하는 것일까?). 동네 위성 사진을 보면 쥐가 파먹은 것처럼 산등성이를 깎아내고 들어선 흉물스러운 아파트들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아마 한국에 전쟁이 발발하면 가장 좋아할 사람 중 하나가 대형 건설회사 사람들일 것이다).

난개발로 야금야금 숲이 사라지고 산이 조금씩 조금씩 깎이는 것도 슬프지만, 숲과 산이 사라져도 슬퍼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더더욱 슬프다. 내가 아는 외국의 환경 보호론자들이나 그것을 강력하게 지지하는 사람들이 어린 시절을 숲과 가까운 곳에서 보내거나, 도시에 살더라도 방학 등 틈틈이 여유가 있을 때마다 할아버지나 외할머니 농장 같은 숲으로 둘러싸인 친척 집으로 놀러 가 많은 시간을 보냈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그리고 한국의 도시인이 살아온 팍팍한 환경을 생각하면, 도시인이 숲이 사라져도 슬퍼하지 않는 것을 두고 마냥 그들만을 탓할 수도 없다. 그들에겐 숲은 그저 시간적 여유와 경제적 여유를 누리는 것을 과시하거나 자기만족에 빠질 수 있는 수많은 선택지 중 하나일 뿐이다. 단골 술집이 문 닫으면 다른 술집을 찾아내듯, 어제 찾아간 숲이 사라지면 다른 숲을 찾아가면 그만이다. 뜨겁게 사랑하는 연인 사이라도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게 마련인데, 숲이라고 별수 있나. 음흉한 도시는 딸이 부모 마음에 안 드는 남자와 사귀지 못하게 훼방 놓는 밉상스러운 부모처럼 우리를 점점 더 숲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있다. 숲의 소중함을 모르고 자란 사람에게 단지 지루한 설교처럼 들리는 교육만으로 사라져가는 숲을 보고 슬퍼하게 만들 수는 없는 것이다.

제4의 침팬지

이제 우리는 ‘제4의 침팬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제3의 침팬지’, 즉 지금의 호모 사피엔스가 자멸의 길을 걷다가 끝내 도태된다면, 언젠가는 그 빈자리를 다른 종이 채울 것이고, 그 새로운 종은 현재 침팬지에서 갈라져 나온 종이거나, 아니면 인류의 멸종에서 운이 좋게 살아남은 소수의 인류가 진화한 종일 수도 있다. 어찌 되었든 이 새로운 종은 침팬지와 유전적으로 가까울 것이 틀림없기에 그들을 ‘제4의 침팬지’라 부른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렇다면, 그들도 우리와 같은 실수를 되풀이할까?

만약 ‘제4의 침팬지’가 탄생한다면 그 시기는 ─ 우리가 공통 조상으로부터 한쪽은 침팬지, 한쪽은 인류로 분기해 온 시기를 고려하면 ─ 인류가 멸종한 후로부터 최소한 600~800만 년 이상이 될 것이고, 그렇게 긴 시간이라면 인류가 남긴 자부심과 오만함으로 빛났던 문명의 흔적은 모래성 무너지듯 깡그리 사라져 버린 후일 것이다. 다만 인류의 유골이나 인류가 사용하던 단단한 도구 정도는 우리가 오스트랄로피테쿠스 화석이나 원시인의 석기 유물을 종종 발견했던 것처럼 화석 형태로 남을 수도 있겠다. 그때가 되면 ‘제4의 침팬지’의 고인류학자는 ‘제3의 침팬지’의 유명한 고인류학자인 도널드 조핸슨(Donald Johanson)이 그랬던 것처럼 ‘루시(LUCY)’를 발견하고 하늘을 날아갈 듯이 기뻐할까? 물론 확률은 지극히 낮지만, 그 ‘루시’가 당신이 될 수도 있고, 혹은 당신의 딸이나 손녀가 될 수도 있는데, 그것이야말로 ‘제4의 침팬지’ 세계에서는 신줏단지 모시듯 박물관에 보관되어 세상의 이목을 끌게 될 것이니 가문의 영광이 따로 없다.

그렇다면 ‘제4의 침팬지’는 우리의 고인류학자들이 연구했던 것처럼 오직 화석 증거만을 가지고 ‘제3의 침팬지’가 왜 멸종했는지를 밝혀야 하는데, 우리가 네안데르탈인의 멸종 원인에 대해 학계의 합의를 끌어내지 못하고 여전히 추측만 하는 것처럼 그들도 ‘제3의 침팬지’가 멸종한 이유를 영영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우리가 남긴 도구들이 석기 시대 도구들보다 꽤 진보했다는 점에서, 특히 생분해되지 않는 스티로폼을 발견한다면 그들은 우리가 여타 동물과는 다르게 고도의 산업 문명을 이루며 살아갔다는 점에 다소 놀라게 될 것이고, 이것은 문명의 진보를 이룩한 종도 여차하면 멸종할 수 있다는 확실한 충고로 작용할 수도 있다. 만약 그들이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는 것에 있어서 우리보다 좀 더 겸허하고 슬기롭다면, 이러한 발견은 우리와 같은 전철을 걷지 않도록 문명의 방향을 전환할 수 있는 하나의 이정표로 작용할 수도 있겠지만,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는 것에 있어서 우리와 다를 바 없이 오만방자하다면 그들 역시 자멸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반면에 인류 최후의 순간에서 살아남은 소수가 진화해서 탄생한 ‘제4의 침팬지’라면 ‘제3의 침팬지’의 멸종에 관한 이야기는 대대손손 전달되어 신화, 전설로 남거나, 혹은 종교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될 것이니, 앞선 경우보다 과거에서 교훈을 얻을 확률은 좀 더 긍정적이다. 그렇더라도 한 시대를 기록한 역사가 고작 몇천 년 만에 SF영화 같은 판타지로 진화해 신화와 전설로 불리는 마당에, 그리고 ─ 신화나 전설 시대의 역사처럼 ─ 구술이 아닌 필사 작업으로 이어져 온 성경조차 고작 몇백 년 만에 원본으로부터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고려해보면, ‘제4의 침팬지’로 진화하고 나서 수천수만 년 후에 교훈이 될 만한 ‘제3의 침팬지’의 이야기가 과연 얼마나 남아 있을지 의문스럽다.

어쩌면, 문명의 진보가 그 문명의 진보를 이룩한 종을 물귀신처럼 붙잡고 늘어지다가 결국 자멸로 이끄는 것은 진화의 법칙상으로나 도리상으로나 당연한 귀결일 수도 있다. 진화의 법칙상으로는 개체 수를 억제하는 요인이 없을 때 생태학적 자살이 발동할 수 있다는 자연법칙이, 도리상으로는 인류가 그동안 의도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멸종시킨 무수한 종들에 대한 인과응보다.

만약 문명의 진보가 그것을 이룩한 종의 자멸을 불러일으킨다는 법칙이 모든 우주에 통용되는 물리학 이론처럼 불멸의 법칙이라면 지구에 외계인이 찾아오지 않는 것도 설명이 된다. 그들은 지구를 찾아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 찾아올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구를 찾아올 정도로 고도의 과학 기술을 발전시키기 전에 (언젠가의 우리처럼?) 자멸하고 말았을 테니까.

과학적 글쓰기의 모범

『제3의 침팬지(The Third Chimpanzee: The Evolution and Future of the Human Animal)』는 이후 출판된 『문명의 붕괴』처럼 과학적 글쓰기의 모범이 되는 역작이다. 과학적 엄밀함과 저자 재레드 다이아몬드(Jared Diamond)의 논리적 사견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매끄러운 문맥은 독자의 이해를 끌어올리고 호기심을 유발하기에 부족함이 전혀 없다. 다만 『제3의 침팬지』가 『문명의 붕괴』보다 젊은 시절에 완성한 책이라서 그런지 다소 거칠게 밀어붙이는 듯한 문장은 인간적으로나 지적으로나 아직 완숙하지 못한 젊은 학자의 앳된 모습을 떠오르게 한다. 하지만, 과감하게 자신의 논지를 펼치며 인류에 도전하는 모습에서는 인류의 어두운 미래를 예지한 한 젊은 학자가 자신의 모든 지적 역량을 쏟아부어 기필코 변화를 일으켜 보겠다는 뜨거운 열정과 남다른 의지가 느껴진다.

과학적 글쓰기의 모범이 될 만큼 이해하기 쉽고 읽는 재미도 쏠쏠한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책은 과학적 호기심을 조금이라도 품은 모든 독자에게 꼭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사실 내가 보기엔 한국 과학자가 쓴 책은 팸플릿처럼 너무 쉬워 학문적 깊이가 없거나, 대학 교재처럼 학문적 서술로만 가득 찬 딱딱하고 졸리는 책 중 하나인 경우가 다반사다. 중간을 기회주의자로 몰아세우는 한국 특유의 극단적인 흑백 논리 성향 때문인지, 적당히 학문적 깊이를 갖추면서도 대중이 읽기에 부담스럽지 않은 잘 쓰인 과학 도서가 (내가 아직 발견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없다는 것이 무척 아쉽다. 내가 아는 것을 그것을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생각하면, 그것은 보통 사람을 쉽게 이해시킬 만큼 학문이 깊지 못해서일 수도 있다. 혹은, 평소에 전공 서적이나 논문 외에는 문학적 교양을 쌓을만한 책은 읽지 않아서일지도 모른다. 또는, 일반인을 겨냥한 책을 쓰는 것은 학자의 품위를 떨어트리는 일일 뿐만 아니라 경박한 상업주의라는 그릇된 편견에서 비롯한 것일 수도 있다. 과학이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지를 생각하면, 학문을 오직 그들만을 위한 전유물이나 밥그릇 정도로만 생각하는 그들의 편협한 사고방식은 우물 안 개구리의 망령된 생각이다.

아무튼, 내가 재레드 다이아몬드나 데이비드 쾀멘(David Quammen), 닉 레인(Nick Lane), 브라이언 그린(Brian Randolph Greene) 등의 책을 적극적으로 추천하는 이유는 이해하기 쉬우면서도 적당한 학문적 깊이와 문장삼이(文章三易)까지 갖춘 훌륭한 과학 도서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제3의 침팬지(The Third Chimpanzee)』에는 사람이 사람이게 하는 요소로서 내가 앞서 간략하게 언급한 것들 외에도 보물상자 같은 엄청난 이야깃거리가 들어있다. 성 선택, 간통, 폐경, 인종, 흡연, 마약, 혼외정사 등 이 모두가 단어만 들어도 코흘리개 아이가 막대사탕을 보고 침을 흘리듯 호기심의 뇌수를 흘리기에 충분하다. 다만, 이 책의 메시지가 단맛만 빼먹고 내버리기에는 너무나 충격적이고 묵직하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사람이 사람이게 하는 요소는 흥미를 유발하는 과학적 소재이기도 하지만, 인류를 파멸로 이끌 수 있는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래서 책을 읽고 인류의 미래에 대해 일말의 두려움을 느끼며 걱정하는 사람이라면, 조금이나마 양심이 남아 있는 독자일 것이며,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면 ─ 과거 과학이 발달하지 못한 시대의 많은 민족이 다른 종의 멸종을 일삼았던 것을 무지로 변명할 수 있었던 것에 반해 ─ 더는 무지로 변명할 수 없는 모르쇠와 철면피로 대량 멸종을 수수방관할 수 있는 사람이다. 라고 생각하는 것은 황당무계한 비약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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