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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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엄청나게 가깝지만 놀라울 만큼 낯선 | 스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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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엄청나게 가깝지만 놀라울 만큼 낯선 | 스위즈 | 창의력 부족을 민족성에서 찾다

이 책을 쓰게 된 목적은 전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는 중화민족의 후손들이 자신들의 사고습관을 알고, 그것의 득실을 이해하여 다른 각도로 세상을 바라보길 바라서다. 그것을 토대로 지혜를 넓히고 경쟁력을 높여 인류의 과학 문화 발전에 공헌하길 바라서다. (『중국, 엄청나게 가깝지만 놀라울 만큼 낯선』, 6p)

책을 읽고 보니 책 제목이 눈에 거슬리다

오늘 리뷰하는 책의 한국어판 제목은 부제까지 포함하면 책 제목치고는 무지하게 긴 『중국, 엄청나게 가깝지만 놀라울 만큼 낯선: 의외로 낯선 중국 문화와 사유의 인문학』이지만, 원제는 이보다는 훨씬 간략한 ‘中國人的邏辑’이다. 구글 번역이 아니라 바이두 번역을 이용하여 한국어로 번역하면 ‘중국인의 논리’다. 간혹 외국책이나 외국영화의 제목을 한국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원제나 작품의 내용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듯한, 그래서 원제와 동떨어진 감이 없지 않은 한국어 제목이 탄생하곤 하는데, 이 책의 제목도 그런 생뚱맞은 제목 중 하나라고 말하고 싶다. ‘중국인의 논리’라는 제목이 어떤 우여곡절을 거쳐 『중국, 엄청나게 가깝지만 놀라울 만큼 낯선』으로 재탄생했는지 그 오묘한 이치를 나로서는 알 수 없지만, 책을 읽고 나면, 그래서 내용을 알고 나면 한국어 제목이 상당히 놀라울 만큼 낯설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별로 의미심장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책 내용을 성의있게 암시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기차처럼 길어 보이기만 하는 제목은 한국인의 입장을 고려해서 나온 듯한 추측이 들기는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 영화나 책이나 ─ 가능한 한 원제를 충실하게 반영하는 제목을 선호하는 나로서는 원제는 직역하고, 현재의 한국어 제목을 부제로 덧붙이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즉, 『중국인의 논리: 중국, 엄청나게 가깝지만 놀라울 만큼 낯선』처럼 말이다.

낯설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고

뜬금없이 되지도 않는 억지를 부려가며 제목에 시비를 건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중국, 엄청나게 가깝지만’이라는 말에는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말이지만, 그 뒤에 붙은 ‘놀라울 만큼 낯선’이라는 말은 독자의 소양에 따라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중국이 낯설게 느껴졌을지 몰라도 이 책을 읽고 나서는 어찌 된 일인지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중국의 민족성에서 놀랍게도 한국의 민족성과 유사한 면을 많이 발견하면 할수록 더욱더 중국인이 가깝게 느껴진다. 물론 독자의 가치관이나 쌓아온 역사 지식이나 살아온 경험에 따라, 그래서 한국의 민족성을 어떻게 보고 이해하는지에 따라 이와는 반대로 작용할 수도 있다.

즉, 이 책을 읽으면서 중국의 낯선 모습에 더 많은 의미를 둘 수도 있고, 이 책의 한국어 제목도 그러한 연유로 지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최소한 나는 저자 스위즈(石毓智)가 조목조목 일목요연하게 지적한 중국의 민족성에서 중국인의 특성뿐만 아니라 한국의 민족성 또한 발견할 수 있었다는 점이, 그래서 어떻게 보면 두 민족이 쌍둥이처럼 보이기도 했다는 점이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물론 같은 부모, 같은 환경 아래에서 서로 사이좋게 성장한 화목한 쌍둥이라기보다는 서로 다른 부모와 환경 아래에서 자라면서 일찌감치 사이가 틀어져 어쩌다 만나기만 하면 원수처럼 으르렁거리는, 일란성보다는 이란성 쌍둥이에 더 가깝지만 말이다. 한국인의 유전자는 중국 남방에 사는 한족보다는 북방에 사는 조선족이나 만주족과 더 가깝다고는 하지만, 문화 유전자인 밈(Meme)으로만 따지면, 중국 문화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는 점에서 문화적으로도 이란성 쌍둥이 정도는 될 것 같다.

중국의 민족성에서 발견한 한국의 민족성

그렇다면 이쯤에서는 『중국, 엄청나게 가깝지만 놀라울 만큼 낯선』에서 스위즈가 통찰한 전 세계 중국인을 망라하는 민족성에서 한국인의 민족성과 유사한 점을 (이것은 순전히 내 주관적인 관점이다!) 꼽아보는 것이 순리일 것이다. 그 첫 포문은 먹는 행위로 세상을 보는 것이다. 중국인처럼 ─ 나를 포함한 ─ 한국인도 먹는 모습으로 그 사람의 인품을 가름하거나 첫인상을 결정하는 사람이 꽤 있다. 누군가와 첫 식사 자리를 같이하는데 먹는 둥 마는 둥 깨작깨작 밥을 먹는 사람, 심술 난 아이처럼 편식하는 사람, 음식을 터무니없이 남기는 사람, 밥 한 알도 남기지 않고 맛있게 먹는 사람 등 이들의 첫인상은 같을 수가 없다. 또한, ‘밥은 잘 먹고 다니니?’, ‘밥 먹었어?’, ‘식사하셨어요?’ 등은 가족, 친구, 지인, 혹은 처음 만난 사이에서도 안부를 묻고 인사를 나눌 때 가장 흔히 주고받는 말이다. 옛 시절을 회상하며 추억의 음식에 집착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중국인은 날짐승이나 들짐승을 봤을 때 가장 먼저 '잡아먹어야겠다'라는 생각부터 한다고 하는데, 한국인이라고 크게 다를 것 같지는 않다. 아무튼, 그런 연유로 중국인은 빈 땅을 보면 먹을거리를 심어야겠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서양인은 무엇을 심어야 아름다운 환경을 만들 수 있을지를 고민한다. 그렇다면 한국인은 어떨까? 아마 요즘 사람들은 빈 땅을 보면 집을 짓거나 상가를 올려 세를 받아먹을 생각을 할 것 같다. 동양화의 매력은 여백인데, 빈 땅을 그냥 놔두질 못하니 도시 공간의 여백이 모두 죽어가는 덕분에 그곳에 사는 사람들도 숨 막혀 죽을 지경인 것이 한국의 실정이다.

두 번째로 살펴볼 것은 교육 부분이다. 스위즈는 중국의 교육 시스템이나 부모는 개성이 강하고 독립적이거나 권위와 전통에 도전하는 아이보다는 기존 질서에 순응하고 안정적인 삶을 추구하는 평범한 사람을 길러낸다고 (한국이랑 너무 비슷하지 않은가?) 말한다. 부모는 자식이 사회에 큰 공헌을 하기보다는 평생 안정되고 편안하게 살기를 바라거나, 아니면 자녀의 성공이나 출세를 등에 업고 고개를 빳빳이 들고 다닐 수 있는 위세 등등한 부모가 되기를 꿈꾼다. 그래서 중국이나 한국의 젊은이들은 창업이라는 모험과 도전의 길로 들어서기보다는 대기업이나 공무원이나 교직 등 안정된 울타리 안에서 일하기를 바란다. 또한, 지나치게 기초와 준비를 강조하는 나머지 창업과 혁신에 가장 필요한 모험 정신과 기회를 놓치기 일쑤다.

이렇게 모험 정신이 부족한 상태에서 안정적인 것만을 찾는 데다가 모방 정신까지 투철하다 보니 가게를 열어도 뭔가 새로운 것을 모색하기보다는 장사가 잘되어 보이는 업종을 유행처럼 따라 하다가 결국 자멸한다. 그래서 한 중국인이 가게를 열어 돈을 엄청나게 벌면, 얼마 안 가서 다른 중국인이 같은 지역에 하나둘씩 같은 가게를 연다. 그런 식으로 제 살 깎는 경쟁이 시작되고, 다들 돈을 못 벌다가 결국은 하나둘 문을 닫는다. 스위즈는 이 이야기를 중국인의 특징을 보여주는 이야기라고 소개하는데, 한국도 남 따라 하기는 뒤지지 않는다. 1990년대 말 우리 동네에서 최초로 PC방을 개업한 입장으로서는 소름 끼치도록 공감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세 번째로 살펴봐야 할 것은 유교 문화에서 비롯된 폐해다. 직업에 대한 편견, 공정함에 대한 이해 부족, 어떤 일에 대해 옮고 그름을 따질 때 사람의 지위나 명성, 부를 보고 판단하는 관본위(官本位) 사상, 질서와 권위에 대한 복종을 미덕으로 여기는 전통, 지나치게 인내를 강요하는 사회 등 한때 유교를 광신했던 우리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구구절절한 말들이다.

마지막으로 살펴보고자 하는 바는 직관적 사고방식이다. 스위즈는 중국의 과학기술이 발전하지 못한 이유로 중국인의 수많은 발견이 직관적 관찰에만 그치고, 이것을 계승하고 발전시킬 논리적이고 수학적으로 사고하는 부분이 약했다고 분석한다. 그로 말미암아 문학, 역사, 철학 방면의 직관적 사유 분야는 나름 발전할 수 있었지만, 번뜩이는 생각이나 제품이 적지 않았음에도 추상적 • 논리적인 과학 체계가 만들어지기 어려웠던 까닭에 현대 과학기술 분야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거의 없다고 지적한다. 중국인이 논리적이고 추상적인 사고가 발달하지 못하고 대신 직관적 사유가 발달한 근원에 대해 스위즈는 기호화되기 어려운 한자의 특성을 언급한다. 세계적인 발명이라 할 수 있는 측우기나 금속활자를 개발할 능력이 있었음에도 이런 발명품들을 통해 어떤 과학적인 이론이나 기술 체제를 확립하여 지속적인 개량과 발전으로 이어지지 못한 나머지 이제는 중국에까지 뒤처질 위기에 처한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큰 일리 있는 분석이다.

이밖에도 낯선 이를 차갑게 바라보는 폐쇄성을 그대로 드러내 주는 담장, 울타리 문화, 성격적 특성과 습성을 지역화하는 경향, 쉽게 감동하고 쉽게 감정에 휩쓸리는 냄비 근성, 자신의 잘못을 어떻게든 상대의 잘못으로 덮어보려는 행동, 개인의 능력과 도덕성을 집요하게 연결 짓는 것, ‘나 하나쯤이야.’ 하는 이기주의 등 중국인의 민족성에서 우리의 새가슴을 뜨끔하게 할 항목은 한둘이 아니다. 반면에 짝퉁에 지나칠 정도로 관대한 것과 목숨보다 더 체면을 중시하는 풍조, 오직 돈으로만 성공을 판단하고 돈만 있으면 귀신도 부릴 수 있다는 돈에 대한 맹신과 지나친 탐욕, 불신이 난무하는 교육계, 연줄과 인맥이 없으면 아주 간단한 일조차 복잡하게 변해버리는 이상한 사회 등 어딘지 모르게 우리와 비슷하면서도 이질적인 성향을 보여주는 중국은 놀라울 만큼까지는 아니더라도 충분히 낯설 수 있다.

Chinese Logic by Shi Yuzhi
<예전 청계천 모습이 이랬을까?>

창의력을 죽이는 중국인의 민족성

원제 ‘中國人的邏辑’를 직역한 그대로 중국인의 논리와 사고방식을 허심탄회하게 토로하는 한편, 그로 말미암은 부작용과 폐해를 진지하게 질책하는 책이다. 부끄럽게도 남의 험담을 듣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고, 그 대상이 우리를 위협하는 경쟁 상대라면 즐겁다 못해 고소하기까지 하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이러니까 중국은 더는 발전할 수 없는 거야’, ‘이래서 중국은 안 되는 거야’ 등의 안일한 생각을 품는 안일한 사람이 있을 수 있겠으니, 이 책은 그런 안일한 한국 독자들의 안일한 기대와 희망을 충족시키고자 쓰인 안일한 책은 절대 아니다. 그런 생각으로 가볍고 만만하게 이 책을 읽은 나머지 오히려 중국을 더 얕잡아 보는 우를 범하게 될까 봐 걱정이 태산이다. 중국을 상대해야 하는 우리에겐 부담스럽게도 『중국, 엄청나게 가깝지만 놀라울 만큼 낯선』은 중국인의 습관성 사고의 폐단과 이해득실을 따져보고 반성하기 위해 쓰인, 지혜롭고 근면한 민족인 중국인을 각성시켜 한 단계 더 나아가고자 하는 원대한 포부를 품고 쓰인 책이다. 그렇다고 중국인이 당장 이 책을 읽고 뜨거운 반성의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깊은 감명을 받은 나머지 ‘아, 이래선 안 되겠구나’라고 뉘우치면서 곧바로 자기성찰의 길로 이어질 거라는 기대는 성급한 판단이지만, 체면에 죽고 체면에 사는 중국인 스스로가 외부 세계에 드러내기 껄끄러워하는 민낯을 만천하에 공개하고 그럼으로써 각성을 촉구한다는 것은 마치 루쉰이 살아 돌아온 것 같은 착각을 일게 할 정도로 섬뜩하면서도 충격적인 일이다.

스위즈는 총 10장에 걸쳐 중국인의 사고방식을 논하면서, 그리고 유구한 문화와 전통에서 현대 사회에 맞지 않거나 오히려 현대 사회 발전에 해가 되는 민족성의 단점들을 대중이 알기 쉽게 요목조목 따지면서 일관되게 강조하는 능력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창의력이다. 스위즈는 ‘왜 오늘날의 뛰어난 과학기술은 중국인과는 아무런 인연이 없는가?’라는 질문의 답으로 중국인의 부족한 창의력을 제일로 꼽고 있다. 중국 민족성의 단점들을 총 10장에 걸쳐 나열한 이유도, 뒷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천박한 호기심이나 만족시켜줄 가십거리를 제공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중국인의 민낯을 드러내어 전 세계인의 비웃음거리로 만들기 위해서도 아니다. 바로 중국인에게 있어 가장 치명적인 단점이라 할 수 있는 창의력이 부족한 근원을 중국인의 민족성에서 찾고자 함이다.

정말로 창의력의 부족이 민족성에 있고, ─ 쉽지는 않겠지만 ─ 창의력에 해가 되는 민족적 특성을 점차 개선해나갈 수 있다면, 그리고 중국이 정말 그럴 의도와 의지가 있다면 이 책은 중국인에게는 정말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잠재력이다. 스위즈의 바람대로 중국인이 각성과 반성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고, 고갈된 민주 의식도 싹이 터 그것을 토대로 인류의 과학 문화 발전에 공헌하는 방향으로 진보한다면야 천만다행일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겠지만, 지금처럼 공산당이 배출한 제3대 황제 시진핑을 필두로 고약한 공산당이 모든 걸 좌지우지한다면 우리에겐 득보다 실이 많을 것 같다. 중국의 어마어마한 경제력에 창의력까지 더해져 과학기술과 혁신 분야에서도 중국이 성큼 나아갈 수 있다면, 중국의 국가경쟁력은 세계 최고가 될 것이며, 그로 말미암은 전 세계적 여파는 상상하기조차 하기 싫을 정도로 충격적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무튼, 이 책이 지금의 중국에 당장 큰 영향을 끼칠 리는 없겠지만, 깨어 있는 중국인이 많을수록, 그리고 그들의 외침이 더욱더 커질수록 중국의 미래는 지금과는 사뭇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지도 모른다. 물론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인류에 유익한 방향으로만 나아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지만 말이다.

우리도 부족한 것이 창의력인데

의도적이지 않게도 이 책은 중국처럼 창의력에 목말라 허덕이는 우리에게 대한민국의 경제 발전사가 지나온 성장 지상주의의 씁쓸한 뒤안길을 다시금 뒤돌아보게 한다. 투기와 과대광고가 유행하는 것은 그 사회에 창조력이 부족함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우리 사회는 어떠한가? 중국인은 자연 앞에서 시나 노래를 지으면서 아름다운 문학을 얻었고, 유럽인은 자연 앞에서 거대한 돌의 이동 원리를 생각하여 새로운 과학 시대를 열었다고 한다면, 한국인은 자연 앞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고 그로 말미암아 무엇을 남겼나? 사고습관이 이러한 차이를 만들어낸다면, 한국인의 사고습관은 어떠한 논리와 이치에 맞물려 돌아가고 있으며 그것이 어떻게 우리 사회에 투영되고 있을까? 물론, 스위즈의 이 책처럼 ‘한국인의 논리’나 민족성을 분석한 책이 어딘가에 있겠지만, 막상 펼쳐보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스위즈의 책은 다른 나라 이야기니 그러려니 하고 읽을 수 있었지만, 내가 만약 중국인이라면 나의 속내나 치부를 끄집어내는 『중국, 엄청나게 가깝지만 놀라울 만큼 낯선』을 읽고자 한다면 상당한 각오 없이는 어렵지 않을까? 아마도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불편한 마음을 억누르는 인내심과 진정시킬 수 있는 냉정함이 꽤 많이 필요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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