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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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덕의 불운 | 불경스러운 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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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덕의 불운 | 사드 | 불순한 어른을 위한 불경(不經)한 동화

모두 미덕을 지키는 세상이라면 나 역시 당신에게 미덕을 권장하겠어요. 그러나 온통 썩어 빠진 세상이라면 오직 악덕 이외의 다른 것은 권하지 않겠어요. (p187)

당신은 항상 나에게 섭리를 역설하지만, 그 섭리가 질서를 좋아하며 나아가 미덕을 사랑한다고 누가 증명해 줘요? (『미덕의 불운』, p189)

무엇이 나를 ‘사드’에게로 인도했나?

결국, 읽고야 말았다. 나는 전문연구가가 아니면서 사드를 읽는 사람이라면 결코 그로부터 무사히 헤어나올 수가 없다는 아니 드 브륑(Annie Le Brun)의 경고도 무시한 채, 건방지고 오만불손하게도 사드의 책을 읽고야 말았다. 솔직히 말해 미친 듯이 솟구치는 호기심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것은 이미 녹슬 대로 녹이 슨 관능의 발로도 아니었고, 이미 식을 대로 식은 정염(情炎)의 불똥도 아니었다. 뼈가 사무치도록 쓸쓸한 나의 삶에서 오랫동안 잊혔던 쾌락을 어떻게든 되찾고자 하는 욕구불만도, 그 욕구불만이 드리운 그늘진 마음에서 비롯된 심연의 뭔가는 더더욱 아니었다. 사드를 읽고 싶다는 무엇으로도 형용하기 어려운 욕구를 굳이 하나의 단어로 꾸역꾸역 압축한다면, 그 단어는 다름 아닌 ‘파괴’다. 이 빌어먹을 세상을, 이 미친 세상을, 이 역겹도록 부조리한 세상을 맷돌에 간 콩처럼 가루가 되도록 으깨고 부수는 파괴적인 글쓰기를 몸서리치도록 느껴보고 싶었다. 느껴보고 싶다.

정당한 근거도, 증명된 실체도 없이 오랫동안 세상을 기만한 미덕 속에 숨은 위선, 가식, 허영을 모조리 파괴하는 짜릿함과 파괴 후 남은 영광의 잿더미 위에 다시 돋아날 찬연한 희망에 예속된다. 그렇게 해서라도 어리석었던 내 삶이 필연적으로 잉태한 절망과 회한의 늪에서 벗어난다고 믿고 싶다. 벗어나고 싶다. 이 지긋지긋한 세상, 이 빌어먹을 세상, 이 막돼먹은 세상은 사회의 섭리를 거부했다는 이유만으로 사드를 감옥에 가둔 것처럼 세상에 적응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나를 절망과 무능, 권태 속에 가둬놓았다. 그래서 이 순간만큼은 나는 사드가 되고 싶다. 나도 세상을 사정없이 뒤엎고 섭리를 무참히 짓밟는 파괴적인 글쓰기로 통한의 외침을 터트리고 싶다.

그러나 주지하듯 나의 글쓰기는 무디다. 무디다 못해 엉성하다. 엉성하다 못해 유치하기까지 하다. 시퍼렇게 날이 선 글쓰기를 통해 모든 구속을 속속들이 파괴하는, 악마도 울고 갈 정도로 사악하고도 사악한 사드의 광기가 오늘만큼은 너무나도 부러울 따름이다. 신내림을 받듯 사드의 광기를 발톱 때만큼이라도 물려받고 싶어 발작이라도 일으킬 지경이다. 그래도 난 포기하지 않고 글을 쓴다. 그것이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삶의 생산적인 요소이자 단 하나의 위안이다. 그 방증으로 오늘도 노트북 자판을 무심히 두드리며 리뷰를 쓰는 나를 발견한다(비록 짧은 글이지만, 이렇게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응어리진 뭔가를 토로하고 나면 기분이 한결 나아진다. 이것이 바로 ‘치료적 글쓰기’의 진정한 효과다).

사드, 그는 진정 미덕의 불행만을 말하고자 했을까?

불행하게도 오늘 나의 글쓰기의 대상으로 간택된 『미덕의 불운(Justine, Les Infortunes de la Vertu)』은 광기도 글쓰기를 통해 논리정연하게 발산할 수 있음을 보여준 사드(Marquis de Sade)가 그 논리적 광기의 시발점이자, 이후 작품들에서 펼쳐질 폭발적 글쓰기의 원류라 할 수 있는 작품이다. 19세기에 활동한 비평가이자 작가인 쥘 자냉(Jules Janin)이 사드가 감옥에서 미친 듯이 쓴 ─ 당시의 풍속으로는 너무나도 악마적인 ─ 이 책을 읽고 나서 심한 발작을 일으켰다는 실화가 심히 나의 호기심을 도발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현대인의 보편적 도덕성이 타락해서인지, 아니면 나의 도덕적 무감각이 유별난 것인지, 아니면 사전 지식(폴 브리겔리(Jean-Paul Brighelli)의 『불멸의 에로티스트 사드(Sade)』) 덕분인지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발작을 일으켜야 할 정도로 충격적이지는 않다. 누구의 지적대로 ‘지루한 반복’도 그렇게 심하지는 않다. ─ 이 책을 단지 성적 흥분제로 여기고 찾은 경박한 독자에게는 대단히 실망스러운 일이지만) 이후 작품인 『소돔의 120일(The 120 Days of Sodom)』이나 『쥘리에트(L'Histoire de Juliette, ou les Prospérités du vice)』에서 보여준 노골적이고 변태적이고 엽기적인 관능의 표현도 없다. 다만, 보편적인 감수성을 보유한 독자의 마음을 심란하고 불편하게 할 몹시도 불행하고 몹시도 불운한 가련한 처녀 쥐스띤느(쥐스틴)의 고통과 고난으로 가득한 여정만이 고해실의 신부처럼 덩그러니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미덕은 불행을 가져오고 악덕은 번영을 가져온다는 반사회적이고 대담무쌍한 통찰의 중심이자, 세상에 만연한 온갖 부조리와 부당함을 까발리고자 사드가 날린 직격탄이다. 미덕의 불합리를 폭로한 대가로 사드는 죽을 때까지 광인 취급을 받았으며, 샤랑통이라는 감호소(수용소)에서 그 광기 어린 영혼을 잠재움으로써 사드에 대한 유별난 사회적 관심에 합당한 죽음을 맞이했다.

사드에 대한 긍정적인 재평가는 1990년대로 들어와서야 실현된다. 그것은 그때까지 인류는 고지식하게도 현실과는 괴리된 미덕을 ─ 진심이든 마지 못해서든 ─ 꾸역꾸역 찬양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위태롭게나마 그럭저럭 유지되어 온 질서를 파괴할 것 같은 ‘미덕의 불합리’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인류는 사드에게 온갖 악담을 퍼부으며 역사적으로, 문학적으로 매장했다. 이런 사드의 작품이 현대에 들어와서 인정받는다는 것은 인류에게 있어 미덕이라는 것이 세상을 이해하고 경험하는 데 있어 절대적 진리가 될 수 없음을 뒤늦게나마 깨달았다는 뜻이다. 한편으로는 고전적인 미덕의 가치에 기반을 둔 이상주의의 포기이자, 그것을 대체할 새로운 기준이 적용된 미덕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이다. 강요된 미덕이 실재적인 삶에 가하는 부당함을 통렬하게 고발한 사드는 ─ 본의 아닐지라도 ─ 마치 파괴야말로 진정한 창조의 힘이라는 것을 깨우쳐주듯 미덕의 완전한 파괴를 통해 새로운 미덕이 창조될 빌미를 제공한 셈이다. 한마디로 병을 주고 약을 준 셈인데, 물론 사드는 자신의 작품이 이렇게까지 해석되리라고는 꿈에도 몰랐을 것이며, 나도 사드의 책을 이런 식으로 읽게 될 줄 역시 꿈에도 몰랐다(역시 꿈보다 해몽인가?). 미덕의 부정을 통해 새로운 미덕의 탄생을 은유하니 참으로 역설적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미덕의 화신인 쥐스띤느가 겪는 불행과 불운이 너무 충격적으로 다가온 나머지, 작품이 시작하는 곳에 사드가 애써 적어 넣은 다음과 같은 글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사람은 별로 없었나 보다.

최선을 다하여 미덕을 고수하는 착하고 마음씨 고운 여인을 짓누르는 숱한 불행과 또 한편 평생 동안 미덕을 경멸해 온 여인이 누리는 찬란한 행운을 동시에 묘사해야 된다는 것은, 의심할 나위 없이 잔혹한 일이다. 그러나 그 두 화폭에서 단 하나의 선이라도 태어날 수 있다고 한다면, 그러한 그림을 대중에게 제공한 행위를 구태여 나무랄 수 있겠는가? (『미덕의 불운』, p9)

미덕의 불행과 악덕의 번영이 역설적이게도 새로운 선(善)을 낳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 글은 사드가 출판 이후에 빗발치듯 쏟아질 비난에 대비해서 변명거리로 심어둔 것일까? 아니면 이 작품 저의에 담긴 사드의 진심일까? 이것이 순탄한 앞날을 위한 변명거리라면, 사드가 아직 세상의 눈치를 봐야 할 정도로 자신의 광기적 글쓰기에 온전히 휩싸이지 않았다는 뜻이다. 사드의 진심이 담긴 글이라면, 당대, 그리고 사후 악덕의 화신으로 손가락질받아온 사드임을 고려해 볼 때 조금은 뜻밖의 일이다.

Les infortunes de la vertu
<John Martin / Public domain>

어른을 위한 불경스러운 동화

사실 이 소설의 불경스러운 면은 이후 ─ 아직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 사드가 집필한 작품들에서 보여줄 방탕하고 변태적이고 사악하고 엽기적인 글쓰기에 비하면 약과다. 『불멸의 에로티스트 사드(Sade)』에 인용된 사드의 글 몇 문장만 살펴봐도, 자유분방한 글쓰기의 극치가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주고도 남는다. 그것을 읽는 것은 누군가에게는 끔찍스러운 고통을, 누군가에게는 이제껏 맛보지 못한 희열을 안겨줄 수도 있겠지만, 어찌 되었든 모두에게나 ─ 모욕적이든 신선하든 ─ 충격적인 경험일 것이라는 것쯤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다만, 무척이나 아쉬운 것은 사드 불경소설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는 『미덕의 번영』과 『소돔의 120일』은 동네 도서관에 없다는 것! 그래도 훗날 기회가 되면 꼭 읽어야 할 것이다.

사드의 『미덕의 불운』은 마치 불순한 어른을 위한 암흑 동화 같은 기분으로 읽혔다. 분별없는 미덕의 유해함을 신랄하게 조롱하는 악인들의 방종스러운 궤변은 마치 작금에까지 소멸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 악덕의 번영을 역설하는 것 같아 사뭇 통쾌하게까지 느껴진다. 바보스럽게 보일 절도록 미덕을 찬양하고 고집할수록 더더욱 가혹해지는 쥐스띤느의 불행과 고난, 그리고 그 비극적인 결말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리 발악해도 마치 땅바닥에 단단하게 고정된 나사못처럼 제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현대인과 그들을 삼켜버린 불행의 굴레를 보는 것 같아 소름이 끼친다. 누렇게 시들어 죽어가는 덕 있는 사람들보다는 번영을 구가하는 새파란 악인들 측에 합세해야 할지, 아니면 쥐스띤느가 믿었던 것처럼 ─ 설령 그것이 거짓이더라도 ─ 사후 세계에서 받을 보상을 위안 삼아 현세의 불행과 고통을 인내해가며 끝끝내 미덕을 고집해야 할지는 오로지 자신의 선택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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