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글쓰기 혹은 글쓰기 너머의 인간 | 김영민
선택의 기로 앞에서 망설이게 만든 책
다독이 나에게 준 능력이 하나 있다면 책 선택에 있어서 만큼은 믿을만한 안목이다. 눈깔이 술에 취한 사람처럼 흐리멍덩하건 지느러미가 가문 논처럼 쩍쩍 갈라지건 아랑곳없이 순전히 장사꾼의 사탕발림에 속아 생선을 사던 새색시라도 장보기를 거듭할수록 가격도 저렴하면서도 신선하고 품질 좋은 생선을 고를 수 있는 꼼꼼하고 깐깐한 안목을 으레 터득하듯 책도 읽으면 읽을수록 책 선택에 관한 나름의 안목을 키워나가게 된다. 죽을 때까지 읽을 수 있는 책이 한정된 만큼 독서를 거듭할수록 책 선택은 신중해지고 까다로워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나의 선택이 최상이라는 말은 아니다. 나처럼 그저 알량한 호기심을 만족시키려는, 혹은 어정쩡하게 허송하는 것이 아까워 책을 읽는 사람이 책을 고른다는 것은 식당에서 ‘오늘은 뭘 먹을까?’ 하는 팔자 좋은 고민일 따름이다. 고로 최상의 선택으로 내 입맛에 맞는 최상의 책을 찾으면 족하다. 음식을 맛보듯 책을 맛본다고 할까나?
아무튼, 이젠 얼추 책 제목만 봐도, 혹은 (제목만으론 책의 진가나 책과 나의 궁합이 찰떡인지 개떡인지 아닌지를 판별하기 어렵다면) 몇 페이지를 흩어보면 족집게 도사 같은 높은 적중률로 내 취향과 성정에 옹골지게 들어맞는 책을 발견하는 경지에 올랐다. 누군가에겐 일견 자랑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삽질을 오래 하면 손에 굳은살이 박이는 것과 비슷한 이치이므로 결코 자랑은 아니다. 뇌를 가진 사람이라면, 그리고 그 뇌에 읽고 쓰는 문명의 기술을 갖춘 사람이 그저 독서 편력을 꾸준히 이어간다면, 제2의 본성처럼 자리 잡게 되는 편견 비슷한 필터링이다.
겸손의 미덕으로 똘똘 뭉친 내가 서두에 이런 자랑 같지 않은 자랑을 늘어놓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김영민의 『인간의 글쓰기 혹은 글쓰기 너머의 인간』은 근래에 보기 드물게 즐겁고도 초조한 선택의 고심을 안겨준 책이기 때문이다. 살까 말까 망설이는 손님처럼 도서관 책장 앞을 서성이는 난 수수께끼를 떠안은 탐정처럼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뭔가 격조 있어 보이는 양장제본에 두툼한 스테이크를 떠올리게 하는 책 두께, 그리고 마치 나를 겨냥한 듯한 ‘글쓰기’라는 주제는 먹음직스럽게 보였지만, ‘인문학’이라는 분류 기호가 선택의 갈림길에서 멈칫거리는 나의 멱살을 붙잡고 늘어졌다. 마치,
“이봐, 이래 봬도 나는 명색이 인문학이라고. 너처럼 책 좀 읽었다고 우쭐대는 시정잡배 같은 녀석이 넘겨볼 수 있는 만만한 책이 아니라고!”
라고 일갈하는 것 같았다.
아마도 많은 사람이 이런 호통 같지 않은 호통에 기겁하고 말았나 보다. 도서관에서 제공한 대출 통계를 보면 이 책을 대출한 사람은 당당하게도 내가 첫 번째다.
새것 같은 산뜻한 빛을 은은하게 발산하면서도 한편으론 죽은 듯이 도서관 선반에 진열되어 있었던 통절한 사연을 나름대로 간직하고 있었던 책이다. 아무의 손때도 타지 않은 순결, 하지만 그 순결은 인문학에 대한 싸늘한 외면과 두꺼운 책에 대한 냉담한 무시에서 오는 무덤 같은 고독과 외로움이 빚어낸 슬픈 운명과 다름없다. 그렇게 누군가는 좋은 책을 놓치곤 한다.
읽히지 않는 글, 그리고 내 블로그 내 글쓰기의 신떨음
하지만 무릇 진지하게 독서를 일궈나가는 사람이라면 마냥 소설 같은 가벼운 책만 볼 수는 없다. 라면 같은 간편식만 먹어서는 건강한 육체를 유지하기 어렵듯 (라이트 노벨 같은) 가벼운 책만 읽어서는 건전한 독서력을 유지하기 어렵다. 때론 자신의 지적 한계에 부딪혀 보겠다는 손해 볼 것 없는 도전을 결행해서라도 진중하고 깊이 있는 독서를 익힐 필요가 있다. 도전 없이는 비상도 없고 비상 없이는 계발도 없다.
보통의 소설에 비하면 상당히 긴 시간을 들여 김영민의 책을 완독했지만, 그렇다고 내가 이 자리에서 ‘이 책은 어떻다’라고 왈가불가할 수 있을 정도로 정수를 심득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아마도 이런 몰이해의 부덕을 숨기려는 우울한 방편에서 내 리뷰에선 스포일러를 자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리라). 어차피 책의 뜻이나 내용을 얼버무리듯 개괄하는 것이 내 책 리뷰의 요지는 아닌 이상 굳이 그런 것에 집착할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이 책을 앞에 두고 선택의 갈림길에 있는 칭찬할 만한 고민에 봉착한 독자들에게 그저 ‘수련을 위해 읽으라!’ 하고 내팽개치듯 말한다면 너무 몰인정하다.
사실 저자 김영민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둘째치고 『인간의 글쓰기 혹은 글쓰기 너머의 인간』을 읽으면서 종종 사전을 찾아야 했을 정도로 읽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책이다. 모르는 단어 하나하나 사전을 참고하다 보면 리듬감 있게 단어를 쫓아가던 눈동자의 맥도 끊기고 덩달아 사고의 흐름도 끊긴다. 나 같은 아둔한 독자로서는 곱씹고 곱씹어야 겨우 뜻을 깨우치고, 그럼으로써 겨우 맥락을 이해할 수 있는 이런 학구적인 책을 앞에 두고 영어사전도 아닌 국어사전이나 뒤지고 있으니, 진전이 있을 리가 없다. 작가들의 출중한 어휘력이 부럽고 얄밉지만, 그 덕분에 몰랐던 단어를 배워가는 작은 앎의 즐거움을 무시할 수는 없으니 무식한 자의 애간장만 애꿎게 녹아내린다.
저자는 읽히지 않는 글이란 이미 글이 아니고, 인문학의 글은 읽히지 않는 바로 그 자리에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한다면서 한국에서 자리를 잡지 못한 인문학(그리고 논문)의 암담한 현실을 통렬하게 고발한다. 사전 없이는, 그리고 사전에도 없는 망측하고 난해한 단어로 일독을 방해하는 작가의 전문화되고 타성화된 문장 구사도 언중이 인문학을 외면하는 요소일 수도 있지만, 나처럼 책 좀 읽었다고 거들먹거리는 사람조차 사형 선고라도 받은 듯 풀이 죽은 채로 ‘사전’ 운운하며 독해의 억울함을 하소연할 정도로 허술한 우리의 읽기와 작문 교육이야말로 근원적인 문제다. 세대가 거듭될수록 어휘력이 떨어진다는 것은 소중한 우리 말이 하나둘 멸종된다는 뜻이다. 물론 이것이 오직 나만의 문제라면 천만다행이지만 말이다.
삶은 복잡하고 다사다난하므로 이와 통풍하는 인문학의 글쓰기가 응당 단순함에서 유래하는 쉬운 글쓰기가 되어서는 안 되지만, 고작 독서라고 해 봤자 라이트 노벨 같은 삼류만 읽는 편식으로 좀처럼 독해력의 한계를 시험하려고 하지 않는, 그래서 쉽고 단순한 것만을 찾는 독자들의 지적 무기력 • 지적 편협함 • 지적 나태함도 인문학을 말살하는 전범 목록에 올려야 할 것이다. 어쩌면 저자의 지적대로 지금은 모든 것이 너무나 나뉘고 소외되어, 그래서 생각 따로, 말 따로, 글 따로, 삶 따로인 우리의 체질과 언어와 버릇과 전망이 인문학의, 그리고 앎과 삶의 통풍이 드러내는 인간의 조건과 한계에 모처럼 반응하려는 우리 모두의 적일지도 모른다.
죽어야만 깨우칠 것 같은 일리(一理)를 위해서
천 권이 넘는 독서 중 (교보문고 기준으로) ‘인문’으로 분류할 수 있는 책은 50권이 채 안 된다. 그중 리영희와 박이문과 주영하의 책 정도가 한국인이 한국의 현실을 소재로 해서 쓴 (인문학의 범주가 모호해 이런 표현은 어불성설이지만) 제대로 된 인문학이라 꼽을 수 있다. 나의 독서 편력에도 여지없이 한국 인문학의 어두운 명운이 드리우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의 편식이 문제일까? 편식하게 만드는 학자들이 문제일까? 아니면 경박하고 한시적인 처세술이나 헛된 꿈을 불어넣는 ‘자기 계발’이라는 장르에 얄팍한 상혼을 불어넣은 다음 철학이나 인문학으로 둔갑시켜 인기도서 대열에 올려놓고 언중을 현혹하는 저급한 출판사와 저급한 작가들이 문제일까? 알 수가 없다. 달고 기름진 것만 찾듯 쉽고 자극적인 책만 찾는 독자도 문제고, 논문중심주의의 병폐에서 헤어 나오려고 하지 않고 삶과 학문을 따로 놀도록 방치하는 학자들의 독선적인 태도도 문제고, 당장 눈앞의 이익에만 급급해 독자에게 양질의 책을 선택할 권리를 박탈한 출판사들도 문제다.
김영민은 리영희(『전환시대의 논리』 저자), 박이문(『하나만의 선택』 저자) 이후 오랜만에 발견한, 내 (아웃사이더 적인?) 취향에 딱 맞기도 하는, 기개가 빳빳하게 서 있는 보물과도 같은 인문학자다. 결국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나의 선택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스트라이크를 날리면서 모래 속에서 진주를 발견하는 개가를 구사했으니 충분히 칭찬받을 만하지만, 한편으론 나의 위태로운 독해력의 한계를 절실하게 깨닫는 계기가 되기가 되었으니, 절차탁마까지는 아니더라도 응당 정진의 채찍질을 가하는 기회로 삼음이 마땅하다. 나의 뇌 내구력의 한계상 자주는 못 찾겠지만, 적어도 잊을만할 때쯤 인문학 한 권쯤은 반드시 찾아 읽어야겠다는 욕망이 지금은 봇물 터지듯 용솟음치지만, 알다시피 쉽지 않다. 제대로 된 인문학은 찾기도 어렵고, 읽기도 어렵고, (그것에 대해) 쓰기도 어렵다.
『인간의 글쓰기 혹은 글쓰기 너머의 인간』은 단순히 지적 수련이나 만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문학으로서의) 글쓰기에 대한 인문학적이고 철학적인 성찰과 한국 인문학의 위기를 적실하게 이해하기 위한 밑거름을 장만하기 위해서라도 한 번은 질근질근 씹어야 할 수난 같은 책이다. 분명 어렵게 읽힐 수 있는 책이지만(모든 장이 다 어려운 것은 아니니 지레 겁먹지는 말자), 그런 만큼 고진감래에도 잘 들어맞는 책이다(아마도 실증주의, 인식론, 해석학, 구조주의 등 근 • 현대 철학에 대한 기본적 소양을 갖춘 독자라면 좀 더 재밌게 읽힐 것이다).
좋은 소설을 읽고 나면 여인의 향기 같은 나른한 감흥에 취하는 게 고작이라면, 좋은 인문학을 읽고 나면 죽어야만 깨우칠 것 같은 일리(一理)가 ‘나 잡아 봐요’ 하고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이 득도를 눈앞에 둔 같은 깨달음에 취할 수 있다.
오늘 리뷰는 다른 리뷰보다 더욱더, 그리고 전단만큼이나 얄팍하고 내 발자국에 고인 빗물만큼이나 얕은 나의 지식과 깊이를 드러내는 부끄러운 글이 되고 말았다. 소양이 부족한 것이리라. 철도 들지 않은 것이리라. 읽기만 하고 배우고 실천하려고 하지 않으니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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