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빛 눈의 고양이 | 미야베 미유키 | 어제오늘은 어둠을 틈타 읽고 쓴다
어둠은 괴담에 운치를 더한다
오늘 리뷰의 첫 타를 날리는 지금 시간은 새벽 4시 30. 만약 여름 이맘때 동네 생태공원으로 산책하러 나간다면 열에 아홉은 어슴푸레 들려오는 새벽닭 우는 소리와 마주치기 마련인 꽤 부지런한 시각이다. 도시인에겐 생소한 ‘꼬끼오’ 소리는 각종 궁상맞은 소음으로 녹작지근해진 고막의 피로를 조금은 풀어주는 천연 강장제다. ‘꼬끼오’ 소리를 듣고 ‘꼬르륵’ 반응하면 그날의 위장 컨디션은 문제없으니 한시름 덜 수도 있다. 이때 날이 춥지 않으면 공원 여기저기 ‘날 좀 깔아뭉개줍쇼’하고 널브러져 있는 벤치에 오도카니 앉아 스마트폰으로 전자책을 읽으며 빠르게 걸어오느라 고생했던 심장을 차 한잔 마실 시간만큼 쉬게 한다. IT 시대를 사는 문명인만이 누릴 수 있는 조촐한 풍류다.
공원 벤치는 진득하게 앉아있을 수 있는 안락한 자리가 아니니만큼 편안하게 읽을 수 있는 가벼운 소설이 좋다. 해가 부스스하게 머리를 쳐들기 전이자 어둠이 퇴근 준비를 시작하는 시간이니만큼, 이왕이면 으스스한 분위기를 살릴 수 있는 괴담 소설이 좋다. 공원에 발을 디디는 순간부터 반가워서 그런 건지 경계하느냐 그런 건지 아무튼 귀청을 따갑게 쏘아붙이는 풀벌레 소리가 혹시 모를 사악한 기운을 막아주는 오카쓰가 되고, 가냘픈 후리소데 소매를 살랑살랑 다독여 줄 것 같은 산들바람은 새로운 괴담 경청 동료인 도미지로가 된다. 그렇다면 난 오치카일까? 아니면 새책 장수 간이치일까?
처녀 귀신이 아무리 사랑스럽다고 해도 새벽닭 우는 동트는 시간까지 붙들고 있는 것은 예의가 아니듯 밝은 대낮에 괴담을 읽는 것도 예의가 아니다. 괴담은 해가 엿보지 않게 어둠을 틈타 은근슬쩍 읽어야 그 으스스하고 처량한 맛이 제대로 스며온다. 눈 부신 햇살은 반쯤 투명한 요괴를 증발시킨다. 따뜻한 햇볕은 요괴의 차가운 기운을 정화한다. 그만큼 괴담 소설을 읽는 재미는 반감된다.
나의 이야기책, 블로그
병을 앓고 있으면 몸이 불편하듯 고민거리를 품고 있으면 마음이 불편하다. 마음이 불편해서 견딜 수 없는 사연이 있다면, 이야기함으로써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수 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고백해야 할까? 가까운 사람에게 고백해버리면, 상대가 내 깊은 비밀을 알고 있다는 생각에 만날 때마다 면목이 서지 않는다. 그렇다고 낯선 사람에게 고백하기엔 용기가 부족하다. 사실 부족한 용기를 탓하기에 먼저 타인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경청해 줄 사람을 만나는 것 자체가 소통이 부족한 현대 사회에선 어렵다. 사람의 천성은 듣기보단 말하기를 좋아하는지라, 마음이 불편해질 것이 뻔한 타인의 고민 • 걱정거리를 진득하게 들어줄 사람은 없다. 그래서 정신과 의사나 심리 치료사처럼 돈을 받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희한한 직업도 있지 않은가?
우린 어디에서 미시마야의 ‘흑백의 방’ 같은,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 암처럼 응어리진 사연을 고름 짜내듯 속 시원하게 털어놓을 수 있는 곳을 찾을 수 있을까? 어디에서 오치카를 만날 수 있을까?
서로 하고 싶은 이야기만 우쭐거리며 늘어놓고, 서로 듣기 좋은 이야기만 시치미를 뚝 떼고 되풀이하는 가식은 기껏해야 빛 좋은 개살구다. 메말라가는 정서에 건조한 바람만 더 불어넣을 뿐이다. 잘 먹고 잘사는데도 불구하고 도시인의 정신질환자 수가 꾸준히 증가하는 것은 무엇인가! 제때 토해내지 못해 타르처럼 검고 진득하게 썩어 문드러진 사연이 우리를 좀 먹고 있지는 않은가! 더군다나 외로운 도시인은 치열한 경쟁과 이해득실로 얽히고설킨 복잡한 사회에서 살아남아야 하다 보니 이런저런 생각도 많다. 고민도 많다. 마음의 문도 생각의 폭도 점점 좁아진다. 성격도 까칠해진다. 현대인의 정서가 메말라가는 이유 중 하나가 이중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금빛 눈의 고양이(あやかし 草紙)』에서 오치카의 뒤를 잇는 새 경청꾼 도미지로는 이야기꾼이 들려준 이야기를 ‘그림’이라는 여운으로 봉한다. 그림들을 담은 오동나무 궤짝에 ‘기이한 이야기책’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난 도미지로처럼 그림 그리는 재주는 없지만, 문명국에서 태어난 덕분에 서툴게나마 글 정도는 쓸 수 있다. 내가 들은 이야기를, 그리고 멸치처럼 마른 내 몸속에 바이러스처럼 기생하는 울분 비슷한 사념을 블로그에 쓰고 잊어버리면서 정서가 피폐해지는 나 자신을 치유한다. 글쓰기는 고독과 불안과 통증이 내 정신을 야금야금 좀먹는 것을 막는 좀약이다.
과식은 금물, 과독(過讀)도 금물
미야베 미유키(宮部 みゆき)는 괴담 이야기를 100화까지 쓸 예정이라 한다. 작가로서 배짱도 좋고 포부도 남다르다. 작가의 쪼글쪼글한 뇌에선 꼭지만 틀면 쏟아져나오는 수돗물처럼 이야기가 흘러넘치나 보다. 나도 해부학적 모양만 봐서는 작가의 그것과 별 차이 없는 쪼글쪼글한 뇌를 가졌지만 이다지도 질이 다르다니, 참으로 하늘이 원망스럽다.
아무튼, ‘백물어(百物語)’는 작가의 필생 사업이라 하니 기대해 볼 만하지만, 그 이야기를 듣고 무슨 리뷰를 써야 할지 고민할 수 있는 나로선 걱정스럽기도 하다. 지금까지 읽은 미시마야 시리즈 5권에 실린 괴담이 대략 26편이라면, 앞으로 대략 14권 정도 남은 셈이다. 엄청난 시리즈다. 작가나 나나 끝장을 볼 수 있을까? 지금 당장은 이쯤에서 ‘흑백의 방’ 시리즈 리뷰는 그만둘까, 하는 속 편한 생각도 해보지만, 작가처럼 ‘백물어(百物語)’는 못하더라도 리뷰 몇 편 더 쓰는 것쯤이야 하는 오기도 생긴다. 아무도 안 읽는 리뷰지만, 내 글의 가장 훌륭한 독자인 내가 있지 않은가. 그런데 옛날에는 괴담 모임 자리에서 백 개의 이야기를 끝내면 정말로 괴이한 일이 일어났다고 하는데, 미야베 미유키의 ‘백물어(百物語)’도 그런 신통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100화를 이제 막 읽고 난 독자의 뒷덜미에 갑자기 서늘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뭐 이런 것을 기대해도 되려나 모르겠다.
군것질거리를 좋아하는 도미지로, 그리고 그와 죽이 잘 맞는 오치카의 새신랑 간이치의 영향력 때문인지 만주, 팥소, 군고구마, 모나카 등 달곰한 전통 과자가 유난히 눈에 띈다. 야멸스럽게 식탐을 자극한다. 때아닌 군것질거리들의 기습공격에 독자는 창밖을 흘러내리는 빗물처럼 우아하게? 혹은 뼈다귀를 코앞에 둔 개처럼 청승맞게? 어찌 되었든 볼썽사납게 군침을 흘릴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고 뭔가를 먹으면서 책을 읽다간 소화 불량 걸리기에 십상이니 주의하자. 책을 읽는 행위는 일종의 뇌 운동이므로 우리가 배드민턴이나 축구 같은 육체 운동할 때처럼 장운동을 위축시키기 때문이다. 만약 가볍게 뭔가를 씹으면서 책을 보고 싶다면 텍스트를 소리 내 읽어주는 TTS(Text to Speech)를 이용하면 좋을 것이고, 간단한 뭔가를 먹으면서 가볍게 들을 수 있는 소설로선 미야베 미유키의 ‘백물어(百物語)’ 시리즈는 꽤 안성맞춤이다. 그러나 기능성 소화장애를 앓는 나로선 감히 실제로 행해볼 수 없는 익스트림한 모험인지라 소화 불량에 걸리지 않는다는 보장은 못 하겠다.
치즈와 피자 소스가 전장의 시체처럼 참담하게 늘어져 있는 햄버그스테이크 위에는 파인애플이 참혹하게 얹혀 있다. ‘흑백의 방’에서 쑥덕거리는 이야기만큼이나 기괴한 이 정체성 모호한 음식을 반찬 삼아 100g의 밥을 얼렁뚱땅 해치운 다음 가뿐하게 산책해 볼까나? 했는데 예상치 못한 복병 순대가 난데없이 끼어드는 바람에 과식하게 되었고, 덕분에 꺼이꺼이 산책을 물 건너보낸 것이 바로 조금 전이었는데, 마찬가지로 딱 한 시간만 『금빛 눈의 고양이』를 읽고 나서는 이번에야말로 산책해야지, 했는데 그만 이야기에 빨려드는 바람에 괘씸하게도 산책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제발 순대만은 내려보내달라고 울며불며 하소연하는 위장을 차마 못 본 체할 수 없었던 나는, 제발 제 이야기만은 들어달라고 능글맞게 유혹하는 소설을 차마 못 본 체할 수 없었던 나는, 정말로 마음만큼은 포근한 사람이다, 라고 되지도 않는 위안을 바보처럼 흥얼거리며 오늘 리뷰를 마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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