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8/21

가족의 탄생 | ‘선택’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가족의 탄생 | 도진기 | 과연 ‘선택’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책 리뷰 | 가족의 탄생 | 도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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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추리소설이란?

내 블로그에 게시된 [책 리뷰]를 조금이라도 관심 있게 본 사람은 알 것이다. 내가 (장르소설 중에선) 추리소설을 즐겨 읽고 일본 작가 작품을 자주 찾는다는 것을 말이다. 도서관 출입 초반에는 (소설, 교양 등 모든 장르에 걸쳐) 어떤 작가의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등 독서에 대한 지식은 백지상태였다. 특히 독자의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릴 수 있는 추리소설 같은 경우는 선택의 폭을 좁히고 덩달아 선택의 갈등까지 최소화할 수 있는 취향이 뚜렷하게 날이 선 상태는 아니었기에 일단 유명해 보이는 작가의 소설을 눈에 띄는 대로 찾아 읽었다.

그렇게 해서 알게 된 작가는 셀 수 없이 많을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이 자리에 다 나열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을 정도는 된다. 그 중 기억에 남는 작가는 (그냥 기억나는 순서대로) 우타노 쇼고, 엘러리 퀸, 시마다 쇼지, 마쓰모토 세이초, 찬호께이, 피에르 르메트르, 제프리 디버, 마이클 코넬리, 올리퍼 푀치, 아리스가와 아리스, 에도가와 란포, 요코미조 세이시, 쯔진천, 교고쿠 나쓰히코, 모리 히로시 정도이다(설마 여기에 거론되지 않았다고 섭섭해하는 작가는 없을 테지?). 미국, 프랑스, 독일, 미국 등 서구권 작가와 일본, 중국 등 동아시아 작가가 고루 분포되어 있으니 (여기 언급하지 않은 다른 작가까지 포함하면) 꽤 다양한 작가의 다양한 추리소설을 경험한 셈이다.

이렇게 다양한 작가의 2백 여권 이상의 추리소설을 접하면서 내가 선호하는 작품과 그렇지 않은 작품을 분별하는 나만의 기준 • 취향 같은 것이 잘 발효된 김치나 치즈처럼 나름의 빛깔과 모양과 냄새를 이루며 굳어져 왔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나만의 추리소설 선별 기준(혹은 누군가가 당신에게 있어 좋은 추리소설은 어떤 것이냐고 물어왔을 때 나의 대답이기도 하다)은 (『한국추리소설 걸작선』 리뷰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첫째, 과학적 사고방식을 기반으로 한 사건의 논리적인 전개. 둘째, 텍스트 읽기의 재미를 자아낼 수 있는 개성 있는 필력. 셋째 이야기나 트릭의 기발함과 독창성 등이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 보탠다면 책을 다 읽고 나서 덮었을 때 느끼게 되는 감흥 정도?

어딘지 모르게 광고나 방송용 멘트처럼 들리기도 하는 나의 기준이 발효식품 특유의 냄새처럼 고약하다고, 아니면 신입사원의 와이셔츠 옷깃처럼 빳빳하다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취향이니만큼 구태여 변명할 일도 아니고, 굳이 변명하고 싶지도 않다.

책 리뷰 | 가족의 탄생 | 도진기
<‘진구’ 하니까 자꾸 ‘백구’가 연상된다. 그나저나 저 친구는 올 가을을 맞이할 수 있을까?>

단편 「선택」을 읽고 용기 내어 「가족의 탄생」을 선택

이쯤 되면 서론에서 잠깐 언급한 추리소설 작가 중 한국 국적을 가진 작가가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을 간파한 예리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실 김내성과 김성종의 작품을 안 읽어본 것은 아니고, 『마인』과 『최후의 증인』이 마음에 안 들었던 것도 아니지만, 두 작가의 작품을 그렇게 많이 읽어본 것도 아니고, 그래서 그런지 앞에서 언급한 작가들과 나란히 늘어세울 정도로 확신이 서지는 않았다. 입때까지만 해도 한국추리소설 작가에 대한 은근한 멸시가 내 안 어딘가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한국추리소설 걸작선』을 읽고 참 많이 변했다(혹은 변하는 중?). 이 책은 한국추리소설 작가를 무시하는 나의 오만무도한 태도를 시시껄렁하고 실속 없는 말로서가 아니라 실재하는 작품을 통해 꾸짖었다. 이 책은 한국추리소설에 대한 나의 무지가 배우지 못함이라든가, 아니면 인연이 없었다든가 하는 어쩔 수 없음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또한 읽어보지도 않고 지레짐작하는 불성실함과 무책임에서 비롯된 것임을 신랄하게 나무랐다.

그렇다고 이 책에 실린 44인의 44개 작품이 모두 내 마음에 든 것은 아니다. 하지만, 소수의 작품은 그동안 한국추리소설에 품었던 나의 편견과 선입견을 단박에 박살 낼 정도로 뛰어났고, 이외에 많은 작품을 통해 한국추리소설의 가능성을 충분히 가늠할 수 있었다. 덕분에 수년 치 먹을 포획물 앞에서 의기양양한 사냥꾼처럼 앞으로 어떤 책을 섭취해야 할지 고민할 걱정거리가 많이 줄었다는 안도감과 든든함이 날 잠시나마 정신적인 포만감에 휩싸이게 했다.

『한국추리소설 걸작선』에 실린 44개의 작품 중에서 나를 질질 짜게 만든 도진기의 「선택」이 『가족의 탄생』으로까지 이어지게 된 이유에 대해선 굳이 자세히 말하지 않아도 「선택」을 읽어본 독자라면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기대가 커서 실망도 큰 것일까?

책 이야기는 안 하고 밑도 끝도 없는 잠꼬대 같은 소리를 씨부렁거리느냐고 힐난할 수도 있지만, 추리소설이니만큼 책 이야기를 많이 할수록 그런 것들이 하나둘씩 쌓이고 쌓여 막상 그 책을 읽을 때 재미를 반감시키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다. 그래서 난 될 수 있는 대로 (특히 추리소설은 더더욱 신경 써서) 내용(특히 그중에서도 트릭)과 관련한 이야기는 자제하는 편이다. 그리고 [책 리뷰]임에도 책 이야기만 하지 않는다는 것이 내 리뷰의 특징이기도 하다. 어쩌면 나의 블로그는 [책 리뷰]라는 그럴듯한 구실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털어놓음으로써 마음속 응어리를 해소하는 해우소가 되어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자, 이제야말로 본론으로 들어가자. 도진기의 「선택」은 『한국추리소설 걸작선』에서 한국추리소설의 가능성을 점지하고 더불어 한국추리소설에 대해 기대감을 품게 한 몇 안 되는 단편 중 하나다. 그런 만큼 『가족의 탄생』에 대한 내 기대감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놀이동산에 갈 날을 하루 앞둔 어린이처럼, 혹은 좋아하는 작가의 신작을 읽어볼 날을 학수고대하는 문학 소년처럼 나의 가슴은 무구한 설렘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여기까지 읽어준 것도 감개무량한데 더 질질 끌다가는 ‘뒤로가기’라는 사달이라도 날 것 같으니 여기서 짧게 『가족의 탄생』에 대한 내 품평을 말하자면 기대가 큰 만큼 당연히 실망도 컸지만, 그래도 재미있게는 읽었던 만큼 작가의 다른 작품도 기대해볼 만하다는 것이다. 내가 봐도 조심스러움이 꽤 묻어나오는 어정쩡한 대답이다. 그만큼 마음에 확 와닿는 뭔가를 얻기에는, 혹은 이 작가의 다른 소설도 읽어보고 싶다는 믿음을 주기에는 부족한 소설이었다. 만약, 단편 「선택」에서 보여준 기발함이 단지 천려일득(千慮一得)이었다면, 앞으로 더는 도진기의 소설을 선택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책 리뷰 | 가족의 탄생 | 도진기
<아마도 ‘해미’는 이런 생기발랄한 분위기의 소녀?>

사이카와와 모에 커플을 연상시키는 진구와 해미

실망스러운 점도 있었지만,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를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재미도 있었다. 누군가는 병 주고 약 주냐고 비아냥거릴 수도 있겠지만,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내 성격이 회의적으로 변해가는 것 같고, 그에 따라 내 리뷰도 예전보다는 시나브로 비판적인 경향이 짙어지는 것 같다. 그뿐만 아니라 책을 통해 사람의 추악한 면을 여과 없이 그대로 들여다보게 되니 간혹 지독한 염세에 빠져들기도 한다. 그래서 책을 지나치게 많이 읽으면 미친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예전에는 긴가민가했던 이 말이 지금으로선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아무튼, 『가족의 탄생』에는 지금껏 보지 못한 특이한 탐정이 등장한다.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그래서 사이코패스 기질을 가진 것으로 의심되는 탐정 김진구다. ‘진구’하니까 ‘백구’가 연상되면서 왠지 친근감이 물씬 풍겨 나올 법도 하지만, 막상 대면하면 데면데면하다 못해 쌀쌀맞게까지 느껴지는 진구의 대인관계는 오늘의 무더위를 식혀주는 에어컨 바람만큼이나 서늘하다. 나처럼 감정이 풍부한 사람이 감정을 엿 바꿔 먹은 사람과 상대하자니 답답하고 짜증도 난다. 표준적인 감정 지침서에 충실한 독자와 전혀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진구와의 사이에서 진구의 침침한 분위기를 살짝 밝게 전환하며 완충지대 역할을 해주는 인물이 바로 해미다. 사이코패스 같은 탐정과 소녀시대를 닮았다는 인사치레용 칭찬을 듣는 것만으로도 입이 헤벌쭉 벌어지는 천상 한창때의 소녀 해미. 마치 모리 히로시의 S & M 시리즈에 등장하는 두 주인공 사이카와와 모에를 보는 듯하다. 물론 성격들은 매우 다르지만 말이다.

도진기의 다른 소설을 못 읽어봐서 두 사람의 인연이 어떻게 얽히게 되었는지 자세한 내막은 알지 못하지만, 전혀 어울릴 것 같은 않은 두 사람이 그럭저럭 사이좋게 사건을 헤쳐 나가는 설정은 꽤 흥미롭다. 걸그룹을 연상시킬 정도로 뛰어난 미모를 자부하는 해미가 왜 진구 같은 무덤덤하고 불안정한 직업을 가진 남자를 따르는 것일까? 두 사람의 관계는 연인일까? 아니면 그냥 오빠 동생 사이일까? 나로서는 알 수가 없지만, 오지랖이 거의 없는 나로서도 무척 궁금하다. 이 두 사람의 미래는 사이카와와 모에처럼 똑 부러지게 매듭을 짓지 않고 흐지부지 늘어질까? 아니면 그 반대의 역사가 이루어질까?

이 독특한 커플 아닌 커플 때문에 ‘진구 시리즈’를 보는 독자도 꽤 있을 성싶다. 그렇다면 남녀평등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진구 시리즈’가 아니라 ‘진구 & 해미 시리즈’로 불러야 마땅하다(‘J & H 시리즈’가 되는가?).

가가 형사처럼 따뜻한 마음을 지닌 인물이 아니라, 사이카와나 교고쿠도처럼 감정에 쉽사리 휘둘리지 않는 냉정한 탐정을 만들려는 의도였다면 진구는 얼추 성공작이다. 그러나 ‘냉정’이 지나쳐 ‘냉혈’이 되어 버린 감이 없지 않아 있다. 사이코패스가 정신의학적으로 정확히 어떤 증상을 말하는지 알지는 못하나, 우리가 통상적으로 언급하는 ‘사이코패스’라는 의미에 진구를 포함해도 무방할 듯싶을 정도로 진구는 지나치게 감정을 절제(혹은 결여?)하다 보니 어떤 면에선 무색무취한 탐정이 되어버렸다. 어렵사리 라도 상상하기 어려운 친구다. 공허하고 비현실적인 인물로 보이면서도 그런 점 때문에 끌리기도 하는 묘한 인물이다.

소름 끼치는 것은 만약 사이코패스가 연쇄살인마가 되지 않고 탐정이 된다면, 아마 그 탐정은 딱 진구 같은 인물일 것이라는 생각이 수면 위로 떠 오른 시체처럼 으스스하게 떠올랐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진구는 추리소설 역사에서 유례없는 탐정이다.

특이한 이력, 평범한 소설?

미국이나 유럽은 잘 모르겠고, 우리와 가까운 일본이나 중국에는 특이한 이력(내가 말하고자 하는 ‘특이한 이력’이란 수업받은 작가 지망생이 아닌 생업에서 작가로 전환한 사람들)을 가진 추리소설 작가들이 꽤 있다. 류츠신은 발전소에서 컴퓨터 엔지니어로 일했고, SF소설 작가인 하오징팡은 칭화대학 출신의 수재다. 모리 히로시는 나고야 대학 부교수 출신의 공학 박사다. 앞서 언급한 작가들과 비교해 학력은 좀 뒤지지만, 다양한 주제에 대한 광범위한 지식을 자랑하는 교고쿠 나쓰히코는 요괴 연구가이자 디자이너이기도 하다. 물론 더 뒤져보면 이외에도 특이한 이력을 가진 작가들은 더 많을 것이다. 그런데 전 세계 모든 지역을 뒤진다 해도 도진기 같은 판사 출신의 추리소설 작가는 만나기 어려울 것 같다(그러고 보니 요즘 같은 검찰 시대에 전직 판사의 심기를 거스르는 글을 썼다가 봉변을 당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래서 그럴까? 『가족의 선택』은 판사라면 가장 많이 맞닥트릴법한 사건 중 하나일 것 같은 상속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상속을 둘러싼 싸움, 간통, 낙태, 돈 등 사람의 밑도 끝도 없는 탐욕에서 기인하는 추악한 성정을 적나라하게 폭로한다는 점에서 매우 세속적이고, 현실에서 빈번하게 일어나거나 충분히 일어날법한 사건들이라 신선함은 다소 떨어진다. 특히 순수 추리소설을 지향하는 나로서는 세속적인 문제에 깊게 천착한 『가족의 탄생』 같은 소설은 가능하면 피하고 싶기도 하다. 이미 많은 책을 통해 사람의 가지각색의 추악함에 치가 떨릴 때로 떨린 나로서는 다 씹은 껌처럼 찝찔한 물만 나오는 세속적인 현실을 곱씹기보다는 모리 히로시의 소설처럼 허구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소설에서 일탈의 위안과 안식을 얻고 싶다.

살인 사건이라도 치정이나 우발적인 말다툼에서 기인한 평범하기 그지없는 사건보다는 현실에서는 있을법하지 않은, 그래서 적당히 기상천외하다고 불릴만한 사건이 상상력과 호기심을 자극한다는 점에서 나를 유혹한다. 그렇게 비현실적인 사건에 푹 빠져있는 그 찰나의 시간만큼은 현실의 불안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다. 책을 현실 도피의 계기가 되는 공상의 촉매제로 이용하는 나 같은 회의주의자에겐 이 정도면 충분한 해명일 것 같다.

다소 비현실적일지라도 순수한 추리를 지향하느냐, 아니면 추리의 순수함은 다소 떨어져도 현실성을 추구하느냐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독자의 취향일 뿐이다. 혹은 지극히 세속적인 문제에서 추리소설 창작의 돌파구를 찾으려고 하는 고집이 순수 추리에 중점을 둔 일본 추리소설과 구별 지을 수 있는 한국 추리소설 특유의 정서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한편으론, CCTV와 휴대전화 때문에 도무지 트릭이 성립하기 어렵다는 작가의 하소연도 새겨들을 만하다. 그래서 많은 추리소설 속 시대 설정이 과거로 회귀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정녕 과학과 기술에 의존하는 현대 범죄 수사에서 순수한 추리를 창작할 수 있는 빈틈은 없는 것일까? 아니면, 능력의 부재인가? 아닌 누군가 벌써 이 문제를 풀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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