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7/13

서검정협 류삼변 | 날아라 충충, 웃어라 충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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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검정협 류삼변(书剑情侠柳三变, 2004) | 날아라 충충, 웃어라 충충

<보란 듯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와이어 줄>

「천룡팔부(2021)」라는 최신 드라마를 보고 나서 그런지 왠지 모르게 세련되지 못한 색감이 시대에 뒤떨어져 보인다. ‘마치 오래전의 드라마를 보는 것 같구나’하는 즉결심판 같은 감흥이 내심 미덥지 않아 제작 연도를 확인해 보니 역시나 2004년 작품이렷다! 한국에서의 방송 일자인 ‘2022년’이라는 숫자에만 현혹되어 최신작이라 지레짐작했던 내가 바보이렷다!

올드한 작품이라 그런지 대망의 첫 화부터 와이어 줄과 세트장 천장을 대놓고 노출하는 것이 심상치 않았고, 그 때문에 이걸 계속 봐야 하나 말아야 하는 심상한 고민을 시청자에게 떠넘기는 것이 참으로 만만치 않은 드라마구나, 하는 감탄과 우려를 자아낸다.

후반으로 갈수록 난센스 해지는 이야기는 앞서 품은 우려를 갑절로 정당화시키지만, 그런데도 꿋꿋하게 끝까지 볼 수 있었던 것은 그럭저럭 재미가 있던 것이렷다!

아무튼, 「서검정협 류삼변(书剑情侠柳三变)」은 5대 10국 시대 중 금릉(金陵, 현재의 난징)을 수도로 한 나라 남당(南唐) 후주 이욱의 후손들이 (남당을 멸망시킨) 북송의 조정이 외세의 침략, 황제의 병환 등 어수선한 틈을 타 역모를 꾸민다는 정치투쟁 드라마라고 볼 수 있다.

<'천룡팔부'의 단예처럼 풍류 기질이 다분한 류삼변>
<류삼변, 초초, 황제, 이 두 남자가 싸우는 이유는 짐작이 가나요?>

주인공 류삼변(柳三变, 훗날 류영(柳永)으로 개명)은 북송 시기 시민 계층의 정서를 반영한 만사(慢詞)로 유명한 대중적인 사(詞) 작가이다. 실존 인물인 그는 드라마에선 (남당의 마지막 군주) 후주 이욱의 손자로 각색되는데, 류삼변의 문학적 재능이 치국 재능은 없었지만 사를 잘 쓰는 풍류 군주였던 이욱의 뒤를 잇는 가교 구실을 했으리라. 드라마 또한 류삼변의 문학적 재능을 극대화해줄 요량으로 사를 읊는 장면이 심심치 않게 등장해 독자의 풍류 기질을 다분히 부추긴다.

그는 삼오(三吳, 현재 장쑤성 남부와 저장성 일부를 가리킴)의 아름다운 경치와 풍요로운 삶을 노래한 망해조(望海潮)라는 사로 일약 전국 스타가 되는데, 이 망해조는 류영의 작품 중 걸작 중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작품이라고 한다.

드라마에서 그는 남당을 재건하려는 후손들에 의해 본의 아니게 황태자로 추대되지만, 그는 이욱처럼 풍류 기질이 다분할 뿐만 아니라 태평성대에 명분 없는 반란을 일으키는 것에는 반대하는 백성을 근심하는 평화주의자이다.

정이 많은 그는 여자 문제와 사로 일찌감치 명성을 떨치기는 하지만, 자유분방하고 우유부단한 성격 때문에 ‘남당 재건’이라는 역사적 사명을 두고 정체성 문제와 타인이 멋대로 정해준 운명 사이에서 끝없이 번민하는 불행한 인물로 전락한다.

풍류인답게 무공 수련이 아닌 악기를 연주하다가 기가 쏠려 피를 통하는 보기 드문 광경을 연출하기도 하고, 중요한 고비마다 여자의 희생을 대가로 기사회생하는 등 주인공 치론 상당히 유약한 인물이지만, 그가 시종일관 백성의 안위를 중심으로 행동하는 모습은 마치 (천룡팔부의) 소봉을 보는 듯해 흐뭇하다.

류삼변 역할은 배우 린즈잉(林志颖)이 연기했는데, 아마도 나와 드라마 취향이 비슷한 사람들은 매우 낯익은 얼굴에 어리둥절했을 것이다. 바로 그는 2003년도 「천룡팔부(天龙八部)」에서 단예(段譽) 역을 맡았던 그 배우이다.

무공보다는 문학에 관심이 많다는 것, 미인이 끊이질 않는다는 것, 권력보다는 백성의 안위가 더 중요하다는 것, 그리고 여자 문제에 얽힌 유전자적 사정 등 류삼변과 단예는 비슷한 점이 꽤 있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보면 좀 더 즐거운 감상이 될 것이다.

<협객 충충은 남자 잘못 만나 고생이 훤했다>
<류삼변의 풍류 기질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한 충충>

1편부터 등장하여 마지막 편까지 함께하는 충충(虫虫)이야말로 드라마 「서검정협 류삼변」의 홍일점 같은 존재다. 내 여기서 감히 말하건대 오직 충충 때문에 드라마를 무사히 완주할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충충 역할을 맡은 배우) 허메이톈(何美钿)의 톡톡 튀는 연기와 금붕어 눈알을 연상시키는 큼직한 눈망울, 호탕한 미소는 유감이 없다.

자칭 강호에서 이름 없이 의를 행하며 어디든 신출귀물하는 협객 중의 협객이자 상대방의 공격을 피해 도망 다니면서도 통닭 한 마리를 뜯는 숨은 고수인 충충은 드라마 초반의 잇따른 인연으로 류삼변과 엮어진다. 그러나 이 인연은 그녀에겐 불행이었을까? 아니면 행복이었을까?

그녀는 류삼변을 따라 전쟁까지 따라나서 공을 세우는 등 류삼변을 위해서는 지옥에도 풍덩 뛰어들 정도로 헌신하지만, 초초(楚楚)에게 홀린 류삼변의 마음은 좀처럼 흔들리지 않는다. 이 때문에 끝날 날이 없는 충충의 마음고생은 보는 내가 안쓰러울 정도다. 그런데도 연적인 초초와 의자매를 맺으니 충충의 마음 씀씀이만큼은 대협 중의 대협이다.

그녀의 말괄량이 같은 성격과 괄괄한 행동은 드라마의 유일무이한 웃음이다.

<이 스치듯 한 인연이 없었더라면 두 사람의 운명은 달라졌을까?>

백옥루가 배출한 명기(名妓)인 초초(楚楚)는 단아한 미모가 돋보이는 배우 후케(胡可)가 연기했다.

충충의 연적이면서도 훗날 충충과 통쾌하게 의자매를 맺는 그녀 역시 류삼변처럼 타인과 역사가 짊어 준 운명에 희생되는 비극을 맞이한다. 역사와 음모와 엄마가 강제로 정해준 남자 황태자와 변변치 않은 관직조차 없지만, 인연이 맺어준 남자 류삼변 사이에서 옴짝달싹 못하는 그녀는 원두 분쇄기 속의 커피처럼 한 줌의 가루로 짓이겨지면서 애달픈 여운을 남긴다.

<구현왕, 올드한 홍콩영화 팬에겐 친숙한 얼굴>

황제의 동생이자 황태자의 숙부인 구현왕(九贤王)은 1980~90년대 홍콩영화 팬이라면 매우 익숙한 얼굴의 배우인 우마(午馬)가 연기했다.

귀타귀, 프로젝트 A, 오복성, 쾌찬차, 칠복성, 강시선생, 예스 마담, 용적심 등 1980년대 전후의 홍콩영화에서 약방의 감초 같은 조연으로 활약했던 우마는 「서검정협 류삼변」에선 황제 자리를 노리는 권모술수에 능한 야심가로 등장한다. 아마도 그는 북송 태조 조광윤의 뒤를 이은 태종 조광의를 모태로 한 인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드라마에 등장하는 황태자는 가상의 인물일 것이다.

아무튼, 사건의 발단과 클라이맥스 대부분이 음모꾼인 구현왕으로부터 기인할 수밖에 없는 만큼 그는 이야기 전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추적 인물이자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으로 봤을 때 악당 역할을 맡은 인물이다.

<두두, 두관, 류삼변, 충충, 그들 누구에게도 해피 엔딩은 허락되지 않았다>

끝으로 제목만 보고 무협 드라마인 줄 알고 덥석 물었는데, 결과는 정치 • 로맨스 드라마였다. 개인적으로 정치 • 로맨스 장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일찌감치 뱉어 버리자는 성급한 마음이 일기도 했지만, 그래도 좋아하는 시대물인지라 조금 더 두고 보자는 느긋한 마음이 앞섰다. 무엇보다 드라마 완주에 충성스럽게 이바지한 것은 충충의 오달진 활약 덕분인데, 어느 드라마건 칙칙한 분위기를 명랑하게 꾸며주는 충충 같은 인물이 하나 정도는 있기 마련이다.

진짜 끝으로 거의 20년이나 지난 오래된 드라마지만 지금 방송하는 대는 (저작권이 저렴하다는 이유 말고도)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라 여겨도 될 정도는 될법한 무난한 작품이다. 특히 남당의 멸망과 북송 초기의 역사 지식을 알고 있다면 더더욱 흥미진진하게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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