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꼭 알아야 할 70가지 | 주성철 | 영화에 가린 영화 같은 이야기
양으로만 따지면 나도 영화광
비디오방이 저물고 DVD방이 뜰 때, 내 펜티엄3 PC 하드디스크엔 디빅(Divx) 코덱으로 인코딩된 디지털 영화들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한창 뜨는 창업 아이템이었던 피시방을 운영하면서 특별한 취미도 없었고, 요즘처럼 책도 읽기 전이었던 난 걷잡을 수 없이 남게 된 시간으로 여기저기서 긁어모은 디빅 영화를 마침 너 잘 만났다는 듯 정신없이 소화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땐 지금처럼 기분 전환을 핑계로 (공포영화 같은) 단순하고 자극적인 특정 장르에 치우치지 않고, 가리는 것 없는 나의 본받을만한 식성처럼 평이 조금이라도 괜찮은가 싶으면 닥치는 대로 봤다. 예술 영화의 극치이자 한편으론 영화가 줄 수 있는 수면 효과의 극치이기도 한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희생」도 나의 레이더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DVD를 DivX 코덱으로 인코딩한 디빅 영화의 장점은 당시까지 안방 비디오 문화의 주류였던 VHS를 뛰어넘는 화질과 좌우 잘림 없는 와이드 스크린(16:9) 화면이 연출하는 몰입감을 빼놓을 수 없지만, 약간의 지식만 있다면 어둠의 경로를 통해 영화를 공짜로 실컷 감상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매력이었다. 그랬기에 하루 두세 편씩 닥치는 대로 감상하는 것이 가능했으리라.
공짜로 얻은 것이니만큼 미련 없이 버릴 수 있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인생 경험과 수양이 턱없이 부족했던 난 한 번 본 영화를 삭제하는 아주 간단한 실천을 하루하루 미루기만 했다. 그렇다고 기껏해야 수십 기가밖에 안 되는 하드디스크에 마냥 보관할 수도 없는 일. 당시엔 바이두 넷디스크 같은 믿을 만한 클라우드 서비스도 없었다. 디빅 붐과 맞물려 일어난 영화 수집 욕구는 ‘CD • DVD 굽기’라는 21세기 디지털 문화가 양산한 계륵 같은 취미를 탄생시켰다.
그렇게 해서 생겨난 CD는 852장, DVD는 790장이나 된다(지금도 집구석 어딘가에 꼭꼭 숨어 있다). 군 제대 이후 이 글을 쓰는 오늘날까지 감상한 영화(TV 드라마 포함)의 총편수는 (중복 감상 포함해) 무려 4,300편이 넘는다. 양으로만 따지면 나도 뭇 영화광들에게 절대 뒤지지 않는 영화광이다.
<'은막 위의 예술', 영화> |
많이 봤다고 해서 리뷰를 잘 쓰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감상의 질은 어떠한가? 대량 생산이 반드시 질적 향상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듯 영화를 많이 감상했다고 해서 감상의 질이 높아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은 내 블로그에 산적해 있는 별 볼 일 없는 영화 리뷰들이 방증하고도 남는다. 제아무리 영화 리뷰를 빙자한 자기 만족적 글쓰기라고 변명해도 나의 영화 리뷰는 4천 편이 넘는 영화를 감상한 사람의 글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형편없다. 과민대장증후군으로 고생하는 나의 소화기관이 음식물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는 갑갑한 병증이 나의 지적 활동에도 영향을 미쳐 영화와 책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는 듯하다. 영화에 대한 지식이 전무후무하다 보니 무늬만 영화 리뷰지 실상은 영화와는 동떨어진 신변잡기식의 글쓰기가 되기 일쑤다. 맥이 없고 산만하다. 그래서 댓글도 전무후무하다.
그런 내가 영화평론가 주성철이 쓴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꼭 알아야 할 70가지』를 찾은 것은 나의 칙칙한 리뷰에 좀 더 다양한 때깔을 더하고 싶은 건전하고 지적인 욕망 때문이라고 솔직하게 말 못 할 것도 없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영화평론가가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라고 추천한 작품 중 내가 본 영화가 과연 몇 편이나 되는가 하는 자족적인 호기심이 더 컸으리라. 예상대로 주성철 영화평론가가 추천한 대부분 영화를 한 번 이상 봤었다. 하지만, 예상대로 대강의 줄거리조차 기억하는 영화는 거의 없었다(참고로 4천 편이 넘는 영화를 일일이 기억할 수 있는 것은 내 기억력이 천재적이어서가 아니라 감상한 영화를 착실하게 문서에 기록한 성실함 때문이다). 변명일지도 모르겠지만, 내 생각에 영화는 감상 시간과 감상에 드는 노력이 책에 비해 적게 드는 만큼 감흥의 깊이와 그것의 수명도 책만큼은 못하다.
아무튼,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꼭 알아야 할 70가지』는 목숨이라도 걸듯 영화에 깊이 파고드는 영화평론가가 아니라면 쓸 수가 없는 영화에 대한 가지각색의 이야기로 꽃을 피운다. 촬영장에서만큼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했던 감독의 영향력이 예전만큼 못한 현실과 ‘투자’와 ‘흥행’이라는 대세를 내세워 감독을 좌지우지하려는 대형 영화제작사들, 저조한 흥행을 참신한 아이디어로 극복하기보다는 여러 명의 스타 배우로 때우려는 캐스팅의 인해전술 등 영화에 얽힌 영화만큼이나 재미있는 영화인들의 영화 같은 에피소드는 좀 더 풍부하고 세밀한 영화 감상을 위한 지적 밑거름이 될 것이라는 예의 바른 칭찬으로 굳이 포장하지 아니더라도 그 자체만으로도 재밌는 글이다.
또한, 영화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둘째치고 글로 먹고사는 사람이라 그런지 신혼집처럼 깔끔하게 정돈된, 그리고 노릇노릇하게 구워지는 삼겹살에서 흘러내리는 기름처럼 위트가 번지르르하게 문장은 질투가 날 정도로 읽는 재미가 있다.
아, 나도 이런 감질나는 리뷰를 쓰고 싶다고 소리 없이 절규하며 몸부림쳐보지만, 그것은 다롱이가 내 이불 위에서 잠자다 말고 난데없이 뒹구는 행동보다 의미 없는 절망의 뒤끝일 뿐이다. 난 그저 글을 잘 썼다는 칭찬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지나가는 소리로라도 ‘아, 이런 리뷰도 있구나.’ 하는 인상 정도만 남기면 더 바랄 것이 없다.
비디오방에서 ‘희생’을 감상한 이유
영화 「희생」을 언급하니 고3 때 추억을 끄집어내지 않을 수가 없다. 내가 「희생」을 처음 감상한 것은 믿어지지 않게도 고3 때다. 비디오방이 우후죽순 생기기 시작하고, 비디오방에 보통 사람은 공짜로 틀어줘도 안 볼 「희생」이란 고달픈 영화가 버젓이 얼굴을 내밀고 있을 정도로 나름 건전함(?)을 유지하던 그때 친구와 함께 독서실 옆에 있는 비디오방에서 서비스로 주는 새우깡을 사이좋게 나눠 먹으며 「희생」을 봤던 기억이 신기하게도 해마체(海馬體)에 여전히 간직되어 있다.
그렇다면 당시 영화광도 아닌 내가, 영화 잡지도 읽지 않던 내가 무슨 기구한 사연으로 아는 사람만 알고 그 아는 사람들조차 실제 감상하기를 꺼리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를 찾았을까? 그것도 비디오방에서, 그것도 여자친구가 아닌 남자친구와 함께!
그것은 단순히 긴 상영시간 때문이다. 언제부터인가 2시간 이상의 장편 영화가 즐비하게 되었지만, 그땐 그렇지 않았다. 같은 값이면 양이 많은 음식을 사 먹는 것이 장땡이듯 같은 값이면 긴 영화를 보는 것이 남는 것으로 생각한 친구와 난 무조건 긴 영화를 찾다가 「희생」에까지 이르게 되어 결국 청춘의 모든 인내심을 희생하게 된 것이다. 손님을 유혹하는 창녀들의 현란한 드레스만큼이나 오색찬란한 비디오 케이스로 가득 찬 선반에서 단지 상영시간이 길다는 이유만으로 「희생」을 선택한 우리도 허무맹랑했지만, 비디오방 같은 곳에 어쩌자고 그런 영화를 갖다 놓을 생각을 했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그 비디오방 주인도 괴짜다.
고3 수험생답게 비상한 집중력을 발휘에 영화를 끝까지 보긴 했지만, 기억에 남은 것은 커다란 나무와 그 옆에 있던 집 정도뿐으로 사실상 아무것도 없다고 보는 것이 정답이다. 소위 말하는 ‘거장의 예술 영화를 졸지 않고 끝까지 본 것에 대한 알량한 자족감이 전부랄까?’라고 지금은 말할 수 있지만, 내 기억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이 거장이라는 것을, 그리고 「희생」이 예술 영화란 사실을 그땐 몰랐다. 「희생」은 그저 비디오방에서 고를 수 있는 영화 중 상영시간이 젤 긴 영화였을 뿐이다.
이렇게 옛 추억을 곰곰이 회상해보니 비디오방에서 「희생」을 감상했을 때의 그 집중력을 공부에도 고스란히 발휘할 수 있었더라면 지금 나의 삶은 뭐가 달라져도 달라졌을 것이라는 알싸한 회한만 남는다.
<만약 내가 감독이 된다면 어떤 영화가 탄생될까> |
‘타인의 삶을 엿볼 수 있으니까요’
한창 영화에 빠져 있던 시절, 술잔이 영사기 필름처럼 돌고 도는 영화 동호회의 오프라인 모임에서 누군가가 나에게 ‘왜 영화를 보느냐’라고 물었던 적이 있다. 평범함을 본능적으로 꺼리는 난 찰나 같은 뜸을 들인 끝에 ‘타인의 삶을 엿볼 수 있으니까요’라고 별로 대단한 것도 없는 고만고만한 대답을 질문자의 면상을 후려치듯 내뱉었던 기억이 있다. 다소 엉큼한 발상이긴 하지만,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다.
타인의 삶이니까 그렇게 재밌는 것이고, 타인의 삶이니까 이러쿵저러쿵 왈가왈부 떠들어댈 수 있는 것이다. 타인의 삶이니까 마냥 웃을 수 있고, 타인의 삶이니까 미련 없이 눈물을 흘릴 수 있다. 당신이 쏘우(Saw)나 데스티네이션(Final Destination)의 주인공이 되어서도 여유롭게 웃을 수 있을까? 「지금, 만나러 갑니다(いま、会いにゆきます)」 같은 일이 내게 일어났다면 오장육부가 녹아내리는 상심을 온전히 견딜 수 있을까? 사람도 아니고 기계도 아닌 로보캅이 되어 범죄를 소탕하는 일이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일인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개인적으로도 재밌는 일일까? 만약 그것이 내 돈이라면 지존무상(至尊無上)처럼 헌신짝 버리듯 판돈을 걸 수 있을까? 결말이 해피엔딩인 영화도 얼마든지 있지만 그렇다고 그 해피엔딩을 거저 주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만약 우리가 행복할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운명이 지긋이 평범하기 때문이다. 영화처럼 산다는 것은 바쁘고 피곤하고 고달프고 위험천만하다. 우리가 타인의 불행에서 나의 행복을 점지하고, 타인의 위험에서 나의 안전을 확인하고, 타인의 빈곤함에서 나의 풍요로움을 만끽하고, 타인의 죽음에서 내 생명의 유한함을 망각하는 속물이라면, 영화는 그런 속물들의 위안용 제물을 양산하는 장인이다.
책과 영화는 관객이 살아온 곡절과 인생 경험과 그날그날 기분에 따라 헤아릴 수 없는 재미와 감흥을 반향시킬 뿐만 아니라 타인의 삶을 엿보는 관음적인 쾌감과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그리고 경험할 수 없는 삶에 대한 갈구를 대리 만족시켜주는 건전한 수단이기도 하다. 영화평론가 주성철의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꼭 알아야 할 70가지』는 영화가 선물하는 재미와 감흥, 쾌감, 치유 등의 효과를 한 단계 끌어올리는 영화편력에 대한 일가견이자 그 시작이다.
0 comments:
댓글 쓰기
댓글은 검토 후 게재됩니다.
본문이나 댓글을 정독하신 후 신중히 작성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