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체 2부 | 류츠신 | 암흑의 숲, 페르미 역설을 해석하다
'모두 어디에 있는가?', 페르미 역설
세상 그 누구보다 지적 외계생명체의 존재를 확신하는 나 같은 사람들의 꿈 같은 기대를 단숨에 짓뭉개버리는 가설이 있다. 바로 원자 폭탄의 아버지라 불리는 물리학자 엔리코 페르미(Enrico Fermi)가 제안한 ‘페르미 역설(Fermi paradox)’이다.
추리소설만큼이나 SF 장르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부끄럽게도 류츠신(劉慈欣)의 『삼체 2부: 암흑의 숲(three-body: The Dark Forest)』를 통해 페르미 역설을 처음 알게 되었다. 페르미 역설에 대해 인터넷에서 찾을 수 있는 그 어떤 설명보다 명확하고 이해하기도 쉬운 류츠신의 설명을 그대로 실어보면, 다음과 같다.
이론상으로 인류는 100만 년의 시간 동안 은하계의 각별로 날아갈 수 있다. 그렇다면 외계인이 인류보다 100만 년 일찍 진화했다면 현재 그들이 지구에 도착했어야 한다. 이 역설이 설득력을 가지는 이유는 은하계의 두 가지 사실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 은하계는 약 100억 년이 넘을 만큼 아주 오래됐다. 둘째, 은하계의 직경은 약 10만 광년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외계인이 광속의 1,000분의 1 속도로 우주를 여행한다면 그들은 약 1억 년이면 은하계를 횡단할 수 있다. 은하계의 나이와 비교하면 이 시간은 아주 짧은 시간이다. 그러므로 만약에 정말로 외계인이 있다면 그들은 이미 오래전에 태양계에 도착했어야 한다. (『삼체 2부: 암흑의 숲』 중에서)
외계인 존재에 대한 논의가 대부분 추상적인 데 반해 페르미 역설은 항성 간의 실제 거리 관측과 시간이라는 과학적 근거를 기반으로 하므로 그 어떤 가설보다 높은 타당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나처럼 지적 외계생명체의 존재를 확신하는 사람이 이 역설을 이해하는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곤두박질할 정도까지의 충격은 아니더라도 마음속 어딘가 공간을 차지하고 있던 (지적 외계생명체의 존재를 확신하는) 신념이 강풍에 흔들리는 나무처럼 위태로워진다. 잠시라도 절개를 지킬 생각이 없었는지 나의 육체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기어코 신념을 배반한다. 신기하게도 뭔가를 배신할 기회가 왔을 땐 머리보다 몸의 반응이 더 빠르다.
사실 그들의 존재 여부는 내 삶과는 무관하며 당연히 내 일생의 꿈, 희망, 소망 등등 이런 세속적인 것들과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난 신 따위는 믿지 않으니 그들을 신격화할 수도 없다. 그렇지만, 아득한 시간의 역사와 무한처럼 느껴지는 공간을 가진 우주에 우리만 존재한다는 것은 왠지 모르게 견딜 수가 없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것처럼 슬픈 것도 아니고, 학대당하거나 멸종 위기의 동물을 볼 때 느끼는 애처로움도 아니다. 막막한 앞날이 문득문득 떠오를 때마다 마음을 떡방아 찧듯 짓누르는 불안감도 아니고, 이 세상에 혼자 남겨진 듯한 외로움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꼭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그저 견딜 수가 없다.
혹은 어느 날 문득 상상 속의 친구가 영영 사라진 것을 알게 되었을 때의 어린이가 느낄법한 가슴이 덜컥하는 그런 감정, 즉 공상 세계에서 현실 세계로서의 추락이 가져오는 나와 사회에 대한 의무감과 그로 인해 조금씩 싹트는 삶에 대한 애착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공상의 세계에서조차 지위를 잃어버린 자에 대한 동정과 그 부질없는 공상이 정말로 부질없는 공상일 것이라는 자각이 나를 슬프게 한다.
한마디로 페르미 역설은 어떤 이유로든 지적 외계생명체의 존재를 믿는 모든 사람이 극복해야 할 저주 같은 난관이다.
<엔리코 페르미(출처: wikimedia)> |
‘페르미 역설’에 대한 해석, ‘암흑의 숲’
페르미 역설이 성립하려면 문명이 얼마나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는가 하는 문명의 지속성, 지적 생명체를 실은 우주선의 항성 간 항해가 얼마나 오랫동안 가능한가 하는 기술적 문제 등의 여러 가지 전제조건을 만족해야 한다. 그 중 ‘지구를 방문한 외계인이 인류와 소통하거나, 소통하지 않더라도 어떠한 방법으로든 자신들의 존재를 인류가 확인할 수 있는 흔적을 남긴다’라는 전제 역시 만족해야 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다른 행성에 존재하는 지적 외계생명체와 교류를 시도하는 것이 그것을 시도하려는 문명에 어떠한 이득을 줄 수 있을까?’
우리는 다른 외계 문명과 접촉한 경험이 아직 없으므로 오직 사고 실험을 통해서만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다. 스스로 사고해보면 알겠지만, 여러 상황이 펼쳐질 것이다. 호혜주의에 바탕을 둔 평화와 번영도 가능할 것이고, 양 문명에 일대 혼란을 가져다줄 수도 있다. 의심의 사슬을 극복하지 못하면 전쟁이 발발할 가능성도 매우 크다. 평화, 혼란, 전쟁, 제법 판돈이 큰 도박이다.
또한, 어느 한 문명의 도덕관념이 우주의 보편적인 도덕관념이라고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외계 문명을 파괴하는 것은 악도 선도 아니고, 어떤 문명이 다른 외계 문명에 의해 파괴당하는 것 역시 악도 선도 아니다. 이것은 인류가 생존을 위해 수많은 종을 멸종시키고, 일부 종은 가축화시켜 매년 수백억 • 수조 마리의 동물을 잡아먹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는 이것을 좋은 일이라고 치켜세우지도 않지만, (소수의 채식주의자나 동물애호가들을 제외하고는) 나쁜 일이라고 비난하지도 않는다. 또한, 인류에겐 ‘인종 청소’라는 암흑의 역사도 있고, 지금도 러시아 같은 패륜 국가는 오직 자기들만의 논리로 우크라이나 침공을 정당화하고 있다. 외계 문명이 우리보다 지능이 뛰어날 수도 있지만 결국 그들은 우리와 다른 종(種)이고, 그들도 마찬가지 입장이다.
이런 상황에서 (어느 문명에 있어서든 제1순위라고 할 수 있는) 생존을 보장하는 가장 간편하고 안전한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침묵함으로써 문명의 존재를 은폐하는 것이고, 존재가 드러난 문명은 일찌감치 파괴함으로써 만약을 (훗날 기술이 발달한 그들이 같은 이유로 다른 문명을 파괴할 수도 있다!) 대비하는 것이다. 멀리 떨어진 외계 문명을 탐색하고 검토하는 데 드는 비용과 시간과 노력보다 한 번의 공격으로 파괴할 수 있다면 그러는 편이 간편하고 뒤끝도 없다.
이것이 류츠신이 『삼체 2부』에서 제안한 페르미 역설에 대한 해석인 ‘암흑의 숲’ 이론이다. 우주라는 ‘암흑의 숲’에서 위치를 드러내는 문명은 ‘나 잡아봐요’라고 외치는 것과 같다. 수십만, 혹은 수백만 문명이 이 외침을 무시하겠지만, 그중 단 하나의 문명이라도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인다면 한 문명의 천진난만한 희망이 담긴 ‘외침’은 곧 그 문명을 멸망시키는 ‘자살’로 귀결될 수도 있다.
수십 년 사이 거의 사라진 UFO 소식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신문 • 잡지 등 대중매체에 실려 세상을 간간이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소재 중 하나가 UFO 출현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UFO 출현 소식이 확 줄었다. 왜 그럴까?
UFO를 찍은 사진이나 동영상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분석하는 기술이 발달해서? 현대인은 UFO를 믿을 만큼 순진하지 않아서? 이도 아니면, 우주사회학의 기본 공리인 ‘기술 폭발’ 때문에?
인류의 기술은 최근 산업혁명 이후 눈부시게 발전했고, IT 기술은 최근 수십 년 사이에 폭발적으로 발달했다. 만약 이런 인류가 항성 간 여행이 가능할 정도로 뛰어난 기술을 보유한 지적 외계생명체와 기술적 교류가 이루어진다면, 인류의 기술 수준은 향후 수십 년 사이에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비약적으로 높아질 것이다. 그러다가 기술을 전수해 준 외계인을 뛰어넘을 수도 있다. 기술 수준이 역전되었을 때, 인류가 인류에게 기술을 전수해 준 외계 문명을 정복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인류사에서 자식이 부모를 배신하고 제자가 스승을 배반하고 신하가 군주를 배반하는 일이 어디 하루 이틀 일인가?). 과거 유럽 문명이 중국으로부터 다양한 기술을 전해 받은 후 훗날 그 기술을 이용해 도리어 중국을 정복하려고 하지 않았던가?
이런 이유로 수십 년 전까지 지구를 방문한 UFO가 ‘기술 폭발’로 인한 ‘기술 역전’을 염려해 더는 지구를 방문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혹은 방문하더라도 과거처럼 그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특히 최근 수십 년 사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인류의 IT와 우주 기술은 UFO에 타고 있던 외계인을 놀라게 했을 것이고, 그로 인해 그들은 더는 인류를 얕잡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이런 잠재력을 가진 문명에 자신들의 기술이 노출된다면 그 화를 감당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는 더 이상의 노출은 피하는 것이리라.
<삼체 애니메이션 스틸컷(출처: douban)> |
소중한 인연 같은 책...
삼체 3부를 읽고, 곧바로 1부와 2부를 읽으니 인류의 지나간 역사를 기록한 사서를 읽는 듯한 묘한 기분이다. 특히 2부는 문학적 표현력이 1부를 뛰어넘는다는 점에서 SF라는 장르가 스스로 옭아맨 가능성과 잠재력의 한계를 우주처럼 무한히 확장한다. 텍스트를 읽는 즐거움까지 세심하게 준비한 장르소설은 매우 희귀하다는 점에서 류츠신의 소설은 확실히 격이 다르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딸을 시집보내는 부모의 마음 같은 아쉬움이 그득한 눈으로 넘겨지는 페이지를 바라보게 만들고, 그 페이지를 마지못해 넘기는 손가락 역시 수전증 환자처럼 떨릴 지경이다. 보통은 시간이 안 간다는 듯 시계를 쳐다보는 것처럼 책의 남은 분량을 확인하곤 하지만, 삼체의 경우는 페이지가 얼마나 남았을까 하는 안타까움으로 남은 분량을 확인한다. 책의 남은 분량은 1분 1초 흘러가는 시간을 타고 진자처럼 좌우로 움직이기를 반복하는 눈동자의 분주함에 따라 내 기대와는 반대로 줄어들기 마련이다.
그런 지극히 당연한 독서의 이치를 모르는 바 아니지만, 처음엔 너무 커서 배불리 먹고도 남을 것 같았던 케이크가 한입 한입 위장 속으로 사라지는 간단한 생리 법칙을 견디지 못하고 황량하게 줄었을 때의 그 아쉬움이 삼체를 읽는 내내 나를 괴롭혔다. 이겨낼 수도 없고, 이겨내기도 싫은 이 달콤하고 쌉싸름한 아쉬움이야말로 시간처럼 끝없이 이어질 독서 릴레이를 자극하는 원천이지 않을까 싶다. 인생의 가치가 만남과 이별의 연속에서 기인하는 기쁨과 슬픔인 것처럼 독서의 가치도 좋은 책과 맺어지고 헤어지는 기쁨과 슬픔의 연속이다. 내 인생에 있어서 삼체 3부작은 좋은 사람과 맺어지는 소중한 인연 같은 몇 안 되는 좋은 책 중 하나다.
끝으로 페르미 역설에 대해 짤막한 반론을 펼치자면, 페르미 역설이 외계인의 존재를 완벽히 부정할 수 없는 이유 중 하나는 만약 그들이 인류가 탄생하기 전, 즉 너무 오래전에 태양계에 도착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삼체 1부 | 류츠신 | 외계 지적생명체, 인류의 구원인가? 아니면 재앙인가?」
「삼체 2 암흑의 숲 | 류츠신 | 엄밀한 과학적 상상력과 풍부한 문학적 창작력이 일궈낸 놀라운 소설」
「삼체 3부 | 1세기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SF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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