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할아버지가 탈옥한 이야기 | 옌거링 | 심금의 현을 퉁기는 감개의 성찬
‘대약진’과 ‘문화대혁명’도 구분 못 하는
옌롄커(阎连科)의 『사서(四书)』도 그러하지만, 옌거링(严歌苓)의 『나의 할아버지가 탈옥한 이야기(陆犯焉识)』에 대한 인터넷 서점 소개 글은 중국 현대사에 대한 대한민국의 무지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나의 할아버지가 탈옥한 이야기』는 책을 간략하게 소개하는 글이나 부제목 등에 굳이 ‘문화대혁명’을 들먹어야 할 정도로 ‘문화대혁명’과 크게 관련 있는 이야기는 아니다.
『사서』(「사서 | 누가 그들로 하여금 인육을 먹게 하였나?」)의 작품 배경은 ‘문화대혁명’이 아니라 그보다 몇 년 더 과거인 ‘대약진’ 시기이고, 옌거링의 『나의 할아버지가 탈옥한 이야기』는 어느 홍보 문구처럼 ‘문화대혁명이 빚은 개인과 가족의 비극’이 아니라 ─ 프랑크 디쾨터(Frank Dikoter)의 책 제목을 참고하면 ─ ‘해방의 비극이 빚은 개인과 가족의 비극’이라고 홍보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
다른 곳도 아닌 책을 다루는 출판사에서조차 중국 현대사에서 일어난 정치적 탄압이나 압제, 정치 운동,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나은 불행한 결과를 모조리 싸잡아 ‘문화대혁명’ 탓으로 돌리는 역사적 몰이해가 존재하는 것을 보면 한국인은 어지간히도 중국을 모르고 있다는 (아니면 무시하고 있다는) 우려가 든다. 중국이 미국과 맞먹으려는 지금 얼마 지나지도 않은 중국의 과거사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중국과 대등한 입장으로 우호적이고 상호 협력적인 관계를 지속시켜 나갈 수 있단 말인가? 중국을 모르면서 어떻게 중국인의 주머니를 열 수 있는가 말이다.
사실 톡 까놓고 말해 마오쩌둥이 사주한 정치 운동이나 대중 선동은 해방 후 중국에서는 거의 일상처럼 일어났고, 그때마다 인민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음흉하고 변덕스러운 속마음처럼 운동의 정체를 알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해서 이해하기도 쉽지 않다. 그렇다 하더라도 ‘대약진’과 ‘문화대혁명’을, 그리고 해방 초기에 벌어진 정치적 탄압 및 숙청과 ‘문화대혁명’을 구분 못 하는 것은 내가 생각해도 정도가 심하다.
장이머우가 감독을 맡고 천다오밍, 공리가 주연한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5일의 마중(归来) | 평범한 소재를 평범하지 않은 경지로」
<후평 반혁명 조직 사건을 다룬 만화(출처: 후평 반혁명 조직 사건)> |
실제 죽음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정치적 죽음
『나의 할아버지가 탈옥한 이야기』 주인공 루옌스(陸焉識)가 ‘반혁명적’이라는 만능 표딱지를 달고 잡혀간 시기는 1954년으로 나온다. 그런데 프랑크 디쾨터의 『해방의 비극(The Tragedy of Liberation)』이란 책을 보면 1950년 10월 <반혁명 진압 운동> 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대공포 정치는 궁극적으로 모든 지식인과 교사들이 국가의 충실한 하인이 된 1952년 말에는 끝난 상태다.
루옌스가 잡혀들어간 1954년은 가오강(高崗)을 비롯한 고위 간부들이 숙청된 시기다. 고로 처세술이 뛰어난 것은 아니지만, 특별나게 잘못한 것은 없는 루옌스가 ‘반혁명’ 죄로 잡혀들어간 것은 좀 특이한 경우다. 하지만, 마오쩌둥의 정치 탄압은 일시적이기라기보다는 거의 일상적이었기에 재수 없으면 (보통은 누군가에게 밉보이거나 원한을 사면) 루옌스처럼 특별히 반혁명적이지 않은 작자도 반혁명죄로 잡혀들어갔다(맘에 안 들면 ‘빨갱이’라는 죄목으로 잡아 처넣었던 한국의 반공 시대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루옌스 같은 경우는 대세에 합류하라는 옛 친구의 요구를 끝내 거절한 것이 화근이었을 것이다.
루옌스의 사정이야 어찌 되었든, 작가이자 예술 이론가인 후평(胡風, 실존 인물로 ‘후평 반혁명 조직 사건’에 연루되어 조사받은 사람만도 2천1백 명이 넘었고 체포된 사람만 92명이라고 함)은 1955년 6월에 반동적인 집단의 수장이라는 이유로 기소되었고, 비공개 재판에서 징역 14년형을 선고받았지만, 형기를 훌쩍 넘긴 1979년에야 석방되었다.
이쯤에서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당시 루옌스처럼 억울하게 옥살이한 사람이 한두 명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정도다. 그렇다고 이들의 목에 걸린 ‘반혁명’이라는 어마어마한 죄목을 뒷받침할 만큼 뚜렷한 증거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물적 증거는 전무후무했다. 인민재판 대회에서 무대에 선 반동들을 향한 인민들의 함성과 욕설이 유죄를 판결짓는 판사의 법봉을 대신하는 시대였다. 영문도 모른 채 잡혀가는 처지에선 차라리 성의있게 증거 조작이라도 해서 그럴듯하게 죄목을 붙여주는 게 그나마 체념하기도 쉬웠을 것이다. 대부분 의심과 시기와 질투에서 비롯된 사적 불화나 중상모략, 그리고 응당 이에 뒤따르기 마련인 밀고가 가장 큰 위협이자 가장 확실한 증거이자 뚜렷한 화근이었다.
인민이 서로 의심하고 서로에게 죽창을 겨누게 한 원흉은 바로 마오쩌둥의 망상에서 기인한 병적인 의심이다. 오죽했으면, 중국 공산당 혁명 원로였던 천윈(陈云)은 마오쩌둥(毛泽东)이 1956년에 죽었더라면 중국에서 가장 위대한 지도자로 칭송받았을 것이라고 말했을까(내가 보기엔 1956년도 너무 늦다).
내가 굳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루옌스 가족사의 비극은 중국 현대사가 인민에게 입힌 깊은 상처와 긴밀하게 엮어있기에 그 배경을 알면 좀 더 생생하게 읽어나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 때문이다. 잘 모르는 독자는 특별한 죄도 없고, 그렇다고 후평처럼 공산당에 비판적인 태도를 보인 것도 아닌 사람이, 감옥과 노동 수용소에서 20년 넘게 비인간적인 생활을 겪었다는 일이 좀처럼 믿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시 중국에는 그런 일이 스탈린의 대숙청 시기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는 않았다. 또한, 한 사람의 정치적 사형이 그 사람과 연관된 가족에게까지 미치는 뿌리 깊은 독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루옌스의 큰아들 루쯔예가 기필코 아버지를 부정하려는 발악과도 같은 몸부림은 그저 불효자의 개망나니 짓으로만 보일 것이다.
루옌스 같은 정치범은 사형수보다도 못한 대우를 받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들이 얼마나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았는지 알 수가 있다. 범죄자는 그저 죄를 지은 인민일 뿐이고, 형기를 마치고 다시 사회로 돌아가면 다시 인민으로 행세할 수 있지만, 루옌스처럼 정치적으로 끝장난 사람은 더는 인민이 아니었다. 설령 형기를 마치고 풀려난다고 해도 정치범이라는 꼬리표는 보이지 않는 수족이나 마찬가지여서 그 사람이 죽을 때까지, 아니 죽어서도 그 사람에게서 떨어지지 않는다.
중국의 인권 문제는 중국 공산당이 인민에게 가한 잔혹사와 깊이 연관되어 있기에 금기시될 수밖에 없다. 중국이 인권을 인정하면, 깊고 깊게 맺힌 한들이 봇물 터지듯 터져 나와 대륙을 휩쓸며 중국을 혼란에 빠트릴지도 모른다. 그래서 중국은 과거의 상처를 짊어진 사람들이, 그리고 그들과 연관된 사람들이 모두 죽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일본 정부가 위안부 희생자들과 그들의 가족이 모두 죽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처럼 말이다.
지금까지의 인류사에 기록된 개인의 불행사를 모두 합쳐도 1950년대에서 문화대혁명이 끝나는 1980년대까지 중국 현대사에서 벌어진 인민들의 불행사를 다 합친 것만 못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중국의 현대사는 인민들이 흘린 눈물과 피, 그리고 그 지독한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고약한 고름으로 얼룩져있다. 인민들의 온몸에 뚫린 구멍이란 구멍으로 흘린 시련과 고초의 증거를 합치면 장강도 범람할 것이다. 그 수많은 얼룩 중에서 한 점을 콕 집어 올린 다음 거기에 귀를 갖다 대고 마법의 힘을 빌려 얼룩의 사연을 가만히 들어본다면, 『나의 할아버지가 탈옥한 이야기』 같은 이야기가 나오지 말라는 법도 없다. 불과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중국은 그런 곳이었다.
심금의 현을 퉁기는 감개의 성찬
그러므로 옌거링은 마법사의 귀를 가진 사람이다. 그냥 ‘역사의 비극’이라는 단어 몇 토막, 혹은 기껏해야 ‘노동 수용소 명부’라는 통계 속에 묻혀버릴 수도 있었던 누군가의 인생사를 이렇게 세밀하고도 생생하게 끄집어냈으니 말이다. 또한, 그는 마법사의 손을 가진 사람이기도 하다. 그토록 비인간적인 이야기를 인간적인 생명이 흘러넘치는 따뜻한 이야기로 탈바꿈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토록 애달프고 서글픈 이야기를 고상한 아름다움으로 빛나는 감동적인 이야기로 승화시킨 수려하면서도 구성진 문장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작가의 해학이 넘실대는 복스러운 텍스트는 우리로서는 상상조차 해볼 수 없는 참혹한 운명을 짊어진 한 가련한 남자가 빚어내는 참담한 하루하루를 마치 「정글의 법칙」 같은 예능 프로그램으로 둔갑시킨다. 단 하루라도 노동 수용소를 경험한 사람들에겐 참으로 무척이나 잔인한 말로 들리겠지만, 사실이 그러한 걸 난들 어찌하오리까.
끝내 완전무결한 해피엔딩을 보지 못한 루옌스와 펑완위의 사랑은 가뜩이나 텅 빈 나의 가슴 한구석을 사정없이 아리는 찌르르한 슬픔을 전해주고, 두 사람의 사랑이 한 끗 차이로 어긋나버리는 운명의 잔혹함은 나의 허한 육체를 너들너들하게 만드는 애틋함의 극치를 선사한다. 루옌스의 때늦은 뉘우침과 깨달음은 독자의 탄식을 자아내고, 그 깨달음이 영글 대로 영글어 과감하게 탈옥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독자의 엉덩이를 절로 들썩이게 할 정도로 긴박감이 넘친다. 그러나 루옌스가 탈옥한 목적(아내 펑완위를 만나는 것)을 달성하기 직전에 자수하는 장면은 팽팽해진 독자의 신경을 매몰차게 단칼로 잘라버리는 허탈함의 극치이자 아쉬움의 절정이다.
이렇게 작가는 시종일관 이야기보따리에서 한 움큼씩 이야기를 풀어내 가며 독자의 예민한 감수성을 요리조리 요리한다. 마치 피리 부는 사나이에게 현혹되어 끌려가는 아이 중 한 명이 된 기분이랄까? 아니면 작가의 붓이 가는 대로 정신없이 놀아나는 기분이랄까? 아슬아슬하게 엇갈린 사랑의 애잔함을 달콤하면서 쌉싸름한 여운으로 마무리한 것도 나쁘지 않지만, 독자를 자석처럼 끌어당기는 매력적인 이야기와 그 매력적인 이야기에 걸맞은 빼어난 문장력, 그리고 그 두 요소가 절묘하게 아우러져 거문고를 연주하듯 심금의 현을 퉁기며 신맛, 쓴맛, 단맛, 짠맛 등으로 은유할 수 있는 감개의 성찬은 가히 독자의 넋을 빼놓고도 남는다. 조금 통속적인 말로 표현하자면 『나의 할아버지가 탈옥한 이야기』는 폭풍 같은 흡입력을 발산하는 소설이랄까?
<하늘 아래 서 있는 ‘나’는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 누구일까?> |
곁에 있을 때 잘하자, 응?
좋은 추리소설은 한순간 독자를 탐정으로 만들고, 좋은 문학은 한순간 독자를 사색가로 만든다. 좋은 추리소설은 독자의 사고 모듈을 작동시킴으로써 범죄의 구성을 추리하게 만들고, 좋은 문학은 독자의 감수성을 자극함으로써 인생의 의미를 되새기게 만든다. 문학을 통해 살아보지 못한 타인의 인생을 음미하는 고상한 감상은 자신이 걸어온 길을 반추하는 뜻깊은 사색으로 이어진다.
문학은 가끔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도 좋지만, 역시 가끔은 내 발바닥을 내려다보면서 끝없이 펼쳐진 하늘 아래 한없이 조그마한 누가 서 있는지를 되짚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말해준다. 꼭 이런 닭살 돋는 말이 아니더라도, 내가 살아볼 수 없고 내가 살아보지 못한 무수한 삶을 문학이라는 우아하고 지적인 만남을 통해 마음으로 경험하는 일은 지구상에서 오직 사람만이, 그것도 다소간의 교양을 갖춘 사람만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독서는 참으로 인간적인 행위다. 그래서 돈을 잔뜩 벌어놓고 쓰지 못하는 사람도 바보 멍청이지만, 애써 글자를 배워놓고 책을 읽지 않는 사람도 바보 멍청이다.
해가 지면 아궁이에서 저녁밥 짓는 구수한 연기가 피어오르고, 달이 뜨면 잘 모르는 개가 무단히 짖는다. 5,000자가 넘는 긴 글을 지었으니 이제 슬슬 무던하게 마무리를 지을 때가 되었다. 사실 루옌스의 비극은 그가 억울하게 20여 년 동안 옥살이한 것보다는 그 20여 년 동안의 감금과 추방이라는 고통스러운 경험 덕분에 아내 펑완위를 향한 사랑을 뒤늦게 깨우친다는 점에 있다. 만약 그가 반혁명죄로 끌려가지 않고, 그래서 남들이 우러러보는 교수의 인생을 계속 살아갔더라면 어떠했을까? 그가 나이를 먹고 육체의 쇠락을 뼈저리게 겪게 되면 아내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깨달을 수는 있겠지만, 그 깨달음이 아내를 만나려고 탈옥을 감행한 무기수가 품을법한 그런 격렬한 애정까지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지적이고 우아하고 멋진 루옌스는 자유를 추종하는 사람답게 여러 여성을 편력하다 생을 마감했을 것이고, 펑완위는 늘 그래왔던 대로 침묵이 그녀가 마땅히 지켜야 할 최고의 도리인 양 그의 곁을 조용히 지켰을 것이다(여담이지만 펑완위의 매력을 알게 되면 수다스러운 여자가 얼마나 천박해 보이는지 새삼스레 깨닫게 된다). 여기서 아주 진부한 경구 하나를 들이대자면, 가까이 있을 때 그 소중함을 모르다니 사람이란 얼마나 어리석은가? 물론 이러한 결말은 순전히 나의 빈약한 상상력의 결과물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루옌스가 20여 년 넘게 옥살이하지 않았더라도 어느 날 갑자기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아내에 대한 사랑을 번쩍하고 깨닫게 되었을까? 인생이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로 가득 찼으니, 우리는 그저 생각이 흐르는 대로, 그리고 사고가 미치는 곳에서 바르르 끓어오르는 상상 속에 자신의 희망을 약간 내비칠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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