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2/13

수기 모형 | 드레지면서도 새콤달콤한 스토리텔링 프로세스

수기 모형 | 모리 히로시 | 드레지면서도 새콤달콤한 스토리텔링 프로세스

소설 리뷰 | 수기 모형 | 모리 히로시 | 드레지면서도 오렌지처럼 새콤달콤한 스토리텔링 프로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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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배에서 기쁨을 맛보다

늘 그래왔듯 이번에도 나의 가설은 보기 좋게 빗나갔고, 그럼으로써 또 한 번 모리 히로시(森博嗣)에게 보기 좋게 패했다. 그런데도 기분이 우울하기는커녕 유쾌하기만 하다. 어디 유쾌할 뿐인가. 뇌세포에서 시작되어 물감 번지듯 온몸으로 퍼진 나의 이 지적 유쾌함을 만천하에 알릴 수만 있다면, 내 기꺼이 한 마리의 온순한 강아지가 되어 풀밭에라도 나뒹굴겠다. 얼씨구 절씨구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다.

이제는 모리 히로시가 구사하는 미스터리의 패턴을 어느 정도 눈치챌 만도 하고, 그래서 그런지 사건을 설명하려는 의지와 노력의 결실이라 할 수 있는 내 가설도 덩달아 수준이 올라가는 듯하다. 비록 패배를 깨끗하게 인정했지만, 나의 가설은 ─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 또 다른 방식으로 사건을 설명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은 된다.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고 분식집 개 삼 년이면 라면을 끓이고 피시방 개 삼 년이면 온라인몰에서 사료 정도를 구매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두 가지 꾸준함, 즉 추리소설을 꾸준히 읽어온 것과 읽는 데만 만족하지 않고 ─ 트릭을 풀고 사건을 설명하려는 ─ 나만의 가설을 세우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은 덕분에 이제 나의 가설은 얼토당토않은 수준에서 벗어난 지는 이미 호랑이 시절 이야기가 되었다. 지금은 사건 전체는 아니더라도 그 일부분을 어설프게나마 설명할 수 있는 수준에 등극했다고 자부한다.

그런 자부심이 앙상하게 깃들어 있는 나의 가설이 보기 좋게 KO 당했음에도 이렇게 유쾌할 수가 있는 것은 『수기 모형(數奇にして模型)』의 트릭은 우리의 사고 회로 속에 각인된 상식의 허점이 생각보다 엄청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다. 상식의 허점을 노린 것이니만큼 해답을 듣고 나면 별것 아니라고 느껴질 수도 있다. 다만, 대부분의 일상이 좋건 나쁘건 상식적인 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사고는 상식에 고정되기 쉽고, 영리한 작가는 그 빈틈을 노린 것이라 하겠다. 즉, 주어진 명제를 어떻게 해서든 상식적인 수준으로 욱여넣더라도 ─ 상식과 비상식 경계에 있는 ─ ‘살인’이라는 비일상적 상황을, 그것도 사람의 머리통만 범죄 현장에서 깔끔하게 자취를 감춘 괴이한 상황을 상식만으로 풀어내려고 했을 때, 비참하게도 사고(思考)의 허점이 대문짝만하게 뚫릴 수 있다는 것을 모리 히로시의 작품은 매우 유쾌하게 지적한다.

완패당했음에도 이렇게 기분이 좋을 수 있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여러 책 덕분에 도(道라)도 깨우친 것일까? 아니면, 패배에 익숙해지다 못해 해탈한 것일까? 정말이지 바보가 따로 없으며 이렇게 완벽한 바보가 된 것도 생각해보면 정말 오래간만이다. 『수기 모형』은 근래에 읽은 S & M 시리즈 중 나를 가장 즐겁게 해준 책이라고 감히 단언할 수 있다.

소설 리뷰 | 수기 모형 | 모리 히로시 | 드레지면서도 오렌지처럼 새콤달콤한 스토리텔링 프로세스
<추리와 상상의 나래를 한껏 펼쳐라!>

머릿속 ‘가설 공장’을 맘껏 가동하라

한층 더 원숙해진 사이카와 특유의 재치는 실소를 터트리는 경지까지 올라섰고, 새침하면서도 당당한 모에의 막무가내식 활약은 조금도 쇠퇴하지 않았다. 그리고 상식을 뒤집고 사고의 틀을 비틀면서 통념을 깨트리는, 그래서 누군가의 비위를 박박 긁는 도발적인 사고의 발상도 정겹기 그지없다. 여기에 『수기 모형』에는 모에를 감히 ‘모에짱’이라고 부를 수 있는 위대한 인물이 한 명 추가된다. 바로 모에의 사촌오빠이자 크리에이터인 다이고보인데, 사이카와의 친구답게? 아니면 모에의 친척답게? 아무튼, 이 인물도 외모로 보나 말투로 보나 행동으로 보나 한 ‘기인’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사이카와, 모에, 다이고보, 그리고 오랜만에 조연 격으로 재등장한 기타와 ─ 지금까지의 S & M 시리즈 중에서 가장 많은 대사가 주어진 것이 아닌가 추정되는 ─ 구니에다까지 보태져 기인 열전들의 열연은 한껏 불타오른다. 특히 휴대용 비디오카메라를 아무 데나 들이대는 다이고보는 「소년탐정 김전일」에 등장하는 사키를 연상시킨다. 다이고보가 아무 의미 없이 찍어댄 화면 속에 사건을 해결하는 열쇠가 우연히 숨겨져 있다는 설정도 사키와 똑같다. 그러하니 독자는 ─ 볼 수 있다면! ─ 다이고보가 찍은 비디오를 유심히 봐라.

기인 열전을 보는 재미도 재미지만, 역시 S & M 시리즈는 추리와 상상의 나래를 한껏 펼치면서 자신만의 가설을 세워나갈 수 있는 지적 의지와 그 프로세스를 진지하게 즐길 줄 아는 사람이 읽어야 제맛이다. 물론 작가가 흘린 빵조각을 집어먹으면서 충직하게 이야기를 따라가는 재미도 결코 무시할 수는 없지만, 사고하지 않고는 추리의 재미를 온전히 만끽하기는 어렵다. 축구 경기를 관람하는 것도 재밌지만, 직접 경기장을 밝으면서 뛰는 재미는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다는 점에서 추리소설을 읽으며 사고를 게을리하는 자는 작가가 애써 준비한 재미의 절반은 포기한 셈이나 마찬가지다.

추리와 가설의 프로세스를 진득하게 이행하고, 그 사고 과정이 빠지직 일으키는 짜릿짜릿한 지적 스파크를 만끽할 수 있는 독자라면 범인 맞추기 게임 같은 것은 애들 장난이나 다름없으며 거들떠볼 필요도 없는 유치한 게임이다. 이 말은 범인 맞추기가 누워서 떡 먹기처럼 쉽다는 소리가 아니다. 객관식 문제를 찍어서 맞히는 것에는 운이 좋았다는 것 외엔 아무런 의미가 없듯, 단순하게 범인을 맞추는 것보다는 왜 그 사람이 범인인지를 추리하고, 그 추리를 다듬고 보완하고 확장해 사건의 전체적인 윤곽과 그 속에 얽힌 트릭을 설명할 수 있는 가설을 세우는 과정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추리소설을 읽으라는 말이다. 그래야만 하루가 다르게 무사고(無思考) 속에서 익사해가는 뇌세포를 살릴 수 있는 뇌 운동이 될 것이며, 그런 뇌 운동을 통해 한층 더 격이 높은 독서를 할 수 있다.

소설 리뷰 | 수기 모형 | 모리 히로시 | 드레지면서도 오렌지처럼 새콤달콤한 스토리텔링 프로세스
<상식은 깨되 머리통은 깨지 마라>

시종일관 눈에서 뗄 수 없는 소설

오늘은 지나치다고 여겨질 정도로 칭찬 일색이다. 그만큼 『수기 모형』이 마음에 들었으리라. 빗방울이 자동차 앞 유리를 타닥타닥 두드리듯 적당한 난이도의 철학적 화두가 굳은 뇌를 톡톡 두드리며 부드럽게 풀어주는 것도, 와이퍼가 차창에 고인 빗물을 쓸어내리듯 상식의 찌꺼기를 떨어내는 모색 과정도 나쁘지 않다. 질문을 중시하는 사이카와답게 정곡을 찌르는 질문을 거듭함으로써 수수께끼에 들러붙은 의혹의 껍질을 옷 벗기 고스톱 치듯 한 꺼풀씩 벗겨간다. 자연스럽게 사고로의 천착을 유도하고 문제도 풀어나간다. 그런 식으로 독자의 뇌세포가 잠시나마 뭔가에 대해 깊이 생각할 여지를 강제가 아닌 자발적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무엇보다 이번 편은 개성 넘치는 인물들 사이에서 펼쳐지는 백과사전처럼 드레지면서도 오렌지처럼 새콤달콤한 스토리텔링 프로세스가 블랙홀 같은 흡입력을 발휘한다. ‘시종일관 눈에서 뗄 수 없었다’라는 말은 아마도 이럴 때 가장 적합하리라.

마지막으로 한마디 해보자. 하얀 옷을 입은 사람이 라면을 끓인다. 라면이 얼추 다 익은 것 같아지자 그 사람은 한 젓가락 맛보고는 라면을 어딘가로 치운다. 그리고 다시 똑같은 라면을 새로 끓인다. 그리고 한 젓가락 맛보고는 라면을 어딘가로 치우고 다시 똑같은 라면을 새로 끓인다. 얼핏 보면 이 남자의 행동은 ‘라면은 먹기 위해서, 그래서 출출한 배를 채우기 위해서 끓인다’라는 상식과는 모순된다. 왜 다 먹지도 않을 라면을, 그것도 똑같은 라면을 새로 끓이고 버리는 행동을 반복하는 것일까? 『수기 모형』의 트릭을 깨트리고 싶다면, 우선 먼저 상식과 고정관념에 갇힌 경화된 사고를 깨트릴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살인’이라는 이벤트에서 무엇이 상식이고 무엇이 고정관념인가? 한번 생각해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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