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벌의 민주주의 | 토머스 실리 | 14mm의 기적
꿀벌 정찰대, 민주주의를 진화시키다!
한국에는 유난히 자영업자가 많은데, 그중에서 식당과 미용실, 편의점만큼이나 눈에 많이 띄는 것이 공인중개사 사무실, 일명 ‘복덕방’이다. 뜬금없이 ‘복덕방’이란 단어를 끄집어낸 것은 이야기할만한 각별한 이유나 사연이 있어 그런 것은 아니다. 다만, 『꿀벌의 민주주의(Honeybee Democracy)』에서 토머스 D. 실리(Thomas D. Seeley)의 간결 명쾌한 문장으로 설명되는 꿀벌 정찰대가 겨울을 보낼 최고의 보금자리를 정확하고 신속하게, 그리고 지극히 정직하게 찾아내는 진화의 경이로움이 고도로 응축된 집 찾기 과정이 내 잠자는 상상력을 부단히 깨우고 있을 때, 누군가 살 집을 형편에 맞게 찾아주는 복덕방 주인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가장 오래된 꿀벌 화석이 3,400만 년이 되었고, 그들의 후손이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왔다는 명징한 사실에서 꿀벌, 그중에서도 최적의 집터를 사리사욕 없는 순수한 의무감으로 성실하게 찾아주는 정찰벌이야말로 양심적인 부동산업자라면 본받아야 할 모범이지 않을까? 그런 면에서 ‘꿀벌 부동산’이라는 상호를 내걸고 영업하는 대한민국의 몇 안 되는 복덕방 주인은 안면은 없지만, 왠지 모르게 믿음직스럽다.
사실 집단을 위한 꿀벌 정찰대의 경이로운 공헌은 최적의 집터를 찾아내 주는 것만이 다가 아니다. 그들은 오류(거리가 너무 먼 집터를 선택하는 것)를 최소화하기 위해 보통 10개 이상의 여러 장소를 물색하고, 그 정보를 다른 정찰벌과 공유한다. 그리고 마침내 ─ 사람들 사이에선 좀처럼 보기 드문 광경인 ─ 개방적이고 공정한 경쟁과 공동의 목표를 위한 열띤 논쟁을 통해 이상적인 집터에 대한 동의를 끌어낸다. 집터를 선택하는 일뿐만 아니라 무기력 상태에 빠진 일벌들을 날 수 있는 따뜻하고 활발한 상태가 되도록 자극하고, 그리고 이들을 새 안식처로 안내하는 역할까지 모두 선택된 소수의 정찰벌이 담당한다. 믿기지 않겠지만, 이들은 그런 식으로 진화했으며, 그렇게 수천만 년을 지탱해왔다.
정찰벌들이 정족수에 의한 합의를 끌어내는 모든 과정을 사람의 언어로 이해하고, 그리고 이것을 다시 사람의 언어를 통해 설명하려고 하니 마치 인류처럼 일정한 수준의 문명을 갖춘 새로운 종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든다.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달콤한 꿀을 만들어주는 한갓 곤충에 불과한 ‘벌꿀’에 대한 이야기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들이 집터를 선택하는 모든 과정은 ─ 토머스 D. 실리의 주장처럼 ─ 오직 고도의 지능을 갖춘 인류만이 실천할 수 있는 매우 문명적인 시스템으로 여겨져 왔던 ‘민주적’이라는 말을 제외하고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는 것도 분명하다. 꿀벌들이 새로운 보금자리를 선택하는 과정이 ‘민주적’이라면, 기껏해야 몇천 년에 불과한 인류의 ‘민주주의’ 시스템은 명함도 못 내밀 판이다. 하물며 누군가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끝까지 한 의견만을 고집하고, 그럼으로써 분쟁의 씨앗이 되는 대립과 마찰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인류의 불완전한 민주주의는 전체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의견을 고집하지 않고, 그럼으로써 잡음 없이 매끈하게 합의를 만들어내는 꿀벌의 민주주의에 비교하면 미성숙하기 그지없다.
<'지구 최초 민주주의'라는 명예는 바로 이분들께> |
수렴 진화로서의 ‘민주주의’
이렇게 말해놓고 보니 마치 새의 날개를 본뜬 비행기나 박쥐에서 영감을 얻은 초음파 기술처럼 민주주의도 자연에서 영감을 얻은 자연의 메커니즘을 모방한 시스템처럼 보인다. 최초의 양봉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기원전 2400년경의 이집트인 것을 보면, 세계 최초의 민주주의로 평가받은 아테네 민주주의가 꿀벌에서 영감을 받았을 가능성도 완전히 제로는 아니다. 하지만, 이 가설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는 당연히 없으며 있다고 해도 내 능력으로 찾아낼 확률은 지극히 제로에 가깝다. 혹은, 당시 누군가가 정말로 꿀벌 집단에서 영감을 얻어 민주주의의 시초를 쌓아 올렸다고 하더라도 아마 그 잘난 인류의 자존심 때문에 진실을 숨겼을지도 모른다. 카를 폰 프리슈(Karl von Frisch)의 파격적인 발견으로 꿀벌의 언어를 사람의 언어로 번역할 수 있게 된 것이 비교적 최근의 일이라는 점에서 내가 제기한 가설은 검증될 확률보다는 어불성설로 남을 확률이 훨씬 더 높다.
중요한 것은 세계 최초의 민주주의라는 영예를 꿀벌에게 넘겨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 고래와 박쥐의 반향정위(反響定位, 일명 초음파) 기능처럼 ─ 유연관계가 없는 동물들이 비슷한 환경에서 비슷한 압력에 놓일 때 비슷한 형태와 행동을 진화시키는 과정인 수렴 진화로서의 민주주의다. 이 말은 민주주의는 인류의 축적된 지식과 경험에 지능이 더해져 낳은 독창적인 시스템이라기보다는, 사회적 동물이 공동의 목표를 위한 여러 대안적 행동 중에서 ‘선택’이라는 문제에 직면했을 때 이것을 해결하려는 과정에서 나온 진화의 산물이라는 뜻이다. 즉, 어떤 사회적 동물이라도 시기적절한 선택압이 가해지고 적절한 환경이 조성된다면 적응의 산물로서 민주적인 의사 결정 시스템을 진화시킬 수 있다는 말이다.
꿀벌의 민주주의 시스템은 얼핏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좀 더 깊이 되새겨보면 우주만큼이나 경이롭고 수학만큼이나 우아한 발견이다. 자연선택은 무리를 이루어 사는 사회적 동물이 다수의 대안 중에서 원만한 선택을 내릴 수 있도록 민주주의라는 해결법을 진화의 유연함 속에 숨겨놓은 셈이다. 이것을 꿀벌은 수백만 년에 걸친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발견했다면, 인류는 ─ 꿀벌과 비교하면 ─ 매우 짧은 기간에, 그것도 약간의 희생과 약간의 시행착오만으로 발견한 셈이니 인류의 지능이 참으로 대단하긴 대단한가 보다.
더 놀라운 사실은 꿀벌의 의사 결정 시스템을 영장류 뇌의 신경세포도 채택했다는 것인데, 이 경우도 수렴 진화라고 할 수 있다. 2㎝도 안 되는 ─ 좀 더 정확하게는 14mm ─ 꿀벌 한 개체의 행동은 신경세포 한 개의 발화에 상응되고, 꿀벌 집단은 뇌에 비교될 수 있다. 이는 곧 한정된 지식 • 지능을 지닌 개체들이 모여 집단 지능을 발휘하는 최고의 의사 결정 시스템 구축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사람처럼 큰 뇌를 보유할 수 없는 꿀벌은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집단 지능을 독자적으로 키워왔다는 것인데, 이것은 그저 그런 사람들이 모여 기대 이상의 공적을 세우곤 하는 인류와도 상통한다.
소멸이 없다면 새로운 것도 없다!
토머스 실리는 꿀벌 집단이 새 집터를 선택할 때 직접 민주주의 형태를 취한다고 설명하지만, 분봉하는 전체 집단을 놓고 보면 대의원 제도에 더 가깝다. 왜냐하면, 꿀벌 집단의 3~5% 정도만이 정찰대로서 새 집터를 발견하고 선택하는 의사 결정 과정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3~5%가 새 집터 후보지를 여러 개 발견하고, 그것 중에서 단 하나의 최종 선택을 끌어내는 논쟁 과정은 직접 민주주의 형태에 가깝다. 하지만, 꿀벌 정찰대는 독립된 엘리트 집단이 아니라 나머지 일벌들을 대표하고, 전체 집단을 위한 공동의 목표를 위해 새 집터를 선택한다는 점에서 대의원이다. 물론 여기서 정찰대라는 대의원을 선출하는 유권자는 선택되지 않은 나머지 일벌이 아니라 유전자와 먹이 징발대로 근무한 경험이다.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여왕벌을 포함한 그 어떤 꿀벌도 지도자 역할을 맡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곧 모든 정찰대가 집단을 위한 최적의 보금자리를 찾는 문제에 그 어떤 간섭도 없이 평등하고 대등하고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다는 뜻이다. 지도자 없이 최종 선택을 매끄럽게 끌어내는 것도 훌륭하지만, 여러 대안을 두고 서로 경쟁하는 정찰벌 사이에 일절 잡음이나 마찰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 사소한 문제에도 크고 작은 잡음이 끊이지 않는 불쾌하고 짜증 나는 경험이 담뱃진처럼 의식 속에 밴 우리로서는 ─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이런 차이는 꿀벌은 자신의 지지를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동으로 철회하지만, 사람은 우월한 대안을 찾아야만 자기 입장을 포기하거나, 혹은 우월한 대안을 찾았더라도 자기 이익에 더 부합하는 기존 대안을 쉽게 포기하지 않는 이기심이 최적의 선택을 방해하는 헤살꾼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주류 세력 • 지배 세력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인간 사회에서는 기존의 견해를 뒤집는 새롭고 더 나은 견해가 논쟁에서 승리하려면 기존의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해당 분야에서 은퇴하고 사망해야 비로소 가능하다는 점에서, 그리고 아무리 젊었을 때 뛰어난 학자였다고 해도 사람은 나이가 들면서 새로운 견해를 받아들이는 대신 오랫동안 간직해오다 못해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린 자신의 견해를 더 견고하게 만드는 데 남은 생을 바친다는 점에서 정찰벌의 자동 철회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금도 학계 • 정계는 주름잡는 몇몇 인물들이 물러날 때를 모르고 뻔뻔하게 버티고 서 있는 덕분에 새로운 변화를 이끌 뜨거운 열정을 지닌 소장 세력이 기회를 잡지 못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한 혁명 열사들의 혁명적 이상과 염원이 담긴 ─ 꿀벌 정찰대의 의사 결정 제도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는 ─ 민주집중제가 한 사람의 엄청난 영향력 때문에 끝내 무산되었으며 지금의 중국도 그때와 별반 다를 바 없다. 때가 되면 물러날 줄 아는 정찰벌의 지혜는 우리가 민주주의라고 이름 붙인 제도를 역동적으로 운영하고 싶다면 가장 본받아야 할 교훈이 아닐까 싶다.
<너희가 민주주의를 알아?> |
꿀벌, 민주주의의 완성에 한 발 더 다가갈 기회
혹자는 세계 최초의 민주주의라는 타이틀을 한낱 미물에 불과한 꿀벌에게 빼앗겼다는 사실에 자존심 구겨진 나머지 꿀벌은 그저 유전자에 새겨진 본능대로 했을 뿐이라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주장은 ‘본능’으로 행하는 것은 ‘자유의지’로 행하는 것보다 격이 떨어진다는 부당한 편견에서 기인하고 있으며, 인류가 지금까지 존속할 수 있었던 결정적 이유는 바로 엄청난 ‘식탐’과 ‘성욕’ 때문이라는 사실도 망각하고 있다. 엄밀히 말해 지금도 이 두 본능이 가장 강한 사람들의 유전자가 많은 자식을 낳고 끝까지 살아남는다!
꿀벌과 인류 사이에는 한쪽은 유전적인 선택과 적응이라는 다윈주의적인 방법으로, 다른 한쪽은 높은 지능을 이용하여 민주주의를 배웠다는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유전적으로 구현되는 민주주의나 지능적으로 구현되는 민주주의나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다.
이쯤에서 한 번 곰곰이 생각해보자. 인류의 의심할 바 없는 합리성과 탁월한 이성의 결과물로 자화자찬하는 민주주의 제도를 우리가 얼마나 익히고 얼마나 세대를 이어가야 본능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까? 물론 학습된 형질이 유전되는 것은 아니지만, 민주적인 사람이 자손을 더 많이 남기고, 비민주적인 사람은 자손을 남기기 어려운 사회가 등장한다면, 즉 민주적인 성향이 선택압으로 작용한다면 얘기는 달라질 수 있다. 물론 공상에 가까운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설령 이러한 선택압이 작용한다고 해도 유난히 지능이 높고, 그래서 항상 잡다한 생각과 잡다한 사심으로 머릿속을 가득 채우곤 하는 호모 사피엔스로서는 꿀벌처럼 잡음 섞이지 않는 정합적이고 체계적인 행동을 일관되게 집단으로 이행하기는 어렵다는 점에서 민주주의 제도가 사람의 유전자에 새겨지기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지식과 경험을 후대에 고스란히 물려줄 수 있는 언어와 문자를 발달시킨 인류로서는 민주주의 제도를 뛰어넘는 미지의 제도를 찾을 가능성도 없지 않아 있다. 그런 면에서 한 제도를 본능으로 굳히기보다는 밈(Meme)으로 계승시키는 것이 더 합리적이고 효율적이다.
다만, 꿀벌 개체 하나하나의 지능은 매우 낮음에도 그 하나하나가 모여 완성된 집단 지능은 지구상에서 최고의 문명을 자랑하는 인류가 모범으로 삼아야 할 정도로 완벽한, 그리고 꿀벌이란 종에게도 축복이 된 민주주의 제도를 진화시켰다는 점에서 인류의 민주주의가 어딘가 석연치 않은 불완전한 채로 답보 상태에 머무르는 것은 지식의 낭비이자 지능의 수치다. 토머스 D. 실리가 찬탄해 마지않는, 그리고 나 역시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는 꿀벌의 민주주의가 완성되기까지는 비록 수백 만년이라는 이루말 할 수 없이 길고 긴 시간 동안 수많은 시행착오와 그에 따른 큰 희생이 따랐겠지만, 인류에겐 그러한 시행착오와 희생을 대폭 줄여줄 지능과 지식, 그리고 경험과 자유의지가 있다는 점에서 꿀벌처럼 수백 만년을 기다릴 필요는 없다.
마치면서...
휴 래플스(Hugh Raffles)의 『인섹토피디아(Insectopedia)』가 비록 독자의 가련한 눈꺼풀에 난해한 문장과 헤아릴 수 없는 표현이라는 무거운 추를 가차 없이 매달아버리는 단점이 있지만, 곤충의 세계에 쥐똥만큼의 앎도 없는 나에게는 새로운 분야로의 수줍은 도약, 그리고 새로운 호기심의 유쾌한 발아를 위한 시기적절한 자극제였다. 덕분에 작은 영감을 얻은 나는 꿀벌이 배고픔을 채워줄 달콤한 꿀을 찾아 꽃밭 주위를 윙윙 날아다니는 것처럼 나의 배고픈 호기심을 채워줄 달콤한 책을 찾아 도서관을 ─ 안타깝게도 날아다니지는 못하고 ─ 엉금엉금 걸어 다니다, 『꿀벌의 민주주의』라는 책에 미약하게나마 촉수를 꽂게 되었으니, 중간에 내팽개치지 않고 끝까지 읽은 보람이 있다. 만약 『인섹토피디아』의 수면 효과를 이겨내지 못하고 도중에 책 읽기를 포기하는 불찰을 저질렀다면 하마터면 이 귀중한 책을 지나치는 우를 범했을 것이다.
읽고 쓰기가 가능한 문자에 토대를 둔 언어 같은 높은 수준의 문명이 뒷받침되어야만 ‘민주주의’ 같은 제도를 착상하고 그것을 실행으로 옮길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인류의 오만이 낳은 완벽한 오판이자 착각이었다. 꿀벌이 집단의 생존을 위해 대의원 민주주의(전체적으론)와 직접 민주주의 제도(새 집터를 선택하는 과정만 보면)를 오로지 무수한 시행착오만으로 완성했다는 사실은 경이롭다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할 정도로 놀랍고 아름답다. 14mm의 기적이나 다름없다. ‘기적’이란 단어를 사용하면 꿀벌의 능력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여태껏 내 지식과 상상력의 경계선 밖 멀찌감치 떨어진 어딘가에서 머무르다 인제야 나의 호기심 레이더망에 걸린 꿀벌의 세계는 나로서는 그 앙증맞은 춤동작 하나하나까지 모두가 기적일 수밖에 없다. 과연 진화의 끝은 어디일까? 하는 경외 어린 질문을 끝으로 오늘 같은 궂은 날씨에 더욱 욱신거리는 통증만큼이나 읽는 것이 고통스러운 리뷰를 마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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