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지 않는 수학자 | 모리 히로시 | 풀 수 있는 트릭이 더 매력적
오랜만에 수수께끼를 풀다!
어느덧 10년을 훌쩍 넘긴 도서관 출입 동안 읽은 추리소설만도 200여 권 정도 되는데, 그 결실을 인제야 본 것일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모리 히로시(森博嗣)의 『웃지 않는 수학자(笑わない數學者)』에 등장하는, 마치 데이비드 카퍼필드가 오리엔탈 특급열차를 사라지게 한 것과 거의 흡사한 트릭에 숨겨진 비밀을 단박에 알아챘기 때문이다.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고, 흩어진 단서를 넝마주이처럼 주워 모을 필요도 없었다. 소설의 무대가 되는 삼성관 앞에 당당히 세워져 있는 거대한 오리온 동상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확인한 순간 ─ 마치 사이카와가 사건을 해결하려는 그 순간처럼 ─ 머릿속을 번쩍하고 스쳐 지나가는 아이디어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수수께끼의 열쇠였다. 웬일로 트릭을, 그것도 이야기를 시작하자마자 간파해낸 기특한 사연에는 이전에 읽었던 어느 한 추리소설이 무의식적인 힌트로 작용했을 수도 있다. 이것에 관해 뭐라도 말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혀와 근질거리는 손가락을 진정시키기란 정말 괴로운 일이다. 대수롭지도 않은 것을 뽐내고 싶어서 날뛰는 망아지처럼 제멋대로 꼼지락대는 손가락을 달래면서 내 사고의 흐름을 관철시키는 글을 쓰기란 쉽지 않다. 사소한 것임에도 기회만 되면 우쭐대고 싶어 하는 사람의 유치한 심성이란 나 역시 어쩔 수 없다.
여기서 누구의 어떤 작품이 힌트가 되었다고 말한다고 해서 모든 독자가 『웃지 않는 수학자』의 트릭을 간파해낸다는 보장은 없지만, 만에 하나라도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수수께끼는 수수께끼 그 자체보다 그것을 풀어내는 진득하면서도 부담 없는 사고 과정에 의미가 있다는 점에서 정말이지 그만큼 재미없고 김빠지는 일도 없다.
어떤 소설이 ‘무의식적인 힌트’가 되었다고 말한 것은, 수수께끼를 먼저 풀어내고 그것과 비슷한 트릭을 사용한 그 소설이 나중에야 생각났기 때문이다. 힌트가 된 소설은 의식적으로는 나의 해답을 뒷받침하는 어떤 근거이자 확신으로 작용했고, 무의식적으로는 그 해답이 번개처럼 도출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참고로 힌트가 된 그 소설이 『웃지 않는 수학자』보다 훨씬 먼저 (대략 1980년대 초반) 출간되었다. 그런 고로 모리 히로시가 그 소설에서 오리온 동상이 사라지는 트릭을 착상했는지도 모른다.
<이런 동상이 갑자기 사라지는, 그런 트릭?> |
풀지 못할 트릭보다는 풀 수 있는 트릭이 더 매력적
트릭을 쉽게 간파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도 이번 트릭의 핵심이 번득이는 발상 하나면 풀 수 있는 굵직하면서도 비교적 간단한 구조이기 때문이다. 스무고개 넘듯, 혹은 연달아 이어진 수학 문제를 풀 듯, 또는 복잡한 미로를 헤쳐나가듯 작은 문제들을 하나하나 풀어나갈 수 있어야지만 광명을 볼 수 있는 그런 복잡하게 꼬인 트릭이 아니라, 나처럼 두뇌 회전이 굼뜬 사람도 어쩌다 떠오르는 착상 등으로 한 방을 노릴 수 있는 트릭이라는 말이다.
감쪽같이 사라진 오리온 동상의 수수께끼를 풀어내면 자연스럽게 범인까지 추리해낼 수 있는 구성으로 되어 있기에, 나 역시 범인이 누구인지 쉽게 지목할 수 있었다. 나머지는 왜 범행을 저질렀는지에 대한 동기와 또 하나의 수수께끼라고 할 수 있는 범행의 세세한 과정을 밝혀내는 일뿐이다.
그런 고로 『웃지 않는 수학자』를 읽는 동안 어떻게든 수수께끼를 풀어보겠다는 고심보다는 과연 내가 제시한 해답이 맞을까, 혹시 틀린 것은 아닐까 하는, 마치 수학 시간에 선생님 앞으로 불려 나가 칠판에 적힌 문제를 풀 때와 비슷한 조바심과 긴장감이 나의 애간장을 태웠다. 이때만큼은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를 빙빙 돌려가며 해답을 에두르는 사이카와가 평소보다 더더욱 얄미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생명에게는 죽음이 있듯 이야기에는 끝이 있는 법이다. 평소엔 과묵하지만, 사람들 앞에서 사건을 설명할 때만큼은 교고쿠도의 귀신이라도 씌었는지 길고도 긴 장광설을 내뱉고 싶은 욕구에 휘말리는 사이카와가 아무리 기를 쓰고 용을 써 가며 이야기를 질질 끌어도 그의 이야기를 받아 낼 페이지에는 한계가 있고 그의 장광설을 잠자코 듣고 있어야만 하는 독자의 인내심도 무한하지는 않다. 결국, 수수께끼의 비밀과 사건의 진상이 사이카와의 세 치 혀를 통해 만천하에 밝혀지고, 내가 풀어낸 해답이 딱 맞아떨어졌을 때의 뭔가 해냈다는 소소한 기쁨과 지금까지 무수히 반복되온 패배에서 벗어났다는 소심한 안도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으리라. ‘웃지 않는 수학자’ 덕분에 웃을 수 있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통쾌한가?
수수께끼나 트릭을 보란 듯이 풀어내어 작가와의 승부에서 당당히 이겨버리는 짜릿한 쾌감도 추리소설을 읽는 또 하나의 재미라고 한다면, 적당한 난이도라는 그럴듯한 미끼로 독자에게 ‘나도 미스터리를 풀 수 있다’라는 자신감을 잔뜩 불어넣어 주면서, 독자를 면벽 수행하는 스님처럼 책 앞에서 진득하게 좌선하게 하는 모리 히로시의 추리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에겐 먹지 못할 떡보다는 먹을 수 있는 떡이 더 먹음직스럽고, 오르지 못할 여자보다는 오를 수 있는 여자가 더 매력적이듯 풀지 못할 수수께끼보다는 풀 수 있을 듯한 수수께끼에 더 끌리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이와 더불어 독자는 미약하게나마 사고 능력을 계발하는 계기도 얻을 수 있으니 임도 보고 뽕도 따는 격이 아닌가. 그런 고로 이미 한번 작가가 제시한 미스터리를 풀어낸 전적이 있는 나로서는 ‘S & M’ 시리즈 중 네 번째 작품인 『시적 사적 재(詩的私的ジャック)』도 읽어 보고 싶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내게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승부욕이 꿈틀꿈틀 용트림한다. 이 기세로 연승을 거두어 볼까나?
어쩌다 한번 맞춘 것 가지고 너무 들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 수준 미달의 추리 능력으로도 어스레한 지성의 빛을 밝힐 기회를 줌과 동시에 아직 나의 뇌세포는 편육이 되지 않았음을 증명할 기회를 준 작가가 고마울 따름이다.
<걱정할 것 없다, 수학은 나오지 않는다!> |
사이카와나 모에로 특정되는 ‘이공계 인간형’
추리소설이든, 문학 작품이든 뒷부분에 ‘작품 해설’이 덧붙여지는 것은 흔한 일이다. 『모든 것이 F가 된다(すべてがFになる)』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읽은 ‘S & M’ 시리즈 세 권 모두 작품 끄트머리에 이제 막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소설이 준 감명이나 여운을 음미하려는 독자를 가로막듯 ‘작품 해설’이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세 번의 ‘작품 해설’ 모두 유난히 ‘이공계’를 강조하고 있다. 밀실 트릭을 크게 ‘심리 트릭’과 ‘물리적 트릭’으로 나눌 수 있다면, 결국 심리 트릭 아니면 이공계와 밀접하게 관련된 ‘물리적 트릭’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모리 히로시의 트릭을 굳이 ‘이공계’적이라고 강조할 필요는 없다. 하물며 ‘밀실’이라는 단어 자체가 물리적으로 한정되고 제한된 공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모든 밀실 트릭은 기본적으로 이공계적 특징을 담보로 하는 셈이다. 이런 것보다는 아마도 사이카와나 모에로 특정되는, 기존 추리소설에서는 ─ 보기 어려웠다기보다는 특별히 내세우지 않았던 ─ ‘이공계 인간형’이라는 독특한 인간상을 형상화했다는 점이 특이하다면 특이하다고 볼 수 있다.
따지고 보면 전자통신학과를 졸업한 나도 ‘이공계’라고 할 수 있다. 그렇고 보니 대학 학부가 크게 인문계와 이공계로 나뉘어 있다는 점에서 ─ 만약 모든 사람이 대학을 졸업한다면 ─ 우리 사회의 절반 정도는 이공계 사람이다. 그렇다고 뭐가 달라지는가? 이공계 사람이라 할지라도 짜장면과 짬뽕이라는 선택의 갈림길에서 ─ 재료, 열량, 영양소 등의 자질구레한 것까지 포함한 ─ 모든 정보를 종합하고 정리하고 추려내는 등의 복잡하고 긴 분석 과정을 거치는 심오한 결정을 내리지는 않는다. ‘완전한 이공계’ 사람으로 묘사되는 모에도 사모하는 사이카와 앞에 서면 여느 아가씨처럼 툭하면 심술을 부리지 않는가? 시체 앞에서 시체보다 더 차가워질 수 있는 사이카와 역시 은근히 대시하는 모에의 ─ 사이카와의 언어로 표현하면 ─ ‘정신 공격’ 앞에서만큼은 어찌할 바를 모르지 않는가? 사람의 모든 판단에는 감정적인 요소가 관여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에서, 그리고 계산적이고 이성적인 판단보다는 감정에 의존하는 직감적인 판단이 ─ 그것이 옳은 판단이던 그른 판단이던 간에 ─ 빠르다는 점에서 사람의 기본형은 ‘이공계’보다는 ‘인문계’다. 그런데도 이공계 인간형을 내세우는 이유는 뭘까?
계산적이고 논리적이고 감정에 쉽게 휘둘리지 않는, 그래서 타인의 감정을 읽고 이해하거나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도 서투른 사이카와는 사건을 설명하는 ─ 마치 자신의 지적 우월함을 즐기는 듯한 뉘앙스가 짙게 풍기는 ─ 강의 시간을 제외하고는 말수도 거의 없다. 시체를 보고서도 ‘으악!’ 한번 놀라고는 (이것은 어쩌면 자신도 시체 앞에서만큼은 보통 사람들처럼 놀랄 줄 아는 그런 보통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쇼’이자 ‘연기’일지도 모른다!) 바로 냉정함을 되찾는 그런 괴물 같은 사람이다. 자신을 제외하면 모든 타인이 ‘남’으로 인식하는 그가 살인 사건에 흥미나 관심을 두는 이유는 ‘왜’가 아니라 ‘어떻게’ 때문이다. 죽은 사람이 평소에 모르고 지내던 타인이라도 사건 현장에 같이 있었다면 완전한 타인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점에서 죽은 사람에게 일말의 애도의 감정이나 동정심을 보이지 않는 사이카와는 한마디로 정나미가 떨어지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런 사이카와의 마뜩잖은 점이 기존 추리소설의 따뜻하고 인간적인 감정이 풍부했던 탐정들과는 확연히 대조된다는 점이 매력이다. 기존 추리 • 범죄소설이 참혹한 범죄가 가져올 수밖에 없는 참담함 심정을 따뜻한 감동을 일으키는 형사나 탐정의 인간적인 언동으로 애써 중화시키는 데 노력했다면, 모리 히로시는 ‘범죄’라는 매우 인간적인 행위에서 마치 가지치기라도 하듯 ‘감정’을 깔끔하게 쳐내고 걸러낸 다음 수학 문제를 푸는 것처럼 추상적이고 논리적인 해법을 추구한다. 한마디로 복잡한 사람의 감정이 제거되고 남은 범죄의 그 순수한 기계적이고 논리적인 과정만을 드러내고자 애쓰는 것이리라. 이것은 마치 새로운 기계를 접한 공학자가 끝내 호기심을 떨쳐버리지 못한 나머지 기계를 하나하나 분해하고 분석하면서 그 미스터리한 기계의 작동방식을 추리하는 과정과 비슷하다면 비슷하달까?
아무튼, 모리 히로시의 소설은 다른 추리소설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 심리적인 요소를 최대한 억제하고 기계적인 점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 군더더기 없는 밀실 트릭과 소설 속에서 간간이 드러내는 냉철하고 이지적인 이공계적인 철학 대담이 나름 독특한 멋을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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