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스퍼시픽 실험 | 매트 시한 | 중 • 미 민간 교류에서 벌어지는 천태만상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금지된 주제, ‘정치’
한국의 윈도우포럼 같은 IT 정보 공유 사이트나 티카페 같은 온갖 잡담과 정보가 혼잡스럽게 교차하는 커뮤니티 사이트는 중국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마치 수렴 진화처럼 인터넷 문화를 꽃피우는 커뮤니티 사이트들은 누가 간섭하지 않더라도 자생적으로 피어나는 듯하다. 각종 커뮤니티 사이트들이 우후죽순 들어서는 과정뿐만 아니라 같은 주제(예를 들면 윈도우, 안드로이드, 스마트폰)를 다루는 사이트들은 국가나 언어에 상관없이 공유되는 정보나 자료도 거의 똑같다. 예를 들면, 한 사이트에서 새로운 정보가 소개되면 동기화되듯 다른 나라 다른 공유 사이트로 순식간에 정보가 전파되는 식이다. ─ 나를 포함한 ─ 네티즌들이 파발꾼 역할을 하는 셈이다. 국경과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초월하는 ‘공유’, 혹은 ‘정보 전달’의 현장을 볼 때마다 인터넷의 진정한 가치를 눈앞에서 확인한다.
비단 IT 분야뿐만이 아니다. 중국 커뮤니티 사이트에 자동차, 육아, 교육, 취업, 취미, 여행, 고민, 연애, 잡담 등 지극히 일상적인 글이 올라오는 추이를 보면 세부적인 사정은 저마다 조금씩 다를지라도 역시 사람 사는 곳은 어딜 가나 크게 다르지 않다는 인생의 보편성을 문득문득 깨닫게 된다.
하지만, 내가 자주 찾는 중국 커뮤니티 사이트 중에서 아무리 두 눈을 크게 뜨고 찾아봐도 절대로 볼 수 없는 단 한 가지 주제가 있다. 알다시피 그것은 바로 ‘정치’다.
몇몇 한국 커뮤니티 사이트에서도 사이트 정체성에서 벗어나는 정치 글을 제한하는 곳이 없지는 않지만, 중국처럼 엄격하지는 않다. 중국 커뮤니티 사이트에선 ‘정치’ 관련 글은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으며 이 규칙을 어겼을 땐 강제 퇴장 조치가 취해진다.
<자체 검열을 엄격하게 시행하는 중국 사이트> |
정치를 논할 수 없다고 해서 다른 것도 못 하는 것은 아니다
언론의 자유를 누리는 사람들의 우려와는 달리 중국 인터넷 사회는 정부 검열과 통제에 적응한 상태로 보인다. 규모가 큰 포럼의 경우는 불미스러운 일을 미리 방지하고자 자체 검열을 시행할 정도다. 호시탐탐 중국 재진출 기회를 노렸던 구글은 한때 중국 정부의 검열 기준에 부합하는 드래곤플라이(Dragonfly) 프로젝트를 준비하지 않았던가.
자유 국가에서 사는 국민이 볼 땐 이러한 중국인의 사고방식이 답답해 보이기도 하고 미련해 보이기도 하는 둥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서구 사회가 크게 간과한 것이 있다. 언론의 자유가 없다고 해서 앱을 개발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정치’는 인터넷에서 논쟁하고 토론하고 이야기하고 공유할 수 있는 수백만 가지 주제 중 단 하나일 뿐이다. 정치 이야기를 하지 못한다고 해서 인터넷의 가치가 크게 손상되는 것도 아니고 인생이 피폐해지는 것도 아니고 기술 개발을 못 하는 것도 아니다. 어떻게 보면 정치 논쟁에 소모되는 시간과 기력을 다른 곳으로 전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약간의 이득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서구 사회는 자유 시장, 자유 언론, 민주 정치 같은 자신들이 옳다고 믿는 가치관 없이는 중국은 결코 눈에 띌만한 경제 발전은 이룰 수 없다고 호언장담했다. 서구 사회는 중국 정부가 결국엔 인터넷을 통제하는 데 실패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서구 사회는 구글 같은 회사가 없다면 중국은 절대 번영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서구 사회는 인터넷이 중국에 민주와 자유의 바람을 불어넣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정치 • 경제 • 기술과 관련한 전망뿐만 아니다. 많은 사람은 외국영화의 수입쿼터가 늘어나면 아직 초기 단계에 머무는 중국의 영화산업을 결정적으로 망쳐놓을 거라고 예상했다.
그 이유는 정치적 자유가 없는 나라는 혁신할 수 없고, 표현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국민은 성공적인 문화 산업을 창조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매우 그럴듯해 보이는 논리다.
알다시피 중국은 서구 사회의 ─ 중국이 영원히 세계의 공장으로만 남아 있기를 바라는 음흉한 기대가 은근히 내비쳐지는 ─ 이 모든 우려에도 불구하고 무원칙이고 권위적인 정치 체제와 언론과 인터넷에 대한 철저한 통제가 조합된 기묘한 시스템으로 부지불식간에 대국으로 성장했다. 마치 서구 사회가 주장해 온 번영의 논리만이 유일한 길은 아니라고 반항이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기존 ‘이민자’ 개념에 반하는 중국인 이민자
반전이었다. 유구한 역사에도 불구하고 경제적으로 가난하고 사회적으로 뒤떨어지고 정치적으로 후진국이라고 평가받던, 그리고 실제적으로도 그랬던 중국이 서구 사회의 예상을 뒤엎고 자신들만의 법칙으로 미국을 위협하는 유일한 강대국이 되었다는 사실말이다.
마치 지구에서 펄쩍 뛴 토끼가 달 표면에 도착한 듯한 중국의 놀랄만한 발전은 세계가 경탄할만한 도약이지만, 마냥 놀라고 있을 수만은 없는 국가도 있다. 중국의 부상이 가장 큰 위협이자 도전으로 다가온 미국이다.
미국은 1882년에 중국인 배척법을 만들어 중국인 노동자의 이주를 금지했다. 단지 백인의 일자리를 빼앗고 인종적 정체성을 위협한다는 이유로 말이다. 대놓고 무시당했던 중국이 그로부터 140여 년이 지난 지금은 미국을 긴장시키고 있다. 정치 • 외교뿐만이 아니다. 경제 • 문화 • 사회적으로 미국식 가치관에 도전하는 수많은 중국인이 수백만 미국인의 일상에 이물질처럼 끼인 채로 미국 사회에 혼란을 조장하고 있다(중국은 미국 땅에 가장 많은 학생, 관광객, 기술자, 주택 구매자, 이민자를 보낸 국가다). 가장 큰 이슈는 미국이 ‘이민자의 나라’라는 독특한 역사에서 탄생한 자랑스러운 가치관이 부유하고 거만한 중국인 이민자 때문에 통째로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미국인은 ‘지치고, 가난하고, 불쌍하고, 겁에 질린’ 이민자에게 문을 활짝 열어주었고, 그런 포용력과 관대함을 국가적 가치관이자 미국인의 자부심으로 삼아왔다. 그런데 중국에서 이주해온 사람은 그들보다 훨씬 부자이며, 그들처럼 이웃과의 화합을 중시하는 사람도 아니다. 거지 때처럼 몰려든 중국인 때문에 미국인은 좀처럼 헤어나갈 길 없는 딜레마에 빠졌다. 진정한 미국인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국의 불안정한 상황과 환경 악화를 피해 자신과 가족의 보신을 위해 이민 온 부자이고 무례하고 특권 의식에 사로잡힌, 그래서 영원히 이방인으로 남을 것 같은 사람들을 ‘미국인’으로 받아들여야 하나? 아니면 1882년에 입법한 중국인 배척법을 또다시 도마 위에 올려놓아야 하나?
<중국 자본으로 재개발되는 헌터스 포인트 조선소(사진 출처: LAND USE DATABASE)> |
중 • 미 민간 교류에서 벌어지는 천태만상
바이두 넷디스크를 주 백업 클라우드로 사용하다 보니 남들보다 중국 동향에 조금은 더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고, 그래서 중국 커뮤니티 사이트를 자주 들락거리는 나로선 『트랜스퍼시픽 실험(The Transpacific Experiment)』은 중국과 중국인에 대한 이해를 한 차원 더 높여주는 교과서 같은 귀중한 책이다.
트랜스퍼시픽 실험이란 오늘날 두 초강대국 사이에서 완전히 새로운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는 민간 차원의 외교적 교류를 말한다.
매트 시한(Matt Sheehan)의 집요한 노력과 풍부한 경험의 결실이라 할 수 있는 이 책은 중국과 미국의 민간 차원의 외교적 교류에서 벌어지는 ─ 갈등과 시너지 효과를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 힘과 영향력 대결을 마치 BBC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은 생생하고 현장감 넘치는 이야기로 넘실댄다. 중국의 드높아진 위상을 한껏 만끽하려는 중국인들의 안하무인에 가까운 자신감에 그동안 속으로만 불쾌한 감정을 삭였던 미국인들이 하나둘씩 불만 • 불평을 토로하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한 팽팽한 긴장감, 그리고 이와는 대조적으로 중국인들의 탐욕적인 투자 덕분에 침체에서 벗어나게 된 도시 등 중국과 미국의 민간 교류에는 복잡한 애증 관계로 뒤엉켜 있다. 이 얽히고설킨 실타래를 파헤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둘 사이에 알맞게 끼어 옴짝달싹 못 하는 한국으로선 ‘트랜스퍼시픽 실험’의 불똥이 어디로 어떻게 튈지도 관건이다.
시진핑 주석이 행사장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방금 방이 흔들리는 걸 느꼈나요?”라는 ‘아부 역사’에 영원히 남을만한 멘트를 남긴 애플의 CEO 팀 쿡, 곧 태어날 자기 아이의 중국 이름을 지어준다면 커다란 영광일 거라고 시진핑 주석에게 말해 국제적 아부에서도 뛰어난 능력을 보여준 페이스북 창시자 마크 저커버그의 일화만 봐도 현재의 중국은 덩샤오핑이 ‘흑묘(黑猫) 백묘(白猫)론‘을 논할 때와는 비교조차 될 수 없을 정도로 위상이 드높아졌다.
그런데도 중국 기업은 검열을 일삼는 나라의 ‘짝퉁’ 회사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여전히 떨쳐내지 못하고 있으며, 많은 사람은 중국이 국제사회의 기대만큼 자국의 경제, 인터넷, 정치 시스템을 개방하지 않는다고 불평한다. 어떻게 보면 원칙이 없는 나라 같고, 상식도 통하지 않고, 그래서 이해할 수 없는 나라 같은 곳이라고 중국을 싸잡아 몰아붙인다. 옌롄커(閻連科)는 소설 『작렬지(炸裂誌)』를 통해 기존 상식을 송두리째 갈아엎는 중국의 현실을 기존의 문학으로는 도저히 표현할 길이 없어 고심에 거심을 거듭한 끝에 신실(神實)주의라는 보편의 존재를 주창하기도 했다.
서구 사회가 중국을 이해할 수 없는 나라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중국의 숨은 의도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동안 자신들이 고집해 온 가치관이 중국 때문에 위협받고 있는 것에 큰 불편을 느낀 서구 사회는 중국을 진정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중국이 망해버림으로써 자신들이 결국엔 옳았음을 인정받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중국을 이해하려면, 면벽자처럼 기존의 상식과 이치와 가치관을 모두 깨끗이 비우는 것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전대미문의 실험
아무리 중국이 막무가내로 행동한다고 하더라도 이 책에 등장하는 중국인들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나듯 중국인도 서구인처럼 출세와 성공에 갈증을 느끼고, 돈 버는 것을 좋아하고, 좋은 직업을 가지고 좋은 환경에서 살고 싶어 하고, 명성을 떨치고 싶어 한다. 그런데도 서구 사회가 그들을 이해하기 어렵다면 그것은 그들의 타고 난 본성이 서구인과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원하는 것을 성취하는 과정과 수단, 그리고 추구하는 가치가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다르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이동하는데 늘 초고속 열차나 비행기를 이용해왔던 사람이 서울에서 부산을 걸어서 가려는 사람을 보고 이해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한 이치지 않을까? 하지만, 부산에 가고 싶다는 점에서 우리는 모두 통하는 점이 있다.
혹은 이런 생각도 든다. 서구 사회가 중국을 제대로 이해하려고 노력했을까? 그들이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모진 굴욕을 당하고, 전대미문의 사회주의 실험과 서슬 퍼런 공포 정치 아래에서 목숨 건 연기로 숨죽이고 살아야 했던 중국의 잔혹한 현대사를 어느 정도나 알고 있을까?
이웃, 친지뿐만 아니라 가족조차 배신하게 했던 공산당의 엽기적인 기만술에 유린당한 중국인이 이웃들과의 화합보다는 개인과 가족의 안위에만 신경 쓰는 것은 일종의 방어적인 심리 기제로 받아들일 수는 없는 것일까? 20세기에 일어난 인류의 비극 중 거의 모든 것(대기근, 가난, 식민, 제국주의, 전쟁, 내전, 독재, 공포 정치, 사회주의 실험 등)을 체험한 중국인을 자유롭고 평화롭고 풍요롭게 자란 미국인의 눈으로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여전히 진행 중인 트랜스퍼시픽 실험은 매우 이질적인 역사 • 정치 • 사회 • 문화적 배경을 가진 두 국민이 한 공간에서 서로 다른 가치관을 추구하려고 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전대미문의 사례다. 물론 이 특이한 실험에서 산 지식을 뽑아내는 것도 흥미롭지만, 냉전 시대의 두 강대국처럼 서로 상극일 것 같은 사람들이 마찰 • 갈등 • 분쟁 • 협력 • 화해가 갈마드는 막장 드라마 못지않은 다채로운 삶을 연출하는 그 과정이야말로 더 흥미롭다.
그들이 나름의 공존의 길을 찾아갈지, 아니면 끝내 물과 기름 같은 존재로 각자의 길을 고집할지는 지금으로선 모든 것이 불투명하지만, 어디에서도 듣기 어려운 이 진귀한 이야기는 진행형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중국과 미국의 보이지 않는 불꽃을 튀기는 ─ 한때는 은근했지만, 지금은 좀 더 대놓고 벌어지는 ─ 신경전에서 좀처럼 그 속내를 알 수 없는 중국인의 속성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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