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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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열대어 | 무슨 짓을 하든 안 걸리면 장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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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열대어(Cold Fish, 2010) | 무슨 짓을 하든 안 걸리면 장땡

“너같이 선한 인간인 척하는 거 밥맛이야.”

이제 기력이 달리는지 (비록 형편없는 문장과 유치한 내용으로 뒤범벅된 최악일지라도) ‘책 리뷰’ 한 편 쓰고 나면 뭔가 대단한 임무라도 완수한 것처럼 맥이 탁 풀린다. 내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지만, 사정이 그러한 것을 어찌하겠는가. 그래서 불러주는 대로 매일 무대에 섰던 밤무대 가수가 피로를 못 이겨 제풀에 몇 개의 공연을 끊듯 나 역시 ‘영화 리뷰’를 끊었다. 밤무대 가수처럼 무대에 선만큼 돈이라도 더 벌 수 있는 거였다면, 이까지 쫌이야 별것 아니지만, 적막한 곳에서 쓸쓸하게 놀려니 아무래도 힘에 겹다. 무엇보다 견디기 어려운 것은 그나마 간당간당하게 유지되었던 보잘것없는 필력마저 분산되다 보니 ‘책 리뷰’에 집중하기가 어렵다. 그동안 해왔던 것이 있었기에 약간의 아쉬움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곧 시원섭섭함과 해방감이 아쉬움을 달래주었다. 이후로는 정말 뭔가를 쓰고 싶게 만드는 영화만 리뷰를 쓰기로 했다. 「차가운 열대어」는 그런 영화 중 세 번째 영화다. 참고로 이번 리뷰는 다른 리뷰들과는 달리 원칙을 깨고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다.

이 영화의 무엇이 나로 하여금 글을 쓰게 만들었을까? 그것은 「차가운 열대어」가 ‘살인’이라는 원초적이면서도 문명에 의해 억제된 욕구를 자극했기 때문이다. 영화는 무라타처럼 법망에 걸리지만 않는다면, 살인은 견실한 이익을 남겨주는 한 수단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한마디로 안 걸리면 장땡인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때론 살인은 억제된 욕망을 분출할 수 있는 취미가 될 수도 있다. 자신을 마치 타인의 운명을 좌지우지하거나 심판하는 신처럼 착각하게 하는 살인은 그 어떤 신약도 성공하지 못한 불굴의 자신감마저 불어넣어 준다.

그래서 영화는 매사에 지나칠 정도로 자신만만하고 활기찬 모습을 보여주는 무라타와 그의 대조적인 짝으로 딸과 아내 눈치 보기에 바쁜 샤모토를 등장시킨다. 샤모토는 매력적인 아내에게 빈번히 잠자리를 거절당하지만 이에 대해 한마디 대꾸도 못 할 뿐만 아니라 탈선하는 딸조차 나무라지 못할 정도로 매사에 주눅이 들어있고 소심한 가장이자 아버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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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처럼 살아가던 샤모토는 우연히 만난 무라타의 파렴치한 사기 행각에 본의 아니게 꼽사리로 끼게 되고, 역시나 그가 파는 물고기처럼 한마디 벙긋 못하고 무라타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게 된다. 태연스럽게 사람을 죽이고, 태연스럽게 시체를 처리하는 와중에도 철두철미하게 증거를 인멸하는 무라타 앞에서 샤모토는 꿀 먹은 벙어리다. 그렇게 샤모토는 무라타의 살인 놀이에 반강제적으로 참여하게 되면서 가르침 아닌 가르침을 받게 되고, 겨우 며칠 만에 무라타는 매우 좋은 실력을 갖춘 스승임이 밝혀진다.

나라를 통째로 잃은 것처럼 매사에 의기소침하고 소심하던 샤모토가 무라타의 피를 보고 나서부터는 언제 그랬냐는 듯 포악한 늑대로 돌변한 것이다. 복받쳐 오르는 기운을 어찌할 수 없던 샤모토는 그 즉시 집으로 달려가 남편 앞에서만 옷을 벗지 않았던 아내를 강간하려 들고, 아빠의 말을 개똥만큼도 여기지 않던 시원치 않은 딸을 시원하게 짓밟아버린다.

재밌는 것은 샤모토의 분노 어린 폭발이 일어나기 직전에 그의 얼굴에서 그동안 그의 소심함과 무력함의 상징처럼 보였던 안경이 벗겨진다는 점이다. 이것은 마치 클라크 켄트가 슈퍼맨으로 변신하게 전에 안경을 벗는 것과 같은 맥락일까? 안경이 그동안 샤모토의 잠겨진 분노를 잠근 자물쇠라도 되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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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살인에서만큼은 아마추어 중의 아마추어라 할 수 있는 샤모토는 무라타 같은 무한한 뻔뻔스러움과 ‘살인 철학’이라는 무시무시한 자기 합리화라는 무기까진 갖추지를 못했다. 샤모토는 보통 사람들처럼 소박하고 약간은 정직하고 약간은 양심적인 사람이었기에 비록 일시적으로나마 환경에 지배되어 일탈했을망정 자신의 광기를 더는 견디기 어려웠던 것 같다. 그는 무라타의 뒤를 잇는 훌륭한 제자가 되기보다는 무라타의 지배를 끝장내는 배은망덕한 제자가 된다.

필립 짐바르도(Philip Zimbardo)의 유명한 사회심리학 실험인 스탠퍼드 교도소 실험(SPE: Stanford Prison Experiment)이 교묘하게 조정된 권위와 상황의 힘으로 평범한 사람을 너무나도 쉽게 악행의 길로 인도할 수 있음을 증명했던 것처럼 샤모토의 일탈은 ‘일탈’이라고 부르기에는 민망할 정도로 보편타당성을 내포하고 있다. 나나 당신이 샤모토와 같은 상황에 부닥친다 해도 무엇이 달라질 수 있을까? 자신은 무슨 일이 있어도 악의 길로 빠지지 않을 자신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우리를 범죄자로 밀어붙이는 상황의 강력한 힘을 지나치게 얕보고 있다는 점에서 가까이해서는 아니 될 사람이다.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가장 빠르게 상황의 힘에 굴복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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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이 아무리 진보해도 무라타처럼 누군가에게 살인은 반복되는 일상이다. 그것도 그냥 마지못해 어쩔 수 없이 순간의 실수로 저지르는 그런 살인이 아니라, 돈에 눈이 멀어 저지르는 계산적 살인을 한 차원 뛰어넘어 삶에 활력을 더해주는 강장제로서의 살인도 성립된다는 것이다. 무라타 부부의 살인 행각이 「사이타마 애견가 연쇄 살인 사건」이라는 실화를 근간으로 했다는 점에서 아무리 흉악한 짓이라도 역시 안 걸리면 장땡이다. 살인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받거나 죄책감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마음이 약한 사람들이다. 인류의 보편성에서 멀찍이 떨어진 나름의 도덕 철학으로 무장한 무라타 같은 사람에게 살인은 일과 중 하나이자 즐거운 취미 생활의 한 방편일 뿐이다.

샤모토 같은 사람에게 살인은 무시무시한 것이지만, 무라타 같은 사람에게 살인은 재밌고 짜릿한 일이다. 정말로 무서운 것은 이것이 불변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즉, (샤모토처럼?) 살인을 무시무시한 그 어떤 것으로 생각했던 사람이 (무라타와 엮이게 된 것 같은?) 어떤 상황을 겪게 되면 어느새 살인자가 되어 있다. 인정하지만, 나도 사람을 죽이고 싶을 때가 많다. 하나 아직 그러하질 못했다. 단지 그런 막다른 상황까지 내몰리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의지와 용기와 실천의 문제일까? 사람이 사람을 죽이게 하는 상황의 힘은 운명의 얄궂은 장난처럼 쥐도 새도 모르게 우리를 덮쳐오지만 두 손에 피를 묻히기 전에는 그것을 제대로 인지할 수 없다는 것이 함정이다.

한편으론 샤모토는 가족들에게 이유 없이 무시당하고 돈 버는 기계로 전락한 일본 아버지들의 씁쓸한 자화상이면서도, 파렴치한 문명과 되먹지도 않은 교육으로 자꾸 무언가를 억누르며 살아왔던 우리의 축 처진 뒷모습이기도 하다. 그래서 보는 내내 무엇인지도 모르는 안타까움과 그것을 안다 해도 어찌해 볼 도리가 없다는 서글픔이 소리소문없이 가슴을 저미어온다.

끝으로 무라타 부부가 사람의 몸통을 토막 내고, 뼈에서 살을 발라내고, 물고기들이 먹기 편하게 살코기를 잘게 써는 작업 모습은 돼지를 잡고 부위별로 썰어내어 진열대에 올려놓으면서 손님들이 그 고기를 맛있게 구워 먹을 상상해 절로 흥분에 겨워하는, 그렇게 자신의 직업을 자랑스러워하는 성실한 푸줏간 부부를 연상시킨다. 이렇게 되고 보니 무라타 부부가 시체를 해체하는 모습은 소름 끼칠만한 장면임에도 웬일인지 거부감은 없다. 마치 ‘극한 직업’의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존경스럽고 신성하게 느껴진다. 사람도 죽으면 결국 한낱 고깃덩이에 불과할 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고깃덩이를 오랫동안 유지하고자 얼마나 많은 탐욕을 부리는지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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