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지먼트 | 고바야시 유카 | 왜 신은 복수는 나의 것이라고 했을까?
나의 속을 뒤집는 것들
나의 행동하지 않는 얄팍한 정의감은 불의와 마주친 나를 종종 불편하게 한다.
소심하다 보니 울컥하는 심정을 분연히 터트리지 못한다. 혼자 삭이다 보면 때때로 먹은 것이 체할 정도로 속만 상하기 일쑤다. 마음이 옹졸해서 그런지, 혹은 양심이 바로 박혀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괘씸한 것을 보고 쓸데없이 일어난 분노는 죽이 눌어붙지 않도록 저어주는 주걱처럼 며칠 동안 마음속을 간간이 휘젓기도 한다. 그래서 뉴스도, 댓글을 의식적으로 안 보게 된 지 10년이 넘는다. 남들처럼 악담이라도 퍼부으면 속이 후련하기도 하련만, 천성이 허락하지 않으니 나로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 안 보는 게 상책이다. 내 속만 타들어 갈 뿐이니 이만저만 불편한 것이 아니다.
그러더라도 모든 사건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아니다. 탐욕, 원한, 분노, 질투 등 사람의 보편적인 감정에 사로잡혀 일어난 인간적인 범죄는 충분히 이해할만한 일이다. 살인? 죽이고 싶은 사람을 죽였다는데 할 말이 뭐가 더 있겠는가? 하지만, 실수가 원인이 되어 죽일 의도가 없는 생판 모르는 사람을 죽인다면?
피해자는 남에게 원한을 산 것도 아니고, 밉보인 것도 아니고 지나치게 탐욕을 부려 눈 밖에 난 것도 아니다. 엊그제의 이태원 참사처럼, 혹은 무심히 길을 걷다 자동차에 치여 죽은 그들처럼 그저 그날 그때 그 길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죽는다면 이 얼마나 원통한 일인가!
‘교통사고’는 일종의 면죄부?
대표적으로 교통사고로 인한 보행자의 죽음이 그러하다. 교통사고의 경우 사회와 법은 실수를 너무도 쉽게 인정해버려 가해자를 관대하게 처분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고, 이 때문에 가해자는 자신의 행위가 용서받을만한 실수라고 확신하므로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 교통사고 사망 사건 관련 처벌이 관대한 이유엔 자칫 잘못하면 가해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운전자 모두의 비열한 합의가 숨겨져 있는 것 같아 더더욱 참기 어렵다.
2018년에 이런 사건이 있었다. 대전의 한 아파트 단지에서 소방공무원 부부의 다섯 살 딸이 건널목을 건너다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가해자는 사유 도로에서 일어난 사고라는 법의 맹점 때문에 겨우 징역 1년 4개월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됐다. 다섯 살 아이의 몸무게만큼이나 가벼운 형량에도 분노가 일어나지만, 나의 분노를 더욱 부채질한 것은 가해자의 태도다. 그 당시 기사를 찾아보면 알겠지만, (적어도 내가 보기에) 가해자는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아마 속으로는 (교통사고를 일으킨 대다수 가해자처럼) 재수 옴 붙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랬기에 가해자는 ‘제사’라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들먹이며 항소했으리라.
꽃도 피우지 못한 한 생명을 죽이고, 그리고 그 부모의 남은 인생을 지옥으로 만들어 놓고 받은 1년 4개월이라는 형량이 지나치다고 생각해 항소한 가해자를 당신은 용서할 수 있는가? 가해자가 항소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비록 일시적이었지만, 그때 일어난 분노와 복수심은 페름기 말의 폭주하는 온실효과를 일으킨 시베리아 트랩 분출만큼이나 강렬했다. 이 사건과 전혀 무관한 나도 그 가해자를 죽이고 싶다는 살의를 느끼는데 그 부모는 오죽했을까.
<함무라비 법전(출처: Code of Hammurabi 89)> |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복수법
어처구니없는 형량과 뻔뻔한 가해자들을 볼 때마다 차라리 ‘복수’를 부활시키는 것은 어떨까 하는 구시대적인 발상을 종종 떠올린다. 즉, 인류 최초의 성문법인 함무라비 법전에 있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동해복수법(同害復讐法) 말이다.
복수법이 시행되면 피해자 유족은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하나는 가해자에게 기존의 법이 정한 대로 형량을 받게 하는 것, 나머지 하나는 복수를 선택하는 것이다. 단, 복수는 유족 중 한 사람이 법이 정한 기간 안에 스스로 수행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다.
그런데 재밌게도 이런 나의 구상을 소설로 완성한 작품이 있다고 해서 읽어봤다. 고바야시 유카(小林 由香)의 『저지먼트(ジャッジメント)』라는 소설이다.
일본의 만화, 영화 등의 창작물을 보면 머릿속에 떠오른 모든 것을 거리낌 없이 그대로 표현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과격하고 파격적인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일본인의 기가 차다 못해 도를 넘어선 창의성은 성인물에서 유난히 두드러진다. 남자라면 한 번쯤 품어봤을 법한 섹스 판타지인 ‘투명 인간’이나 ‘시간 정지’, 그리고 대부분 문화에서 금기시된 근친상간 등을 소재로 한 일본 AV를 보면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를 거침없이 드러낸다. 절제되지 않은 표현력을 허용하는 사회, 그리고 그것을 마음껏 이용해 억압된 욕구를 분출시키는 일본인들이 부럽다. 한편으론, 방탕하고 무분별한 욕망일지라도 남에게 피해만 주지 않는다면 일단 허용하고 보는 일본 사회의 관대함이 정치와 역사 반성에 대한 방치와 무관심으로까지 이어지는 것 같아 시금떨떨하다.
일본의 기발한 창의성이 이상야릇한 장르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애니메이션은 말할 것도 없고, 영화에서도 (영화의 완성도나 작품성은 둘째치고) 일본인 특유의 기발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도발적인 창의성이 눈에 들어올 때가 많다.
고바야시 유키의 소설 『저지먼트 - 복수를 집행하는 심판자들』의 소재가 된 ‘복수법’ 자체는 법체제의 지나친 관대함에 실망한 독자들에겐 귀가 솔깃할 정도는 될지언정 근친상간만큼이나 파격적인 소재는 아니다. 그러나 복수법을 선택한 사람과 복수의 대상이 되는 사람과의 관계는 역시 충격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열 살짜리 소년은 여동생을 굶어 죽도록 방치한 친엄마에게 복수를 선언하고, 한 엄마는 친정어머니를 죽인 12살짜리 친딸에게 복수를 선언한다.
엄마가 딸에게, 그리고 아들이 엄마에게 복수의 칼날을 겨누는 극단적인 상황은 상식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그리고 진화적으로도 쉽게 정리되는 상황은 아니지만, 작가는 이렇게 해서라도 사람의 복수 감정이 이토록 보편적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복수 후,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누군가에 의해 내 가족이 살해당했거나 나의 뭔가가 심각하게 파괴당했을 때 가해자에게 내가 입은 피해를 고스란히 갚고 싶은 감정은 인류뿐만 아니라 침팬지를 포함한 일부 포유류와 조류에서도 관찰되는 매우 보편적인 감정이다. 또한, 복수가 자연 선택받은 것에는 분명한 이점이 있다. 복수에 대한 두려움은 무분별한 폭력을 억제함으로써 상호파괴를 방지하고, 협력을 도모하는 계기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복수심이 진화하는 배경이 되었던 수렵 • 채집 사회에나 통용되는 이야기다. 작금의 문제는 질서와 균형이 잡힌 현대 사회에서 복수법을 선택한 사람들, 그리고 자기 친딸, 친엄마에게까지 복수를 감행한 그들이 복수를 선택함으로써 얻는 것이 있을까 하는 것이다.
복수에 성공한 사람들은 잃어버린 것에 대한 보상을 받았을까? 혹은 영원한 상실에 대한 슬픔과 고통을 치유하는 위안이라도 얻었을까?
『저지먼트』는 복수법을 선택한 사람들, 그리고 (복수법을 선택한 사람들이 복수를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감시하는) 복수감찰관들의 심리가 조금씩 조금씩 무너지다 못해 결국엔 피폐해지는 쇠락의 과정이 투박하게나마 잘 나타나 있다. 복수를 선택한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상실감에 자신이 가해자와 같은 살인자가 되어가고 있다는 죄책감, 그리고 무기력한 사람을 학대하고 있다는 자책감이 보태지면서 불행이 또 다른 불행을 낳는 꼴이 되고 만다. 즉, 복수자는 살인을 결심한, 혹은 사람을 죽여가는 자신을 보면서 또 다른 자신이 자신을 심판하는 이중고에 시달리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성을 교란하는 심히 우려할만한 집행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봐야만 하는 복수감찰관의 마음 역시 하루가 다르게 죽어간다. 타인의 불행을 지켜보는 것도 감내하기 어려운 것이 인류의 보편적인 감정인데, 타인이 죽어가는 모습과 평범하게 살아온 한 사람이 잔인한 살인자로 변해가는 과정을 고스란히 지켜봐야 하는 심정이야 오죽할까?
인간 본성에 부합하는 행위임에도 복수자에게 콩알만큼의 만족감을 주기는커녕 영영 씻을 수 없는 상처와 함께 영혼을 황폐화하는 복수. 그래서 그런지 복수에 대한 찬반 논란은 수많은 석학이 오래전부터 끈질기게 문제를 제기했음에도 아직 명확한 답을 제시하지 못했다. 그런 이유로 본성에 대한 집요한 통찰을 시도한 위대한 작가들의 단골 소재가 될 수 있었던 것이리라.
우리는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복수하더라도 죽은 자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복수에 성공하더라도 그것은 또 다른 복수를 낳을 수 있는 불행의 실마리가 될 수 있다는 자명한 사실을. 우리를 흥분시키는 강호의 피비린내 나는 무참한 혈투 역시 사소한 원한으로 시작한 복수의 쳇바퀴가 멈추지 않은 결과라는 것을 어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복수는 수형자뿐만 아니라 집행자에게도 강한 고통을 안긴다. 그 고통은 사람에 따라선 평생 안고 갈 수밖에 없는 상처이자 영혼을 무겁게 짓누르는 죄책감으로 남는다. 『저지먼트』를 읽고 있으면 (복수법에 찬성한 나일지라도) 돌아오지 않을 사람을 위해 한 사람을 죽이는 일이 과연 우리에게 현실적으로 필요한 일인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게 만드는 호소력을 느끼게 된다.
이런 점 때문에 현대 법체계가 사람 본성에 반하는 것임을 알면서도 복수를 금지하는 것이지 않을까 싶다.
<당신은 복수를 위해 기꺼이 손에 칼을 묻힐 수 있는가!> |
먼 옛날에도 복수자는 괴로워했을까?
사랑에 이유가 없듯 복수에도 이유는 없다. 그것은 우리의 본성과 깊은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지먼트』에서 복수법을 선택한 사람들은 행복해지기는커녕 마음의 안정조차 찾지 못한다. 어떤 사람은 상처 입고 회한에 잠긴 채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을 말 그대로 어둠 속에서 보낸다. 어떤 사람은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모질지 못한 여린 마음의 대가를 톡톡히 치른다. 어떤 경우든 행복하고 유쾌한 결말로 끝나지 않는 것이 복수법을 선택한 사람들의 죽음보다 비참한 말로다.
분명 복수는 인류 본성에 부합하는 것인데, 왜 복수를 수행한 사람들은 고통과 상처 외엔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것일까? 아마도 이것이 진화의 맹점이지 않을까 싶다. 비록 복수가 한 개체엔 고통을 안겨줄지라도 그 개체가 속한 친족, 집단, 그리고 더 나아가 종에게 이점이 있다면 자연 선택될 수 있다. 참으로 민주주의적이지 않은가? 한 사람이 희생해서 다수가 이득을 얻는 꼴이니 말이다. 이것은 자연 선택된 특성일지라도 개체에 직접적인 이점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시사한다.
반대로 이런 식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 복수자가 얻는 고통과 기쁨은 각자 지닌 양심이나 도덕적 기준에 따라 다르고, 이것은 그 사회의 보편적 도덕 법칙에 의존한다. 그렇다면 지금과는 달리 도덕적 경계선이 좁고 그래서 도덕적으로 고려해야 할 범주 안에 포함될 개체도 적었던 수렵 • 채집 사회에선 복수자에게 임무를 완수했다는 명예, 성취감, 만족감 같은 긍정적인 감정을 안겨줬을지도 모른다. 그랬더라면, 복수자는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에 시달릴 필요가 없다. 이것은 전쟁에 참여한 수많은 군인이 (소수를 제외하고는) 전쟁이 끝난 후에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고 무탈하게 살아가는 현대 사회와도 통하는 점이 있다. 또한, 난징 대학살, 홀로코스트, 마녀사냥 같은 집단학살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람이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는 연유와도 같다. 아무리 반인륜적인 행위라도 국가나 사회가 특별히 허용한 행위에 대해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불감해질 수 있다. 실로 무시무시한 사실이지만, 이것이 가능했기에 수많은 학살과 잔혹 행위가 너무나도 쉽게 저질러질 수 있었음을 우리는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재밌는 사실은 『저지먼트』에 일어난 사건들은 골아서 터질 때까지 참고 살아가는 대화 없는 일본 가정 문제를 꼬집고 있다는 것이다. 돈만 많이 벌어다 주면 최고라고 생각하는 아버지들, 자식을 한 사람의 인격체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대로 빚어낼 수 있는 고무찰흙이라고 여기면서 본성과 어긋나는 양육 방식을 강요하는 어른들, 방종과 쾌락의 결과를 회피하는 무책임한 어른들.
결과만 놓고 보면 흑과 백처럼 아주 달라 보이는 사건들이지만, 마지막 장을 덮고 난 지금 이 모든 사건을 곱씹어보면 그들이 만약 단 한 번이라도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면 과연 이런 끔찍한 일들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끝내 나를 착잡한 상념에 잠기게 한다.
살인자를 죽이는 것만이 능사일까?
짧게 짧게 쓴다고 하면서도 이토록 길어지고 말았다. 뒹구는 재주밖에 없는 광대가 무대 위를 온종일 뒹굴면서 흘린 침과 땀방울과 먼지 같은 상념들이 하수구에 모인 쓰레기들처럼 모여 집회라도 벌이듯 잡다하게 늘어서 있는 글이라고 할 수 있으니 보기도 안 좋고 읽기도 거북하다. 정말이지 꼴불견이다. 이토록 질보단 양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졸렬한 블로거가 바로 나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나야말로 대화가 필요한 불쌍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기회만 생기면 물줄기 터지듯 글을 쏟아부으니 말이다. 나의 쓸쓸한 영혼을 달랠 길이 이것밖에 없으니 나로서도 할 수 없고, 여기까지 읽은 고마운 독자에게 변명할 도리도 없으니 송구스럽기 그지없다.
아무튼, 『저지먼트』는 바로 전에 읽은 박은우의 『청계산장의 재판』과 같은 ‘복수’를 소재로 한 소설이었지만, 상상력의 차이? 혹은 표현력의 대담성 차이가 이토록 다른 결과를 낳았다. 이 정도가 내가 생각하는 독서의 마지노선이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적확하게 전해줄 수 있는 최소한의 격을 갖춘 텍스트, 그리고 소설이라면 반드시 있어야 할 ‘사람’(『청계산장의 재판』엔 소설에 있어 가장 중요한 ‘사람’이 없다!). 그리고 텍스트와 사람이 조화롭게 아우를 때 자연스럽게 풀려나가는 이야기들. 그래야 읽을 맛도 나고 감흥도 난다.
가볍게 읽히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 속에 지성을 갖춘 사람이라면 한 번쯤 품어볼 만한 사회적 문제와 독자의 감수성을 지독히도 자극하는 씁쓸한 사연을 콕 박아놓은 것이 참으로 영악한 소설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 뉘우치지 않는 가해자들의 몰염치와 뻔뻔함에 분통을 터트리다가도 그런 가해자를 적법하게 응징하려는 복수자들의 살풀이 굿처럼 처연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소름이 끼치는 몸부림에서 전해지는 깊은 회한과 고통 때문에 순간 절로 숙연해진다. 그리고 ‘살인자를 죽이는 것만이 능사일까?’ 하는 소리 없는 파문이 숙연한 수면 위로 잔잔히 일어난다.
자신을 해치려는 사람에게조차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강아지들은 법 없이도 잘 살아가는데, 그보다 더 영리한 것처럼 보이는 우리는 이토록 체계적인 법을 갖추고도 왜 아직도 이런 고민에 빠져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어쩌면 인간으로선 감내하기 어려운 복수의 후유증 때문에 신은 복수는 나의 것이라고 천명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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