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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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웨허(二月河)의 제왕삼부곡(落霞三部曲)

얼웨허(二月河)의 제왕삼부곡(落霞三部曲)

책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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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만날 훗날을 기약하며

『강희대제(康熙大帝)』 12권, 『옹정황제(雍正皇帝)』 12권, 『건륭황제(乾隆皇帝)』 18권, 이렇게 해서 (내가 읽은 책 중 가장 긴) 42권의 소설과 긴긴 세월 동거하면서 절절하게 느낀 것은 남은 생에 동안의 독서 욕구는 이 책들만으로도 엔간히 충족시킬 수 있겠다는 만족감과 안도감이다. 그 방증으로 『건륭황제』를 다 읽고 나자마자 망설임 없이 바로 『강희대제』를 한 번 더 읽었다. 기분 같아선 『옹정황제』, 『건륭황제』도 다시 읽고 싶었지만, 내가 읽어주기를 학수고대하는 책들이 더러 있어서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편견을 싫어하는 것처럼 편애도 싫어하는 나로서는 이쯤에서 얼웨허, 그리고 한때 대제국으로서의 위풍을 세계에 과시했던 청나라와 작별을 고해야 언젠가 펼쳐질 가슴 찡한 재회의 기쁨을 기약할 수 있을 것 같다. 뭐, 박수 칠 때 떠나라, 그런 의미라고 할까.

계속 읽고 싶은 간절함을 애써 억누르고, 대신 훗날을 기약하는 각오로 자물쇠를 채우듯 책장을 덮었건만, 갓 사랑을 꽃피우기 시작한 연인들처럼 밑도 끝도 없이 보고 싶어진다. 요즘처럼 짧은 콘텐츠가 인기 있는 현실에선 많은 권 수는 단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지만, 한 번 빠져들고 나면 그 ‘많은 권 수’는 ‘책 선택의 어려움’을 한동안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축복이자 구원처럼 다가온다. 현재와 미래의 자투리 시간을 홀라당 저당 잡히는 순간이기도 하다.

바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없는 시간 쪼개 책을 읽는 사람들에겐 이렇게 많은 분량의 소설은 첫 페이지조차 넘길 엄두를 못 내는 경우가 다반사다. 대단한 분량에 지레 겁먹고 첫술도 뜨지 못한 채 포기하곤 한다. 혹은 ‘많은 시간을 들여 독서할 가치가 있는 작품인가’하는 의심이 장벽처럼 가로막기도 한다. 하지만, 물건 하나를 사더라도 제대로 된 물건을 사라는 말이 있다. 책도 마찬가지다. 단 한 작품을 읽더라도 제대로 된 작품을 읽는 것이 중요하다. 라이트 노벨 같은 것 한 수레 읽는 것보단 제대로 된 책 한 권, 혹은 한 질을 완독하는 것이 백배 천배 만배 낫다.

드라마 강희왕조(康熙王朝, 2001)
드라마 옹정황제(雍正王朝, 1999)
드라마 건륭전기(钱塘传奇, 2014)

134년 흥망성쇠를 모두 품었다!

얼웨허의 『제왕삼부곡(落霞三部曲)』 시리즈가 대단한 이유 중 하나는 청나라의 황금기인 강건성세(康建盛世)를 풍부하고 심오한 역사 지식과 예리하고 독특한 역사 통찰력으로 완성했다는 것이다. 중국 최전성기를 포함하는 134년 동안의 흥망성쇠가 이 적지 않은 분량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중국 봉건사회 마지막 번영의 화려하고 찬란한 면모를 한껏 뽐내면서도, 한편으로는 세계 최강 국가라 할지라도 정상에 오르면 내리막길밖에 없는 것처럼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음을 경고한다.

또한, 중국 최전성기를 포함하는 134년 동안의 흥망성쇠를 이끌었던 수백 명의 역사적 인물들이 이 적지 않은 분량에서 또랑또랑 헤엄치고 있다. 타고난 재능을 마음껏 뽐내는 그들은 시국을 가르고 영욕을 헤엄치며 하늘 끝은 알아도 땅끝은 모른다는 자금성에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막강한 권력을 호시탐탐 노리며 전시전종(全始全終)을 꿈꾼다. 삼라만상엔 기원, 발전, 번영, 쇠퇴, 심지어 죽음까지의 모든 과정이 명명백백하게 드러나 있다. 얼웨허의 소설은 역사는 결코 국가의 번영과 쇠퇴가 서로 다른 이름도 아니고 서로 다른 길도 아님을 애신각라 3대의 삶을 통해 통렬하게 보여준다. 한마디로 역사 향기가 우주의 심연처럼 깊고 산지에서 막 올라온 용정차처럼 그윽한 소설이다.

역사에 충실한 소설일지라도 읽는 재미가 없으면 추천하기 어렵다. 소설은 뭐니 뭐니 해도 캐릭터의 입체성, 플롯의 기교, 이야기의 개연성 및 진정성, 사건의 굴곡, 문장력 등 이런 면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져서 읽는 재미와 감흥도 다분해야 읽기 좋은 소설이다.

그런 면에서도 역시 완성도 높은 소설이라 할 수 있겠다. 강희제가 겪은 험난하면서도 찬란했던 인생처럼 역사적 사건과 등장인물들의 굴곡은 구곡십팔만(九曲十八灣)의 황하(黃河)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마치 김용의 소설을 읽는 듯한 강호의 활극과 삼국지를 읽는 듯한 전쟁의 치밀함, 그리고 치세와 명철보신(明哲保身)의 이치를 강의하는 듯한 철학의 요체가 읽으면 읽을수록 사색의 수레바퀴에 잠기게 만든다. 마치 끝이 보이지 않는 이야기 속으로 통째로 먹혀들어 가는 듯한 기분 좋은 아득한 기분에 휩싸인다.

그러기 때문에 읽으면서 호감 가는 인물이 등장한다면 바이두 백과(百度百科)를 참조하면서 잉여 지식을 탐색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제왕삼부곡』 등장인물 대부분은 실존 인물들이고, 그들의 소설 속 행적이나 일생 역시 역사에서 참고한 부분이 많으므로 사서와 소설의 차이와 흡사한 점을 비교하면서 읽는 것도 추천한다.

드라마 강희왕조의 한 장면
<「드라마 강희왕조(康熙王朝, 2001)」>

거듭날수록 수려해지는 문장력

사실 『강희대제』 첫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까지만 해도 이렇게 칭찬 일색인 리뷰를 쓸 줄은 몰랐다. 왜냐하면, 첫인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문장력이 기대보다 조촐해서 실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장력은 『강희대제』 4권을 넘기면서부터 사정이 확연하게 달라진다. 처음엔 시든 꽃처럼 별 볼 이루 없던 문장들이 어느 순간부터 달라진 면모를 보이기 시작하다가 『건륭황제』 때부턴 자양분을 듬뿍 먹은 꽃처럼 활짝 만개한다. 특히 불세출의 재주꾼 조설근(曹雪芹, 중국의 4대 기서 중 하나로 불리는 『홍루몽(紅樓夢)』의 저자)이 등장하는 부분에선 조설근에게 빙의라도 된 것처럼 얼웨허의 문장력은 괄목상대, 일취월장하기에 이른다. 『강희대제』는 무협지처럼 신나게 읽고, 『옹정황제』는 ‘부패 척결, 시정 개혁’의 정치 드라마처럼 가슴 졸이며 읽을 수 있고, 『건륭황제』는 앞의 두 재미에 더해 문학적 품격을 가늠하며 읽을 수 있다.

아무튼, 『건륭황제』에 이르면 문장 하나하나가 저울추가 되어 나를 사색의 나락으로 끌어내렸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고, 그럴 때마다 소가 여물을 씹듯 문장들을 되새김질하다 보니 명절 연휴의 고속도로처럼 독서 흐름이 정체되기도 다반사다. 하지만, 지루한 나날에 좋은 소설을 읽고 있으니 시간 가는 줄 몰랐던 것이 사실이고, 책의 끝에 다다를 땐 ‘석양은 한없이 좋으나 황혼이 가까워 오는 것은 서럽구나!’라고 했던 (포의재상 방포가 강희제의 지의에 대답하면서 인용했던) 선인들의 시구를 나 역시 인용하고 싶어진다. 내용이 지나치게 고아하지도, 지나치게 속되지도, 지나치게 가볍지도, 지나치게 무겁지도, 지나치게 부드럽지도, 지나치게 딱딱하지도 않아 남녀노소 누구라도 쉽고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적절히 기름진 소설이다.

리뷰를 쓰는 시계 머리 남자. AI로 생성한 이미지

마치면서...

기름때로 미끈미끈한 자판 위에 손가락 닿는 대로 정처 없이 글을 쓰다 보니 늘 그래왔던 것처럼 이것도 저것도 아닌 의미 없는 잡글이 돼버리고 말았다.

한없이 맑은 것이 너무 좋아 풍덩 뛰어들었으나 너무 깊은 탓에 허우적거리면서 생명의 위협마저 느끼는 그런 호수 같은 사람이 바로 강희제였다면, 처음엔 시든 꽃처럼 별 볼 일 없는 문장력에 시무룩하게 한숨을 짓다가 차츰 수려해지는 필력과 조금씩 드러나는 인간만사 새옹지마 같은 곡절 깊은 이야기에 영혼마저 잠식당하는 그런 바다 같은 작품이 바로 얼웨허(二月河)의 제왕삼부곡(落霞三部曲)이다. 배부르면 집 생각이 덜 나고, 술에 취하면 걱정이 반이 되듯, 이 42권으로 멈추지 않는 가없는 지루함과 시름을 달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끝으로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어느 찻집에서 정춘화가 부른 노래를 개작해 봤다. 참고로 강희제의 귀인인 정춘화는 태자 윤잉과 사통하는 바람에 비극적인 종말을 맞는 비운의 여인으로 등장한다.

시간이 한없이 무거워지는 책상 앞에서,
서투른 글솜씨로 리뷰를 쓰네.
적적함에 찌든 이내 가슴 달랠 길 없는데,
겨울 무덤에 술 석 잔을 처연하게 뿌리는 저 사람은 누구인가.
가로수와 공원의 들꽃에서 봄을 읽었지,
내 인생의 봄은 어디냐고 물으면서.
영욕과 불운이 어우러진 형언할 수 없는 안개 같은 삶,
지난 세월이 꿈만 같구나!

비록 보잘 것 없지만 광고 수익(Ad revenue)은 블로거의 콘텐츠 창작 의욕을 북돋우는 강장제이자 때론 하루하루를 이어주는 즐거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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