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중한도행: 왕의 길(雪中悍刀行, 2021) 시즌1
<고구마를 두고 티격태격하는 서봉년과 마부 황 씨> |
<멋지게 등장하는 캐릭터지만 의외로 비중이 크지 않아 아쉽다> |
웹소설 작가 천정화(陳正華)의 동명 원작을 각색한 무협 • 시대 드라마로 8개국 중 6개국을 평정한 이성왕(異姓王) 서효의 장자이자 세자이기도 한 서봉년이 운명을 개척하는 강호/정치 편력을 다루고 있다.
일단 1화는 서봉년과 마부 황 씨의 3년간의 곤궁했던 떠돌이 생활이 마침표를 향해가는 시점에서 시작된다. 여기서 이 드라마의 무술 액션을 처음으로 감상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산적들에게 둘러싸인 서봉년과 황 씨를 갑작스럽게 등장한 백여우 같은 검객 남궁부야(배우 张天爱)가 간결한 몇 가지 초식으로 산적들을 일망타진하는 장면이다.
슬로 모션과 클로즈업으로 약간은 과장되게, 그러나 아름답고 우아하게 묘사된 첫 무술 액션, 그리고 그 주체가 범상치 않은 미모의 소유자라는 사실에서 순간 감탄과 함께 기대가 싹트는 것은 무협 드라마를 좋아하는 한 사람으로선 인지상정이다.
<고수가 칼을 한 번 휘두르니 여단급 부대가 일망타진> |
<천둥 번개와 회오리와 파도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초절정 고수들> |
하지만, 이후 벌어지는 모든 무술 액션이 ‘슬로 모션’을 남용하는 것 같아 시시하고 아쉽다. 알맹이 없이 슬로 모션에만 의지하려는 것 같다는 의구심이 드는 순간 ‘슬로 모션’은 창작을 향한 기술적 열정이 아니라 매크로 같은 기계적인 작업이 되어버린 것 같아 씁쓸하다.
무술 액션 자체가 다른 드라마보다 별로 도드라져 보일 것이 없는데, 툭하면 슬로 모션을 남발하니 느려지는 액션만큼이나 지루함과 실망감도 끝없이 늘어진다. 여기에 천둥 번개를 소환하고, 말(馬) 다루듯 파도를 자유자재로 다루고, 칼질 한 번에 수천 명의 병사가 추풍낙엽처럼 쓰러지는 둥 초사이어인과 프리저의 대결을 연상시키는 인간계를 훌쩍 뛰어넘은 망상적인 액션은 (나처럼) 전통 무협 액션을 선호하는 팬들에겐 실망감을 넘어서 어이가 없게 만든다.
<슬로 모션의 장점은 간혹 이런 미학적인 장면이 연출된다는 것> |
<아,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고수만이 가질 수 있는 이 여유만만> |
특수 효과 기술이 향상되고 저렴하게 보편화되어서 그런 것일까? 요즘의 중국 무협 드라마는 빙글빙글 도는 슬로 모션이나 과장된 특수 효과를 무척이나 편애하는 것 같다. 기술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보단 기술에만 의존하려는 나태함이 이런 수준 이하의 액션을 나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것들이 제작하기 쉽고 편할지는 몰라도 지난 세기의 ‘진짜 무술 액션’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겐 어린애들이 나뭇가지를 검처럼 장난스레 휘두르는 것만큼도 못하다. 반면에 지난 세기의 ‘진짜 무술 액션’을 기억하지 못하는 세대들에겐 그럭저럭 먹히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운이 좋게도 오늘날의 배우들은 싸울 필요도 없고, 무술을 연습할 필요도 없다. 이 모든 수고로움은 기술이 해결해주니까 말이다.
<무당파 고수 왕중루부터 대황정을 전수받는 서봉년> |
<장난스러워 보이지만, 조조처럼 간사하고 잔인한 서효> |
이런 단점이 실망이란 감정으로 치환되기 전까진, 그러니까 초중반까진 그럭저럭 볼 수 있었다.
‘서봉년(徐凤年)’이라는 주인공 이름은 한국인이 애지중지하는 욕인 ‘XX년’처럼 들리기도 해서 다소 우스꽝스럽기는 하고, 바둑의 대국을 장악하듯 모든 일을 내 손 들여다보듯 알고 계획하는 서효(배우 胡军)의 무적 같은 치밀한 계략, 이에 맞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려는 서봉년(배우 张若昀)의 엘리트 자질, 서봉년의 속성 고수 과정과 시작부터 초절정 고수 이순강(배우 邱心志)을 경호원으로 얻은 것 등 이 모든 것이 보는 이로 하여금 뭔가 맥 빠지게 하지만, 초중반까진 그럭저럭 볼 수 있었다.
<서봉년의 하녀지만, 툭하면 삐쳐있는 강니> |
<왼쪽부터 서봉년의 큰누나, 작은누나, 남동생> |
그렇다고 그 이유를 딱히 말하기는 어렵다. 툭하면 삐쳐있는 강니(배우 李庚希)의 아이 같은 어눌한 말투와 20대 때의 서기(舒淇)를 연상시키는 청초한 외모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그저 서봉년 일행이 강호를 돈키호테처럼 편력하는 것에 바보처럼 덩달아 신이 난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서효와 서봉년이라는 부자 사이의 계략 대결, 그리고 이들 부자와 다른 세력 간의 지략 대결에 흥미를 느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자세한 사정이야 어찌 되었든, 중반 이후엔 ‘이왕 시작한 것 끝장을 보고야 말겠다’라는 근성 때문에 감상을 중도 포기하지 않았다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겠지만, 무협 액션을 ‘드래곤볼’이나 ‘마블 시리즈’에서 보는 액션과 구분을 두지 않는 사람, 빤질빤질하게 완전무결한 주인공을 선호하는 사람, 빠른 전개보다는 느긋한 전개를 선호하는 사람이라면 그럭저럭 볼만할 것 같다.
마지막 편에 시즌1 끝이라고 명시한 것을 보면 시즌2도 제작 예정인 것으로 보이는데, 지금으로선 아무리 볼 것이 없더라도 「설중한도행(雪中悍刀行)」 시즌2를 볼 일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카타르 월드컵에서 일본이 독일과 스페인을 차례로 격파한 것처럼 사람 일이란 것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만큼 장담할 수는 없겠다.
끝으로 드라마 「녹정기(2020)」에서 강희제 역을 맡은 장톈양(张天阳)과 영화 「신 의천도룡기(2022)」와 드라마 「촉산전기(2015)」에서 열연했던 재니스 맨(文咏珊) 등 안면이 있는 배우들은 역시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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