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서판 | 스티븐 핑커 | 과학이 말하는 인간 본성 개념
뜸해진 독서, 그래도 인연의 끈은 놓지 않으련다
염병할 코로나 때문에 지역뿐만 아니라 전국의 모든 도서관이 연달아 휴관하면서 불행하게도 10년 넘게 지속하여온 대망의 독서 릴레이가 속절없이 끊겼다. 그 여파로 시간이 조금 더 남게 되었고, 그것은 블로그 게시물 증가라는 물리적 현상으로 이어졌다. 무위(無爲)를 즐길 만큼 삶의 여유를 갖추지 못해서일까? 나는 시간이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것에 반항이라도 하듯 그다지 유용한 글들은 아니지만, 순전히 내 호기심과 누군가에겐 약간은 쓸모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자기 기만적인 만족에 도취하여 평소보다 조금 더 많은 글을 블로그에 게시했다.
웃긴 것은 강제적으로 도서관 출입이 금지되면서 독서에 대한 흥미도 주춤해졌다는 것이다. 인터넷에 널리 유포된 텍스트 본 등 읽을거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닌데, 꼭 종이책만 읽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텍스트 본에는 흥미가 가지 않는다. 텍스트 본은 도서관을 갈 수 없을 정도로 몸이 허약해지는 훗날을 위해 남겨둔 최후의 보루라고 여기는 것일까?
여기에 과민 대장 증후군이란 질병까지 앓고 있으니(이 병은 괘씸하게도 책을 읽거나 글을 쓸 때 증상이 더 심해진다), 독서는 더더욱 멀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도 빌어먹을 타성이란 것이 남아 있어서인지, 아니면 꼴같잖은 자존심 때문이지 책 읽기와 책 리뷰를 완전히 끊을 수는 없다. 비록 책 리뷰가 블로그 방문자 유입에 하등의 보탬이 안 되고, 요즘 내 블로그는 책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는 주제의 글들로 가득하고, 또 그런 방향으로 흘러가는 듯하지만, 책은 블로그를 시작하게 된 계기이자 한편으론 내 블로그의 자존심이랄까?
일주일 1 독서 및 1 리뷰까지는 아니더라도 한 달 1 독서 및 1 리뷰 정도는 간당간당이라도 달성해야겠다는 각오를 다짐하며 오늘 책 리뷰의 포문을 열어본다.
<사람은 양육과 교육으로 빚어질 수 있는 말랑말랑한 존재인가?> |
인간 본성 개념이 우리 삶에 끼치는 영향에 대한 과학적 통찰
일단 스티븐 핑커(Steven Pinker)의 『빈 서판(The Blank Slate)』은 책의 두께가 은근히 암시하는 것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인간 본성 개념과 연결된 다양하고 묵직한 주제를 다양한 맥락에서 포괄적으로 다룬, 그래서 그런지 지적 깜냥이 부족한 나로서는 몇몇 부분은 난해하고 혼잡하게만 느껴졌던 꽤 무거운 책이다. 솔직히 말해 논문을 읽는 것처럼 읽는 것 자체가 어려운 구간도 더러 있었다. 스티븐 핑커의 또 다른 책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How the Mind Works)』는 이 책보다 좀 더 두껍기는 하지만,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새 나의 독서력이 퇴보했다고 암상궂게 단정 짓기보다는 섣부른 지식과 엉성한 이해력으로 덤벼들 책은 아니라고 변명하고 싶다.
이쯤 되면 본론으로 들어가야 하고 그러고자 하는 마음 간절하지만, 어떻게 화두를 잡아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 비록 산업 시대 이전의 경제 성장처럼 느리고 빈곤퇴치처럼 더디게나마 두 번을 읽었지만, 『빈 서판』은 인간 본성(本性) 개념의 변천사와 인간 본성 개념이 현대 생활에 미치는 도덕적, 정서적, 정치적 영향이라는 바다처럼 깊고 산처럼 높고 우주처럼 넓은 주제를 다루는지라 내 입맛, 정확히 말하면 내 지적 수준에 딱 들어맞는 뭔가를 끄집어내어 주절대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인간이 영위하는 모든 행동 중에서 본성과 관련이 없는 것이 하나라도 있는가?’ 하는 자명한 질문을 떠올릴 줄 아는 사람이라면 이 책이 탐구하는 주제가 만만치 않다는 것쯤은 대번에 짐작하고도 남는다.
하지만 접근하기 어렵다고 해서, 혹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해서 이 책을 포기하라는 말은 아니다. 나를 비롯해 많은 사람이 잘못 알고 있는 인간 본성에 대한 개념이 우리의 도덕 관념과 정치 성향, 그리고 가치관을 어떻게 옭아매고 있는지를 발가벗긴 스티븐 핑커의 책을 포기한다는 것은 눈물겨운 노력에도 불구하고 타고난 무능력 때문에 비참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모든 사람을 포기한다는 말이고, 폭력으로 벌어지는 크고 작은 비극을 최소한도로 줄일 기회를 포기한다는 말이고, 아이를 부모와 사회 마음대로 주물럭댈 수 있는 말랑말랑한 공작용 재료쯤 된다고 생각하는 무시무시한 관행에서 비롯한 아이들과 부모의 스트레스를 그대로 버려둔다는 말이다.
그런데 ‘빈 서판’이 뭐냐고? 한마디로 말해 인간에게 타고난 본성 같은 것은 없으며 인간은 백지와 같은 상태로 태어난다. 그러므로 인간은 교육이나 사회적 설계를 통해 개조될 수 있다는 믿음이다.
‘빈 서판’ 개념은 개인적 소망이나 기호, 욕망, 즐거움을 깡그리 무시했다는 점에서 개인의 비극이지만, 전체주의 운동을 뒷받침하는 이데올로기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점에서 인류의 비극이기도 하다. 일례로 마오쩌둥이 문화대혁명이라는 인류 최대 규모의 대중 동원 운동을 시작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대중 운동과 교육을 통해 중국 인민을 공산주의 인간으로 개조할 수 있다는 망상에 가까운 믿음이 있었다.
오랜 세월 인류의 사고와 가치관을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나 점령해 온 ‘빈 서판’이란 개념은 이 한마디로도 깰 수 있다. 우리가 머릿속에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태어난다면, 어떻게 배울 수 있는 거지?
설마 그 수많은 지식인이 이 간단한 개념을 몰랐을까? 그런데도 ‘빈 서판’ 개념이 그토록 오랫동안 생존해 올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꿈꾼 유토피아를 완성하기 위해선 인간의 본성은 교육과 양육으로 사회와 국가가 원하는 인간으로 척척 빚어낼 수 있는 물컹물컹한 찰흙 같은 것이어야 했으리라.
과학이 설명하는 본성과 양육
간혹 우리는 타인의 불쾌하거나 버르장머리 없는 행동을 보면 은연중에 가정 교육을 탓한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관행이며, 부모들만 애꿎게 만드는 터무니없는 비난이다. 『빈 서판』은 사람의 인성, 지능, 기질, 성격 등은 가정환경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명확하게 설명한다. 부모가 아무리 잔소리를 하고, 말썽을 부리지 않도록 타이르고, 때로는 온갖 감언이설로 아첨하고, 모범적인 행동을 보여도 아이들의 성격은 절대로 부모의 의도대로 형성되지 않는다. 그 사람이 버릇없게 군다면 그냥 그 사람은 그렇게 태어난 것이다. 그것은 고칠 수도 없으며 고치려 해도 안 된다. 사랑에 눈이 멀어 결혼한 여자의 비극은 남자의 성격을 고칠 수 있으리라는 오판에서 비롯된 경우가 종종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런 사실에 대해 고개를 주억거리며 수긍하는 사람도 있고, 놀라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어안이 벙벙해진 사람도 있을 것이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분노에 휩싸인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가 상식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던 인간 본성 개념이 과학적으로 밝혀낸 사실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말이다. 앞으론 소주잔을 기울이며 지금의 고통과 불행을 초래한 원흉을 사형대에 세운 다음 온갖 불만 불평을 따발총처럼 쏟아부을 때 잊지 말고 빌어먹을 ‘유전자’도 추가하자.
그렇다고 해도 유전자가 모든 것을 결정하지는 않는다. 유전자가 우리의 절반을 완성한다면, 나머지 절반은 양육도 아니고 가정환경의 차이도 아닌, 바로 우연이라고 핑커는 설명한다. 명확한 인과 관계를 다루는 과학에서 우연이라니, 참말로 아리송하면서도 무책임한 말처럼 들린다. 하지만, 진화의 법칙이 다름 아닌 우연의 산물이라는 점을 떠올리면 그렇게 놀랄 일도 아니다. 세상은 여전히 우리가 알 수 없는 일들로 가득하고 그중 대부분은 ‘우연’으로 밖에는 설명할 도리가 없다. 어쩌면 인간의 삶이 인간다운 것은 예측할 수 없는 운명과 예측할 수 있는 본성이 변증법적으로 빚어내는 희로애락에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갖은 우여곡절에도 여전히 살아갈 맛이 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아무튼,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교수 부부의 자식이 교수나 그 비슷한 지적인 분야에서 일하게 될 확률이 높은 것은 교수 부부의 학구적인 생활 • 학구적인 태도 • 학구적인 가르침이 자식에게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니라 그들이 교수가 될 수 있었던 높은 지능과 학구적인 성격의 유전자를 자식이 물려받기 때문이다. 또한, 교수의 자식은 남들보다 우연히든 필연이든 학구적이고 지적인 경험을 쌓을 확률도 더 높다.
이제 자식을 양육으로 의사, 변호사, 검사, 스포츠 선수, 연예인 등 원하는 대로 키울 수 있다고 주야장천 주장해온 기존 양육 전문가들은 더는 설 자리가 없게 된 것이며, 부모들은 어떤 수단을 써서든 아이를 성공한 사람으로 키워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릴 필요도 없다.
그렇다고 양육이 불필요하단 말은 아니다. 아이가 선호하는 것과 아이의 능력, 그리고 아이의 한계를 무시한 채 부모의 환상을 아이에게 강요함으로써 모두를 불행에 빠트리곤 했던 기존의 계산적이고 부모 중심적인 양육 관념은 미련 없이 쓰레기통에 쳐넣어야 한다면, 대신 그 자리엔 아이의 건강과 행복, 그리고 즐거움을 주기 위한 양육이 자리 잡게 될 것이다. 아이와 비디오 게임을 할 때도 뉴런을 자극하려는 것이 아니라 서로 즐겁게 지내기 위해서라는 사실에 아이와 부모는 서로가 친구처럼 느껴질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걸 당신도 알게 된다면』(칼 필레머)이라는 책에서 80, 90년을 살아온 ‘인생의 현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충고하는 것도 그것이다. 자식하고 많은 시간을 보내라고. 왜? 추억은 소중한 것이니까.
아무튼, 아이들도 어른들처럼 즐거움을 추구하는 인간이고, 인간의 본성은 그렇게 설계되어 있다. 우리는 종종 이런 사실, 즉 아이도 즐거움을 추구하고 고통은 피하려고 하는 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음으로써 예견된 비극을 초래하곤 한다.
<내가 이런 건 모두 유전자 탓이다?> |
인생은 선택의 연속
불행한 일이 닥치거나 일이 잘 안 풀릴 때 푸념으로 내뱉곤 하던 속담이 떠오른다. ‘잘되면 제 탓, 못되면 조상 탓’이란 속담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마냥 웃어넘길 말이 아니다. 우리의 유전자는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한 개인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우연이 우리의 운명을 지긋지긋하게 간섭한다. 유전자가 절반, 그리고 우연이 나머지 절반이라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원래 허무한 것이 인생이라지만, 냉철해야 할 과학조차도 인생의 허무함을 지지하는 듯하다. 변기통 물에 쓸려내러 가듯 오장육부가 깡그리 비워지는 것이 공허의 극치를 느끼게 한다.
하지만, 우리는 선택한다. 비록 선택의 가짓수와 선택할 기회의 수는 그 사람의 운명과 환경과 재능 등 기타 조건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 누군가가 우리 머리에 총구를 들이대지 않는 이상 ─ 우리는 분명히 자신의 의지와 동기와 욕망과 목적에 따라 선택을 한다. 다들 공감하겠지만, 때때로 우리는 그때 그 사람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때 그 직업을 선택했더라면, 그때 다른 대학 다른 학과를 선택했더라면, 그때 그런 일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등등을 운운하면서 후회와 미련으로 점철된 인생을 씁쓸하게 뒤돌아볼 때가 있다. 본성과 우연이 우리를 옭아맬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결국엔 그 매듭을 풀 수 있는 것도, 혹은 풀어내는 것도 우리의 선택이다.
내가 「하나만의 선택」(박이문) 리뷰에서 이런 말을 하지 않았던가? 한 사람의 인생은 연속된 ‘하나만의 선택’이 그려온 기하학적 도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고. 그렇다면 그 다사다난했던 도식을 인간 본성을 꿰뚫는 통찰력에다가 해학과 풍자를 풍성하게 곁들여 맛깔스럽게 풀어쓴 것이야말로 진정한 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하니 좋은 책을 많이 읽자!
우리의 성격, 기질, 지능, 인성을 유전자와 우연이 주물러댄다고 하더라도 인생의 궤적을 그려나가는 것은 우리의 선택이 있기에 가능하다고 말한다면, 너무 낭만적인가?
마무리
유전자가 빚어낸 본성은 우리에게 보편적 인간성을 부여함으로써 인류를 하나로 묶기도 하지만, 또한 선천적 관심사 • 개인적 선호에 차이를 둠으로써 우리를 다르게 만들기도 한다.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차별을 용인하는 것으로 오해받았던 지적으로나 의식적으로나 미성숙했던 시절이 한때라고 치부하기엔 꽤 긴 세월 동안 존재해 오면서 인류의 지식 • 의식의 진보를 가로막았지만, 그 차이야말로 우리 주변에서 목격할 수 있는 능력과 기질의 다양함을 만들어내는 원천이 아닌가 싶다.
누구도 노예가 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누구도 굴욕감을 느끼기를 좋아하지 않고, 누구도 불공정하게 대우받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이 보편적 인간성이라면, 누구나 개인적 관심과 선호에 따라 즐거움을 추구하고 싶은 것도 보편적 인간성이다. 이렇게 말하니 뭔가 짠하게 와닿지 않는가?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나와 당신의 이기심에 무참히 짓밟힌 타인의 인간성에 애도를 표하며 오늘의 짧지 않은 글을 마치련다.
격노와 사랑과 신비와 영원한 매력이 가득하며 예측이 가능한 그것을 우리는 인간 본성이라 부른다. (p759)
사회학이 사회적으로 위험할 때가 개념이나 관념을 0과 1로 나누고, 나 또는 우리가 1이라 주장하는 원사이드로 흐를 경우라 봅니다. DNA에 대한 건 인류전체와 개인으로 나눠야 하겠지만 그 요소들이 분명 존재한다는 거에 대해선 참이다라고 전제합니다. 진화라는 개념도 DNA의 연속성이 전제되어야만 하니까요. 세줄 요약된 빈서판의 논지를 보며 문득 아들러가 떠오르는 데.. 환경적인 요인을 무시했다는 공통점이 있네요. 사회학은 곧 그 시점의 통계학이라 봅니다. 통계의 정규분포가 단연코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건 좋은 환경에 사랑을 받고 자란 아이와 불우한 환경에 사랑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와의 범죄율의 차이입니다. 환경의 차이가 없다? 개인의 선택이다? 다 개코같은 궤변이란 거죠. 특수한 예로 전체를 부정하는..
답글삭제여튼 늦은 시간 취기에도.. 알클론에 대한 테스트 결과치를 끄적여 봐야 겠다는 생각에 들어왔다가
그거는 뒷전이고
다른 제목들이 눈에 띄어 주절거리고 갑니다.
.... 정독하게 만드는 필력이 있으시네요.
사람들 사는 데에 있어 절대 부정하지 못하는 하나의 "대전제"는
저마다 "행복하자" 란 생각입니다.
행복하길 바랍니다.
제가 쓴 책 리뷰에 처음으로 댓글을 달아주신 것만으로도 눈물이 핑 도는데, 이렇게 정중하고 진중한 글을 남겨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삭제글을 쓸 때마다 아무도 읽어주지 않는 글을 쓰면 뭐하나 하는 무력감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날 위해 쓰는 것이라고 자신을 토닥여보지만, 부족한 글쓰기 능력을 탓하는 것만큼이나 부질없는 일이었습니다.
LBENCH님으 댓글을 통해 블로거에겐 진심이 담긴 댓글만 한 격려와 응원이 없다는 것을 새삼스레 깨닫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끝으로 ‘환경’을 말씀하시니 스탠퍼드 교도소 실험으로 상황과 시스템 힘의 위력을 보여준 필립 짐바르도의 책 루시퍼 이펙트가 생각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