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시 어폰(Wish Upon, 2017) | 그래도 나는 소원을 빌련다
"음악이 끝나면 피의 대가가 따른다."
어느 날 강아지 맥스와 함께 산책하러 나갔다 오니 천장에 목을 매달은 채 죽어 있는 엄마. 12년이 지나고 나서도 클레어는 엄마를 그리워할 때마다 그때 왜 엄마가 갑작스럽게 자살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동네방네 쓰레기통을 뒤지며 고물을 줍는 클레어의 아빠 조나단은 그날도 이곳저곳의 쓰레기통을 뒤지다가 어딘지 모르게 골동품처럼 고아한 풍취가 느껴지는 나무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팔각형 상자를 발견한다. 조나단은 겉보기에도 멀쩡하고 그냥 내다 팔기에는 아까워서 뮤직박스처럼 보이는 상자를 딸에게 선물한다. 상자 여기저기에는 오래된 한자로 뭔가 씌어 있었고, 마침 학교에서 중국어를 배우던 클레어는 그중 ‘소원’, ‘일곱’이라는 단어를 해독해낸다. 잠시 후 클레어는 무심결에 학교에서 자신을 끈질기게 괴롭히던 달시 채프먼이 썩어버리면 좋겠다고, 큰 기대 없이 그저 하소연하듯 상자 앞에서 소원을 빈다.
놀랍게도 클레어의 소원은 실현되었고, 이 일로 클레어는 상자에게 소원을 빌면 그것이 실현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클레어의 첫 번째 소원이 실현된 날 엄마가 살아있을 때부터 함께 살아온 강아지 맥스는 예기치 않은 사고로 죽음을 맞는다. 이에 아랑곳 없이 클레어는 곧바로 인기 있는 남학생 폴이 자신을 좋아하게 해달라는 두 번째 소원을 빌고, 대저택에서 외롭게 혼자 살던 부유한 삼촌이 갑자기 사망하자 삼촌의 모든 재산을 자신이 상속받게 해달라는 세 번째 소원을 빈다. 멋진 남자친구에 엄청난 재산을 하루아침에 얻은 클레어는 세상 모든 것을 가진 것 같았다. 하지만, 클레어는 소원은 공짜가 아니라는 사실뿐만 아니라 자신이 소원을 빌 때마다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있다는 것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소원성취의 대가가 무엇인지, 혹은 소원을 빌 때마다 무슨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조차 몰랐을 때 소원을 비는 것과 소원을 빌 때마다 누군가 희생되는 끔찍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을 때 소원을 비는 것은 다르다. 전자는 ‘무지’라는 변명의 여지라도 있지만, 후자는 도덕적으로 도저히 용납될 수 있는 행동이 아니다. 그럼에도, 「위시 어폰(Wish Upon, 2017)」의 여주인공 클레어는 소원을 빈다. 그리고 관객은 그런 여주인공의 지나친 탐욕과 이기심에 눈살을 찌푸리고 일부는 짜증을 폭발시킨다.
그렇다면 당신이 클레어이고 소원에 따르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을 아직 몰랐을 때라면 과연 어떤 소원을 빌겠는가? 클레어의 친구가 말한 대로 세상의 부조리를 타파하려는 고상한 소원을 비는데, 귀중한 소원 한 개를 소비하겠는가? 그리고 그 소원이 이루어지고 나서 소원에 따르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소원상자를 망설임 없이 쉽게 포기할 수 있겠는가? 만약 소원 성취에 따른 대가가 영화 「위시 어폰」처럼 주변 인물이 아니라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다른 나라의 사람이라고 해도? 여기서 고민이나 갈등을 전혀 느끼지 않고 상자를 포기한다면, 그는 군자라고 불리 울만 하고, 잠시 번민에 휩싸이다가 마지못해 상자를 포기한다면 그는 아주 평범한 인간이며, 어찌 되든 끝까지 상자를 포기하지 못한다면 그는 이미 괴물이다. 자, 당신은 군자인가? 괴물인가? 아니면 평범한 사람인가?
아무튼, 한 번 악마의 꾀에 넘어간 인간은 제아무리 잔머리를 굴리고 잔재주를 부린다 해도 결코 악마의 달콤한 속박게서 벗어날 수 없음을 영화 「위시 어폰」은 보여주지만, 그 고지식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과정이 평범하지 못해 지루하게까지 느껴진다. 한마디로 이 영화가 공포 영화라고 하기엔 너무나 격이 떨어진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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