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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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역사 | 신화에서 조롱까지, 악의 개념에 대한 역사적 고찰

악의 역사 | 제프리 버튼 러셀 | 신화에서 조롱까지, 악의 개념에 대한 역사적 고찰

책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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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는 믿지 않지만, 개념은 살아 있다!

공교롭게도 이 글의 초안을 작성하는 오늘(2024년 1월 18일), 중국 연구진이 치사율 100%에 이르는 코로나 변이 바이러스를 만들었다는 인터넷 기사를 보았다. 충분히 짐작할 수 있듯 이 기사 댓글엔 중국을 악마화하는 감정적인 댓글이 함박눈처럼 펑펑 휘날렸다. 똥통에 한 1년 묵혔다 나온 것처럼 구린내가 폴폴 풍기는 쓰레기 같은 댓글들이 암탉을 쫓는 햇병아리처럼 인터넷 기사에 졸졸 따라다니는 일이 비단 어제오늘 일은 아니지만, 우리들은 우리의 욕구를 방해하거나 감정적으로 불쾌하게 만드는 것들을 싸잡아 악마라고 부르곤 한다.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세계 경제를 휘청하게 한 푸틴도 악마고, 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히틀러도 악마다. 국가 위상을 지옥으로 떨어트린 것도 모자라 내란을 획책한 윤석열도 악마고, 인민의 피와 살을 제물로 핵무기 개발을 강행하는 김정은도 악마고, 지난번 팬데믹을 초월하고도 남는 파괴적인 고통을 인류에게 안겨줄 수 있는 무시무시한 바이러스 개발을 허용한 시진핑도 악마다.

산업혁명 이후 근대적 합리주의와 실증주의가 신앙을 대체하면서 초월적인 존재로서의 악마는 몰락의 길을 걸어왔고, 엔간히 교육받은 사람들이 신의 존재를 믿지 않듯 요즘 사람들은 악마의 존재도 믿지 않는다. 현대인에게 악마는 게임, 영화, 연극, 음악 등 문화 • 예술 분야에서 자극적인 영감이나 대중의 흥미를 끄는 소재가 필요할 때 저렴하게 캐스팅할 수 있는 엑스트라 정도이거나, 앞에 언급한 것처럼 우리 기분을 망치는 것들을 욕 대신 점잖게 비난할 때 무난하게 써먹을 수 있는 상징적인 용어로 쓰일 뿐이다.

이것은 초월적이고 신화적이고 종교적이고 전통적인 존재로서의 악마 개념은 쇠퇴했지만, 악을 상징하는 악마로서의 개념은 여전히 문화 속에 살아있음을 의미한다. 초월적이고 신화적이고 종교적이고 전통적인 존재로서의 악마 개념이 어떻게 탄생했고, 이렇게 만들어진 악마의 개념이 어떤 곡절과 변화를 거쳐 현재의 악마가 되었는지를 역사적으로 탐구한 책이 바로 제프리 버튼 러셀(Jeffrey Burton Russell)의 『악의 역사』 4부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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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에서 조롱까지, 악의 개념에 대한 역사적 고찰

『악의 역사』 4부작은 악의 존재를 빛과 어둠 사이의 영적인 투쟁으로 설명하려 들었던 고대의 신화 • 성서 시대부터 악마에 대한 믿음을 ‘마녀재판’으로 보여주었던 중세를 거쳐 악마가 풍자적 • 희극적 • 상업적 소재로 전락한 근대에 이르기까지 악과 악마의 개념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신학적, 철학적, 역사적으로 고찰한다(4권의 정식 제목은, 『데블: 고대로부터 원시 기독교까지 악의 인격화(The Devil: Perceptions of Evil from Antiquity to Primitive Christianity, 1977)』, 『사탄: 초기 기독교의 전통(Satan: The Early Christian Tradition), 1981』, 『루시퍼: 중세의 악마(Lucifer: The Devil in the Middle Ages), 1984』, 『메피스토펠레스: 근대 세계의 악마(Mephistopheles: The Devil in the Modern World), 1986』 ).

세계 각국 다양한 사람들이 광장시장을 가득 메운 것처럼 신앙, 신화, 전설, 종교, 전통, 철학, 문학, 예술, 역사 등 다양한 분야의 학문으로 가득 찬 이 책은 가히 현학의 결정판이라 할만하다. 이 모든 분야를 제집 드나들 듯이 논술하는 러셀의 박학다식과 명철함은 놀랍고도 부럽지만, 나의 독해력을 껑충 뛰어넘는 사유의 깊이와 통찰의 심오함은 툭하면 뇌에 과부하를 일으켜 졸음을 폭풍우처럼 몰고 오기 일쑤다. 러셀의 사유는 마치 광활한 바다를 항해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데 조타수, 즉 문맥을 놓치는 순간 파도에 휩쓸려 정신을 잃을 것만 같다.

사정이 이러한 고로 문맥을 더듬는 두 눈이 안절부절못하는 것은 약과이고, 하루 한 시간 읽기도 벅찰 때가 많다. 이렇게 읽기가 수월한 책은 아니지만, 치기 어린 감상으로도 악과 악마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사람이나 시대가 악마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다룬 책 중에서 통찰력과 깊이를 잃지 않고 여러 분야를 아우르는 책은 러셀의 책 외에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독보적인 책이지 않을까 싶다. 그럼에도 섣불리 권하기 어려운 것은 바쁜 현대인에게 상당히 부담스러운 4권이라는 분량과 한 페이지 넘기는데도 세월아 네월아 하게 만드는 현학적 내용도 있지만, 무엇보다 소재의 특성상 종교적 • 신앙적 고찰들이 주를 이루기 때문에 요즘처럼 비종교적인 시대에, 혹은 종교를 인맥 확장이나 겉치레 정도로 여기는 사람들이 소화하기엔 체증을 유발할 만한 불편한 논쟁들이 주를 이루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종교를 시대착오적인 폐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면 신의 전능함과 신의 절대 선함이 공존할 수 있음을 논증하려는 신학자들의 모순으로 가득 찬 주장은 가소롭다 못해 발악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현대인이 생각하는 노예와 노예제도가 전통으로 받아들여지던 시대에 살던 사람들이 생각하는 노예가 다르듯 『악의 역사』 속에서 진행되는 논쟁 하나하나에 현대적인 사고방식으로 감응하면,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그 정도가 심하면 제프리 버튼 러셀의 심오한 역사적 고찰이 고리타분한 종교적 논쟁으로 비친다. 그 시대 사람들에겐 그 사람들만의 사고방식과 전통이 있다. 앎의 창고 문을 블랙프라이데이의 쇼핑몰처럼 개나 소나 다 들어올 수 있도록 활짝 개방하자. 신이 존재하는지 아닌지, 신이 우주를 창조했는지 아닌지, 신이 전능한지 아닌지, 신이 선한지 아닌지, 아담과 이브가 원죄를 범했는지 아닌지, 그리스도가 인류를 구원했는지 아닌지, 신이 악을 창조했는지 아닌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악에 대한 이해가 시대에 따라 변화하고 발전했다는 사실이다.

여러 시대에 걸쳐 악의 페르소나는 악마라는 악의 의인화에 대한 심오한 이해에 뿌리를 둔 풍부한 전통에 의해 형성되었다. 이 전통은 선과 악 사이의 끊임없는 투쟁에서 작용하는 헤아릴 수 없는 힘을 이해하고 합리화하려는 인류의 노력이라고 볼 수 있다. 고대 신화에서부터 종교 및 철학에 이르기까지 악마의 이미지는 진화하고 적응하면서 과거와 현재 문명의 집단정신에 대한 통찰력을 드러낸다. 이처럼 사람들의 오랜 세월 동안에 걸쳐 형성된 신화와 전통, 그리고 깊이 있는 철학적 고찰에 뿌리를 두고 있는 개념 • 현상으로서의 악마는 분명히 존재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악마의 존재는 우리의 상상력과 믿음의 영역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다. 앞에서도 말했듯 일을 훼방 놓거나 기분을 망치는 사람들을 악을 의인화한 ‘악마(Devil)로 지칭하듯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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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미스터리, 악의 존재

악마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고 해서 악의 존재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우린 가르쳐주지 않아도 세상에 악이 만연하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미국, 러시아, 중국 등이 보유한 핵무기의 양은 인류를 몇 번이고 멸망시키고도 남을 정도이고, 21세기의 1/4을 지나가는 지금도 전쟁과 테러는 끊이질 않는다. 이뿐만 아니라 내가 ‘무슨 글을 써야 하나?’ 곰곰이 생각하며 키보드 자판을 탁탁탁 두드릴 때마다 어딘가에선 ‘내일은 밥을 먹을 수 있을까?’ 묵묵히 희망하는 굶주린 아이들의 흉측하게 부풀어 오른 뱃속에선 꼬르륵 소리가 따발총처럼 울려 퍼진다. 전쟁보다 더 무서운 지속적인 테러는 종식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사람의 근본이 선하든, 악하든 상관없이 최소한 인류 역사가 문자로 기록된 이후 세상에는 악이 만연해 왔고, 우린 죽을 때까지 수없이 많은 악을 경험하고 보게 된다. 또한, 우린 스스로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악행을 저지른다.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있을지라도 고통에 신음하고 슬픔에 이성을 잃고 절망에 허덕이는 사람들이 이 순간에도 신의 자비를 간절히 구원하며 기도를 올리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정말로 신이 존재한다면, 왜 신은 악을 허용한 것일까? 악마에게 우리를 괴롭히게 만들고 자신에게 자비를 구걸하게 하려고? 천국 같은 곳에서 오래 살면 권태에 빠져 천국의 진가를 잊을까 봐? 악의 존재를 통해 선의 가치를 빛내고자? 선만이 존재하는 세상은 너무 무료하니까 악과의 투쟁을 통해 긴장감 있는 삶을 살라고? 최후의 심판의 날을 위한 멋진 반전을 위해?

하루하루 두부처럼 푸석푸석해지는 내 작은 뇌로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전능하고 선한 신이 창조했다는 이 우주에 굶주림의 고통 속에서 하루하루를 견뎌야 하는 아이들이 한두 명도 아닌 우주의 별처럼 무수히 존재해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궁지에 몰리면, 인간의 이성으로는 신의 뜻을 헤아릴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고 반박하는 신학자들의 개구멍 같은 변명을 받아들여야 할까? 그럴 바엔 차라리 악마가 되리라. 자신을 믿지 않는다고 하여 자기 자식이라 하는 인간들을 지옥 불에 던져버리는 신에 반항하는 악마가 되리라.

악의 존재는 수 세기 동안 인류를 혼란스럽게 했던 영원한 수수께끼였을 만큼 질문은 많고 답은 적다. 우리는 계속해서 악의 유혹에 굴복할 것인가, 아니면 마침내 그것을 극복하는 법을 배울 것인가? 그것은 우리의 지식만큼 불확실하다. 현재 진행 중인 전쟁과 곧 터질 것 같은 또 다른 전쟁을 떠올리면 두려움과 공포로 숨이 막힌다. 그러나 이 모든 어둠 속에서도 희망의 빛을 굳이 밝혀본다고 하면, 우리가 악의 존재를 인식하고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우리 안에 여전히 선한 불꽃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이 불꽃이야말로 우리가 악을 극복하고 신이 예지한 궁극적인 평화와 번영의 시대를 열어줄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정말로 그랬으면 참말로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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