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순이 | 리촨펑 | 낯선 문학상, 낯선 작가, 낯선 소설
낯선 문학상, 낯선 작가, 낯선 소설
리촨펑(李传峰)의 『말순이(白虎寨)』는 잡다한 책들이 즐비한 한국 서점에선 과일나무 앞에 줄 선 오스트랄로피테쿠스들 사이에 끼어 있는 전라의 백인 여성만큼이나 낯선 중국 농민 문학이다. 중국의 ‘농민, 농촌소설’이라고 하면 옌롄커(閻連科)의 한국어판을 거의 다 읽어 본 한 사람으로선 옌롄커 작품 같은 초신성처럼 번득이고 레이저 광선처럼 따끔 예리하고 블랙홀처럼 깊고 깊은 그런 작품을 기대할 수 있지만, 그러하기엔 ‘리촨펑’이라는 작가의 명성이 너무나도 미미하다. 사실상 나에게 있어선 오늘의 이 만남이 작가와의 첫 만남이다.
지금까지 몇몇 중국 작가의 이런저런 책을 읽어오면서 ‘리촨펑’이라는 이름이 언급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내가 무지해서 작가의 왕왕한 명성을 놓쳤을 수도 있고, 원체 작가의 명성이 중국의 가까우면서도 먼 이웃 나라인 한국에까지 자자할 정도로 흥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어찌 되었든, 중국 소수민족 문학 최고의 상이라 일컬어지는 [준마상(骏马奖)]을 수상했다는 사실은 빨간 하이힐 구두 위로 대나무처럼 솟은 미녀의 늘씬한 자태 정도까지는 못 되더라도 표준 허리 엉덩이 비율에 표준 체질량지수를 갖춘 중년 여자의 펑퍼짐한 엉덩이만큼의 욕정을 불러일으키기엔 충분하다. 상 이름에도 동물 이름(马)이 들어가고, 책 제목 역시 동물 이름(虎)이 들어가니 뭔가 대단할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용감하고 과감하고 결단성 있게 대출을 강행했다.
<출처: 바이두> |
빈곤과의 눈물겨운 전쟁
아쉽게도 옌롄커의 칠정(七情)을 역병처럼 뒤흔드는 그런 글쓰기는 없었다. (번역가 김태성 씨의 말을 빌리면)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서 영혼을 담아 목숨을 걸고 써내는 ‘발분지작(發憤之作)’ 같은 글쓰기는 더더욱 없었다. 물론 마주하는 작가마다 옌롄커나 한사오궁이나 셀마 라게를뢰프 같은 신의 경지에 이른 글쓰기를 요구하는 것은 놀부 심보와도 비교할 수 없는 지나친 욕심이자 옆집 개가 사서삼경을 통달했다는 말만큼이나 황당한 요구다.
아무튼, 『말순이』는 ‘경지에 도달했다’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글쓰기는 아니더라도 나름 읽는 재미를 느낄 수 있는 보통 이상의 글쓰기라 할 수는 있겠다. 다만, 번역을 두 사람이 나누어서 하는 바람에 뭔가 호흡이 흐트러진 것 같은 그런 글쓰기가 되어버리고 말았다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다.
과학 • 역사 도서처럼 의미가 명확하고 형이하학적인 문장이 주를 이루는 책은 몇 사람이 나누어 번역하는 것을 종종 보아왔는데, (내 생각엔 그 어느 분야보다) 일관되고 통일된 번역이 중요시되는 문학 작품을 몇 사람이 나누어 번역하는 경우는 처음 보는 것 같다. 이런 경우도 종잇장도 맞들면 나은 경우일까 싶지만, 읽는 사람으로선 낭패가 아닐 수 없다. 문학 작품을 번역할 때 여러 사람이 나누어 작업을 하면, 각 번역가의 스타일이나 해석 차이로 인해 문체의 일관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번역은 그냥 줄거리만 전달하는 단순한 언어 변환 작업이 아니다. 번역은 문화적 맥락과 작가의 의도를 깊이 이해하고 이를 새로운 언어로 재창조하는 알려지지 않은 예술적인 재해석 과정이다(비슷한 이치로 한강이 뒤늦게 노벨문학상 작품을 수상한 연유로 번역 품질을 거론할 수 있겠다). 따라서, 한 사람의 번역가가 작품 전체를 온전히 책임지는 것이 마땅하다.
아무튼, 두 사람이 번역을 나누어 맡다 보니 마치 한 작품을 서로 다른 사람이 나누어 쓴 것처럼 문체가 통일되지 못한 혼란 때문에 작품에 몰입하기 어렵다. 자꾸 이야기의 흐름에서 미끄러진다고 할까나? 번역은 그렇다 치러라도 사건 사이사이의 시간 구성이 매우 모호하고, 이야기의 앞뒤가 안 맞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런 걸 두고 플롯이 허술하다고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자질구레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말 그대로 자질구레한 단점이다!) 이제 막 성년에 들어선 말순이(원래 이름은 幺妹子, 즉 야오메이즈)가 땅보다 하늘이 더 가까운 산골 궁핍한 마을 백호채에서 ‘중국 사회주의 신농촌’이라는 뭔가 신나는 기치 아래 우당탕 좌충우돌 펼쳐지는 빈곤과의 눈물겨운 전쟁은 칠정(七情)까지는 아니 되더라도 오정(五情)을 자극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한마디로 『말순이』는 울고 웃고 분노하고 기뻐하고 읽을 수 있는, 대체로 가벼운 편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소설이라는 말이다.
‘소수민족 문화’의 보존 격인 소설
어쩌면 소설 『말순이』의 진정한 값어치는 오랫동안 소외와 괄시와 억압 상태에서 다소 벗어난 중국 소수민족의 문화 보존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작가가 소수민족인 투자족(土家族, ‘토가족’이라고도 씀) 출신이기도 하고, 말순이를 비롯한 백호채 마을 사람들도 투자족의 후예들이다. 그래서 소설은 민족적 전통에 현대적인 느낌을 더한 것이 이미 반듯하게 현대화된 농촌과 함께 사는 한국인으로선 경험할 수 없는 신비롭고도 고졸한 멋이 있다.
『말순이』엔 여아회(女兒會)라는 축제가 등장하는데, 이것은 양우생(梁羽生)의 소설 『무당제일검(武當第一劍)』을 각색한 드라마 「무당일검(武当一剑)」 5편에도 등장하는 투자족의 정서와 지역적 전통을 담은 소수민족 문화다. 옥경(무당일검 주인공)의 누나 남수령은 여아회는 신농가(神农架) 특유의 맞선 대회로 매년 이날이면 인근 여자애들은 양절자(?)를 입고 나온다고 설명한다. 중국 드라마나 중국 방송을 자주 보는 사람은 알겠지만, 중국 소수민족의 알록달록하거나 진한 색감의 화려한 옷과 반짝이는 장신구와 천으로 머리를 두르는 터번을 기억할 것이다. 이들의 발랄한 율동과 음악도 듣는 사람의 엉덩이를 못나게 촐싹거리게 할 정도로 참으로 흥겹다.
마을의 빈곤 탈출을 위해 월급도 못 받고 평생 고생만 직사하게 하다가 마을에 도로가 개통되는 광명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말순의 아빠이자 원로당원인 탄젠궈의 화려하면서도 구성지고, 떠들썩하면서도 구슬픈 장례식 역시 소수민족의 독특한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중요 장면이다. 다만, 도시인에게 전통적 삶에 대한 가치를 환기할 수 있는 모처럼의 기회를 주는 민속문화적 묘사가 기대만큼 많이도, 기대만큼 세밀하게 소개되지 않는 것이 다소 아쉽다. 여아회와 투자족 장례식에 좀 더 많은 지면을 할당했으면 더 좋았을 것을, 그리고 끝끝내 제대로 된 투자족 결혼식이 등장하지 않은 것은 체증처럼 마음에 걸린다. 『말순이』가 『상록수』 같은 계몽 • 농촌 발전 소설에만 머무르지 않게 하는 것이 바로 이런 소수민족 문화가 반영되어 있기 때문인데, 묘사가 짧고 세밀하지 않아서인지 방금 우려낸 원두커피 향만큼 진한 맛은 없다.
<드라마 「무당제일검(武當第一劍)」의 한 장면> |
경이로운 풍경 속의 경이로운 빈곤
백호채가 낙후하고 빈곤하다고 하니 소설의 시대적 배경이 먼 과거인 줄 오해할 수도 있겠으나,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2008년 금융 위기 전후이고, 2008년이면 베이징 올림픽이 열리던 해이다. 그때까지도 백호채는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았으니, 백호채의 낙후 수준은 가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 이유는 문명과 마을을 만리장성처럼 가로막고 있는 차오방 절벽 때문인데, 이 절벽은 신중국 건립 이후 60여 년 동안 말순이의 조상들이 온갖 노력을 다했음에도 뚫지 못한 천혜의 요새다. 이 절벽은 마을 사람들의 허파가 쪼그라들도록 수없이 많이 탄식하게 했고, 백호채가 부유해지지 못하게 목구멍을 짓눌렀다. 차오방 절벽의 아찔함과 무시무시함은 삼국지에 등장하는 촉 지방의 잔도(棧道)를 연상하면 된다. 그냥 아주 험난한 산꼭대기에 마을이 얹혀 있다고 보면 된다.
전설에 의하면 오래전에 백호(白虎)가 사람들을 이끌고 들어왔다고 해서 ‘백호채(白虎寨)’란 이름이 붙은 이곳은 아주 오랫동안 문명과 단절된 곳이니만큼 자연경관만큼은 수려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경이로울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 아래엔 경이로울 정도의 빈곤과 낙후가 사람들의 삶을 고달픔과 절망으로 짓누르고 있었다. 백호채의 산수는 아름답고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뀌는 풍경은 곳곳이 장관이지만, 그곳에서 삶은 도시인의 산간 지역 농촌에 대한 시적이고 낭만적인 동경을 물거품으로 만들고도 남는다.
중국이 농촌을 끈기 있게 지원하는 이유
하지만 결국엔 백호채에도 도로가 들어오고야 말았고, 동시에 백호채는 전기, 인터넷, 휴대폰, 그리고 농기계라는 경이로운 문명의 혜택에 시끌벅적하게 압도당한다. 그동안 말순이와 말순이의 아빠 탄젠궈를 비롯해 모든 백호채 사람이 이 도로를 개통하고자 교통국에 가서 때도 써보았고, 향장이나 현장을 만나 애원하거나 으르는 등 거의 전쟁을 치르듯 전력을 다했음에도 끝내 이루지 못한 도로 개통이 허탈하게도 은퇴한 원로 고위 당원 한마디에 성사되었으니 역시 중국에선 ‘꽌시(關係)’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것은 범죄 수사 드라마 「벌죄(罚罪)」에서도 은연중에 드러난다. 거미줄처럼 얽힌 복잡한 인물관계를 잘 연출한 이 드라마는 꽌시 문화가, 그리고 성장 지상주의가 중국의 법치주의에 대한 의지와 꿈을 어떻게 한 줌의 물거품으로 만드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아무튼, 갖은 우여곡절 끝에, 그리고 ‘꽌시’의 힘을 빌려 백호채가 문명과 연결될 수 있었던 것은 농촌을 빈곤에서 탈출시킬 뿐만 아니라 부유하게 만들겠다는 중국 정부의 단호하고 지속적인 의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중국은 장려금, 구호금, 구제금, 보조금, 지원금 등의 각종 명목으로 농촌을 지원한다. 비록 100만 원을 지원하면 절반은 도중에 사라지고 나머지 절반 정도만 농촌에 투입될지라도, 큰돈을 꾸준하게 농촌에 지원하다 보면 결국엔 백호채처럼 결실을 보기 마련이다. 이런 인내심 있게 밀어붙이는 정책은 공산당 독재하에서만 가능하다는 점에서 중국의 무시할 수 없는 장점이기도 하다.
예로부터 중국은 농본사상과 중농 정책을 치국의 근본 방침으로 삼아왔다. 이랬던 것이 신중국 이후 산업화와 공업화를 위해 농촌이 큰 희생을 치렀는데 이것에 대한 보상이라도 하듯 현재의 중국은 농촌을 극진하도록 지원하며 도시와 농촌의 균형 있는 발전을 강조한다. 이런 배경 뒤엔 중국은 인구가 비대하도록 많은 나라이니만큼 식량을 외세에 의존하다간 기후변화나 기상이변 등으로 장기간에 걸친 세계적 식량 파동이 일어나면 감당할 길이 없다는 ‘식량 안보’도 있을 것이다. 이와 비교하면 한국 정부와 한국 도시인들이 농촌을 바라보는 시각은 어떠할까?
작금의 농촌은 도시인의 고향처럼 느껴지는 그런 낭만적이고 공상적인 푸근함을 위해서 존재하는 일종의 문화유산 같은 것은 아니다. 중국이 많은 자본을 투입하며 농촌을 지원하는 이유 중 일부는 분명히 우리에게도 해당하는 사항일 것이다. 반도체는 돈은 되지만, 반도체를 먹고 살 수는 없는 법, 식량이 말 그대로 무기가 되는 날이 오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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