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증발 | 레나 모제 | 예의 바른 국민이 사는 차분한 나라!
우울한 어느 날
기름에 미끄러지듯 잘 굴러가는 세상을 허탈하게 바라보며 세상을 이롭게 하는 데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다는 자괴감과 자신을 위해서도 아무것도 해놓은 것이 없다는 열등감에 불을 막 지피려고 하는 나를 모든 사람은 죽는다고, 그래서 부귀영화는 한낱 꿈에 불과하다는, 이제는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 약발이 의심스러운 고리타분한 경구로 설득해본다.
이런 몇 마디 값싼 위안 따위로 우울한 마음이 가신다면 프로작이 히트하기는커녕 세상에 나올 일도 없다. 우울의 심연으로 밀어 넣는 무위무능, 무기력, 만성질환, 통증, 회한, 죽음 등의 악마 같은 망상이 물귀신처럼 물고 늘어진다. 아무리 자신을 다독이고 다잡아봐도 ‘낙오자’, ‘실패자’라는 딱지가 뇌리에서 떨어지기는커녕 티눈처럼 박혀 기를 쓰고 버틴다. 교도소에 갔다 온 사람에게 붙곤 하는 ‘범죄자’라는 꼬리표처럼 떨쳐내기가 쉽지 않다. 상황이 변하지 않는 이상, 이를 더 악물지 않는 이상, 이렇게 악몽처럼 잊을만하면 찾아오는 자괴감, 열등감, 그리고 인생을 헛살았다는 무력감은 아물기 시작하는 상처를 헤집어놓는 헤살꾼이 되어 내가 한 줌의 재가 될 때까지 집요하게 괴롭힐 .것이다
이럴 때 삶의 의욕을 잃은 난 ‘어디론가로 훌쩍 떠나고 싶다’, ‘어떻게든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 ‘그저 죽고 싶다’ 등의 절망적인 생각이 드는 것은 약과다. ‘억울하다. 이렇게 죽을 바엔 날 신경 쇠약으로 몰고 가는 층간소음 유발자들이자 모조리 죽여버리자’, ‘차라리 전쟁이라도 일어나라’ 등의 극단적인 상상은 절망의 늪에 빠져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날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파우스트로 몰고 간다.
이것이 우울증이라고? 진짜 우울증 삽화가 찾아오면 죽는 것조차 귀찮다고 생각될 정도로 극도의 무력감과 의욕 상실에 빠진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예전에 간혹 그럴 때가 있었기 때문에 잘 안다. 이 가벼운 우울증은 독서보단 글을 쓰고 나서부터 자취를 감췄다.
<어느 날 가즈후미는 훌쩍 집을 떠나 그대로 돌아가지 않았다(출처: 본문)> |
수치를 당하느니 죽는 게 낫다!
이런 나도 어떻게든 살아가는데, (내가 보기엔) 나보다 훨씬 능력 있어 보이는 사람들이, 결혼까지 하고 자식도 둔 멀쩡한 사람들이 일본에선 말 그대로 ‘증발’한다고 한다. 왜일까?
드라마, 영화, 소설 등 일본 문화를 접할 때마다 놀랍고 부러운 점이 있다면 열차, 버스 등의 공공장소에서 시끄럽게 전화 통화하는 모습을 보기 어렵다는 것, 불법 주차된 자동차를 찾아보기 어려운 깔끔한 주택가 등이다. 겉모습만 보면 일본은 규칙이나 의무를 잘 지키는 예의 바른 국민이 사는 차분한 나라처럼 잘 꾸며져 있다. 하지만, 여기엔 함정이 있다. 의무나 규칙을 준수하는 것은 질서를 유지하는 근본이지만, 이것이 자발적이 아니라 강요와 복종에 의한 것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베네딕트(Ruth Benedict)의 명저 『국화와 칼(The Chrysanthemum and the Sword)』에서 이미 오래전에 지목했듯 일본 사회와 문화 근저를 지배하는 것은 의무, 즉 사회와 국가와 가족에 대한 의무다.
국가에 충성해야 하는 의무, 사회에 이바지해야 하는 의무, 가족을 돌봐야 하는 의무 등 이렇게 글로 늘어놓으면 어느 나라에서나 통용되는 보편적인 의무라고 말해도 이상한 것은 없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강도다. 일본인에게 이 의무는 ‘지키면 좋은 것이고 못 지켜도 어쩔 수 없는’ 얼렁뚱땅 넘어갈 수 있는 그런 수준이 아니다. 이 보이지도 않고 문서로서 명시되지 않은 ‘의무’는 일본인의 정신을 지배하는 강박관념 그 자체다. 문서로 명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압박의 강도는 한계가 없다. 서양인이 죄책감으로 윤리의 기본적인 틀을 짜듯, 일본인은 수치가 도덕의 기본이 되는데, 의무에 소홀한 사람은 수치심에 시달리게 된다. 끊임없이 타인을 의식하며 자신을 자제하고 동시에 자기방어적인 것도 수치심 때문이다.
타인에게 폐를 끼치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로 경멸받아 마땅하다. 같은 이유로 타인에게 은혜를 입는 것도 수치스럽다. 그런 일본인에게 실패는 너무나 많은 타인에게, 그리고 사회에 폐를 끼치는 최악의 상황이다. 일본인에게 이보다 더 수치스러운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러다 보니 일본 사회는 실패에 관대하지 않을 수밖에 없고, 결국 그들은 예의를 지키고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자 증발이나 자살을 선택한다. 그럴듯한 명분이지만, 그 이면에는 죽을지언정 수치는 당하지 않겠다는 독한 마음이 자리 잡고 있다. 할복자살했던 사람들의 심정이 그랬을 것이다.
만약 가족을 버린 죄와 가족을 버리게 만든 사회의 죄를 양팔 저울에 달아볼 수 있다면 저울대는 어디로 기울까? 그 저울대가 신의 섭리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가치관에 따라 작동하는 것이라면 각 사회에 따라 기묘하게 다를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떨까? 일본인은 지나치게 수치심에 민감해서 문제라면, 반면에 한국인은 너무 뻔뻔스러워서 문제가 아닐까?
자식에게 15년 만에 연락한 엄마
일본에 대한 편견이나 악감정을 가진 사람이 레나 모제(LENA MAUGER)의 『인간 증발(Les Evaporés du Japon)』을 읽는다면 일본의 새로운 치부를 발견한 자신을 대견스레 하며 어깨를 들썩들썩 한바탕 춤을 출 것이다. 누군가는 ‘고놈들 쌤통이다’라고 말하며 우쭐거린다. 이들의 입과 혓바닥은 이 기가 막힌 이야기를 친구들과의 술자리 안줏감으로 곱씹을 날을 학수고대하며 미세한 경련을 일으킨다. 하지만, 오랫동안 자살률 1위를 굳건히 지켜온 ‘자살 공화국’의 한국인으로서 남의 흉을 볼 여유가 있단 말인가?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격이다.
아무튼, 일본 사회에서 ‘실패’라는 오명이 주는 수치심이 어느 정도인가 하면 엄마가 멀쩡한 자식을 버리고 증발할 정도다. 이 엄마는 어느 날 문득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자기 삶이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지금까지의 삶은 강요된 결혼, 강요된 가정, 강요된 엄마 • 아내 • 주부 역할 등 국가와 사회가 자신에게 강요한 삶이다. 이 가짜 인생을 자각하는 순간은 아이러니하게도 인생의 실패를 인정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실패는 개인이 사회와 가족에게 해야 할 의무와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는 의미다. 일본인에게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는 압박감은 다른 문화에 사는 우리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엄청난 것으로 보인다. 사정이 그렇더라도 끝까지 드러내지 않고 참고 견디면, 아니면 최소한 아닌 척 연기라도 하면 대놓고 손가락질할 사람은 없을 것도 같다. 친절 뒤에 숨은 무관심, 깍듯한 인사 뒤에 숨은 냉랭함이 서로의 수치심을 적절한 선에서 지켜주니까 말이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해마다 10만 명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이 증발할 것이다.
하지만 양심이 가만히 두질 않는다. 이 양심이 현실과의 타협에 실패하면 최종 선택지로 남는 길은 두 가지뿐이다. 죽던가, 증발하던가. 그녀는 그렇게 증발했다. 그렇게 한 엄마는 자식을 버리고 증발해버렸다. 그리고 15년 동안 자식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엄마가 되어서 이토록 모질 수가 있느냐고? 레나 모제가 인터뷰한 증발자들, 그리고 그들의 가족 중 증발자에 관해 이야기할 때 눈물 한 방울 흘리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한다. 일본 사회가 증발 문제에 대해 얼마나 터부시하고 있는지를, 그리고 의무를 다하지 못한 자를 얼마나 차갑게 바라보는지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어두컴컴한 새벽, 야반도주하려는 사람들이 소형 트럭을 타고 비밀의 장소로 몰래 이동한다(출처: 본문)> |
나도 완전한 자유를 얻고 싶다...
제아무리 천재 작가라도 머리와 마음속에 떠오르는 생각 전부를 글로 표현하지는 못한다고 한다.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옙스키는 머릿속 가득 찬 생각 중 단 10%라도 글로 써냈을 수 있으면 좋겠다면서 괴로워했다고 하는데, 나 같은 보통 사람이야 더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책을 읽고 난 후 그 감상을 글로 옮겨적을 때면 마치 시험장에 들어서는 수험생처럼 가슴이 답답하고 조마조마하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잡다한 생각들을 주섬주섬 챙겨 온전한 글로 써 내려갈 수 있는 글쓰기 능력의 부족을 아쉬워한다던가, 어쩔 땐 PC가 랜섬웨어에 걸려 모든 자료를 잃어버렸을 때처럼 아무 생각도 떠오르질 않는다. 하물며 『인간 증발』처럼 남의 일 같지 않은 이야기를 접하고 나면 ‘과연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내가 전하고 싶은 뜻을 한 치의 와전 없이 온전히 글에 담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먼저 앞선다. 이미 꽤 긴 글을 쓴, 그래서 마무리를 지어야 하는 지금 이 시점에서도 사형장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남편의 마지막 뒷모습을 배웅하는 아내의 암담한 마음처럼 ‘아직 하지 못한 말은 없을까?’ 하는 상심에 가까운 응어리가 남는다. 그만큼 이 책의 어둡고 쓸쓸한 이야기가 (글을 잘 쓰고 못 쓰고 관계없이) 마음에 와닿았다는 것이리라.
자신의 글에 조금이라도 애착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떤 글을 쓰든 조금은 ‘더 잘 쓸 수 있었을 텐데’ 하는 미련이 남기 마련이다. 그런 미련이 오늘은 유독 나의 노쇠한 위장을 압박하는 체증만큼이나 강하게 느껴진다. 과거를 상실하고, 나 자신을 잃고, 불행과 무능과 외로움으로 가득 찬 상처투성이의 인생을 사는 그들이 꼭 나의 미래를 보는 것 같아서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모든 것을 내던지고 현실에서 도주해 아무것도 없는 새 삶을 시작할 수 있었던 그 결단력과 의지가 부럽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회에 적극적으로 반항하는 대신 평생 헤어날 수 없는 지독한 외로움의 길을 선택한 사람들이다. 그렇게 그들은 완전한 자유를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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