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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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보 | 심금을 울리는 불행 교향곡, 그러나 공포는 없다?

응보(Karma, 2020) | 심금을 울리는 불행 교향곡, 그러나 공포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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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기담 3편 | 응보(Karma, 2020) | 심금을 울리는 불행 교향곡, 그러나 공포는 없다?

응보(Karma, 2020) | 심금을 울리는 불행 교향곡, 그러나 공포는 없다

유이가 20년 만에 돌아온 어릴 적 살던 집은 부모님이 행복한 미래를 보내자고 약속했던 그때 그대로였지만, 유이를 반갑게 맞이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명령을 받은 로봇처럼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는 이삿짐 직원들의 관례적인 인사말과 관음증 환자처럼 유이를 엿보는 이웃 사람들의 숙덕거림만이 유이의 부산스러움 짐 정리를 응대하는 유일한 소리였다.

유이는 20년 전에 아빠가 교사로 재직했던 학교로 부임하는 그 날 아빠의 일기장을 발견한다. 20여 년 전 부모님에게 덮친 불행의 내막을 알지 못해 궁금했던 유이는 혹시나 아빠의 일기장에서 뭔가를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란 기대감으로 일기장을 읽어나간다.

늪에 빠진 시체처럼 그녀를 침대 속으로 끌고 들어가려는 악몽, 20년 전 엄마의 손가락 놀림 아래 아름다운 선율을 들려주었던 때와 달리 소리가 나지 않는 피아노,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한 간절한 눈빛으로 유이를 바라보는 불청객 등 20년 전 이 집에서 부모님이 겪었을 것 같은 이상한 일이 유이에게서도 일어난다.

그리고 유이는 그 모든 것을 알게 된다. 부모님에게 일어난 불행이 세상에 알려진 것과 매우 다르다는 사실을.

응보(Karma, 2020) | 심금을 울리는 불행 교향곡, 그러나 공포는 없다

TV 조선의 「학교기담」 시리즈 중 마지막 편인 「응보(Karma)」는 영화 「무간도 2」에서 한침이 늘 입버릇처럼 말하던 뿌린 대로 거둔다는 ‘인과응보’의 법칙이 포청천의 판결처럼 준엄하고, 냉혈한처럼 피도 눈물도 없다는 것을 교차하는 20년의 세월을 통해 보여준다.

「응보」에는 「8년」, 「오지 않는 아이」처럼 빙의는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이 견딜 수 없는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지면 빙의된 거나 다름없이 파괴적이고 돌발적인 행동을 일삼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미친 자와 빙의된 자, 한 사람은 견딜 수 없는 현실에서 도피하고자 스스로 타락을 선택했다면, 다른 한 사람은 견딜 수 없는 현실에서 도피하고자 귀신의 속삭임에 운명을 맡긴 것은 아닐까? 원인이야 어찌 되었든 둘 다 자신의 힘으론 헤어나올 수 없는 불행의 늪에 빠졌다는 점에서 동병상련이다.

재밌는 것은 미친 사람이든 빙의된 사람이든 겉으로만 드러나는 증상은 대동소이하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현대 의학은 이 둘의 경우를 싸잡아 조현병 환자로 진단한다.

응보(Karma, 2020) | 심금을 울리는 불행 교향곡, 그러나 공포는 없다

유이의 부모님은 불행 교향곡의 마지막 악장을 자신의 의지가 아닌 광기 같은 타자의 힘을 빌려 완성하고 말았다는 점에서 빙의된 자의 비극적인 말로와 같다. 하지만, 아름답게 흘러갈 수도 있었을 유이 부모의 인생을 불행 교향곡의 악장으로 교묘하게 끌어들인 것은 원혼이 아닌 사회악이라는 점에서 조금은 다르다.

영화는 비정규직 근로자의 비애가 단지 한 사람이 겪는 고통에서 멈추지 않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정규직 자리를 두고 벌어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사투에 참여한 것만으로도 비정규직 근로자의 설움은 시작되고, 이 사투에 정당한 방법으로 경쟁에 임했든 비열한 방법으로 경쟁에 임했든 상관없이 참가자 모두가 농락당함으로써 그들의 가족에까지 불행의 불씨가 튀는 비극으로 끝난다.

응보(Karma, 2020) | 심금을 울리는 불행 교향곡, 그러나 공포는 없다

‘인과응보(因果應報)’, 뿌린 대로 거둔다는 불교의 이치대로 세상이 원만하게 돌아갔더라면 정당한 복수라는 것이 존재할 필요가 없으며 현대의 법체계가 세워질 이유도 없다. 가는 것이 있으면 오는 것이 있고 오는 것이 있으면 가는 것이 있는 법이다. 하지만, 이 모든 오고 가는 것의 합이 그 행위에 참여한 이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할 정도로 균형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갈등의 불씨는 사방팔방에 널렸다. 불공평하고 불공정해 보이지만, 어찌 되었든 현실은 이상적인 사회에는 거리가 멀며, 사람의 본성을 모두 뜯어고치지 않는 이상 그런 사회를 건설할 수도 없다. 만약, 뿌린 대로 거뒀다면 당신이나 나나 천수를 누릴 수 있을까? 인류는 진즉에 멸종했을 것이다.

영화 초반부에 화자 되는 돈을 심하게 뜯긴 비정규직 교사의 자살은 ─ 「학교기담」 시리즈의 지난 두 편처럼 ─ 원혼에 의한 복수를 예고하는 듯했다. 그러나 이것은 관객의 관심을 다른 데로 환기하기 위한 작은 미끼이자 모종의 사회적 고발인 수준에서 끝난다. 영화 「응보」에서 일어나는 ‘인과응보’는 모두 한 세대 안에서 일어나고 마무리되며, 이 굴레에 말려든 주체자도, 그것을 굴리는 힘도 신도 아니고 법도 아닌 평범한 사람들이다. 여기엔 원혼이 개입할 여지가 없으며 필요도 없다. 살아 있는 사람이 원한을 품으면 귀신 못지않게 사납기 때문이다.

마지막에 뜬금없이 등장하는 원혼, 부모가 일으킨 일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고 자살한 너무 양심적인 아이 등이 좀 눈에 거슬리기는 하지만, 앞의 두 편에서는 맛보기 어려웠던 애절한 감동이 있는 영화다. 이런 면을 강조하는 것이 한국 공포영화의 특색이라면 특색이랄까? 반면에 너무 사연에 치중한 나머지 ‘공포’가 없다. 공포영화에 공포는 없고, ─ 영화에서만큼은 보고 싶지 않은 ─ 사회 고발과 텁텁한 원한의 앙금만 남아 있어 공포영화로서의 멋은 별로지만, 이야기 자체는 몰입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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