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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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 무심 속에 묻힌 소년병들

Korean War book 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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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 왕수쩡 | 장엄한 역사와 무심한 통계 속에 묻힌 소년병들

전쟁은 어느 한 쪽의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으며, 심지어 쌍방의 계획대로 진행되지도 않는다. 전쟁은 자체의 규율이 있고, 우연과 필연이 한데 섞여 흐름이 결정되기도 하며, 삶의 희열과 죽음의 함정을 안배하기도 한다……. (p894)

이름 모를 ‘소년병’

논픽션 왕수쩡(王樹增)의 『한국전쟁(朝鮮戰爭): 한국전쟁에 대해 중국이 말하지 않았던 것들』 막바지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전방에서 중국군의 소년병이 최전방 진지로 명령을 전달하러 가고 있었다. 명령이 적힌 쪽지는 잘 접혀서 그의 상의에 넣어져 있었고, 소년병은 영리하게 포탄 구덩이 속을 재빠르게 옮겨가며 그날따라 더 맹렬해진 포화 속을 힘겹게 전진하고 있었다. 소년병은 죽고 싶지 않았고, 최대한 빨리 임무를 완수한 다음 부모님, 가족, 연인이 오매불망 기다리는 따뜻하고 포근한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을 것이다. 적군, 아군을 떠나서 소년병이 명령서를 전달하던 그 날 전쟁에 끌려든 모든 군인은 십중팔구 소년병과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백전노장도 엄두 내기 어려운 맹렬한 포화로 뒤덮인 전장의 한복판을 위태하게 뛰어가면서도 수시로 명령서가 있는 가슴께를 더듬던 소년병이 진지에 거의 접근했을 때 소년병은 포격에 쓰러지면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정신이 든 소년병은 한쪽 다리의 발목이 절단된 것을 알았고, 개의치 않으려고 애썼지만, 안색이 창백해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잠시 누워 있던 소년병은 고무신이 신겨진 채 절단된 발목을 한쪽 손에 들고, 다른 한쪽 손으로는 안간힘을 쓰면서 진지까지 기어갔다. 소년병은 하늘가를 붉디붉게 물들인 석양을 바라보게 되었을 때, 명령서를 가슴에서 꺼내 지휘관에게 건넬 수 있었다. 그리고 정신을 잃었다.

그날 소년병이 최전방 진지로 전달한 명령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명령 오늘 밤 10시에 정식으로 휴전한다. 그때 총이나 대포를 한 발도 발사해서는 안 된다.”

쪽지를 받아 든 지휘관이 시계를 보니 오후 8시 정각이었다. 소년병이 명령서를 전달한 날은 밀고 당기는 지난한 협정 끝에 마침내 한국전쟁의 정전협정을 조인하는 날이었다.

장엄하다는 역사 속에 한낱 무명으로 묻힌 ‘소년병’

그 이후 소년병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그리고 그 소년병이 누구였는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한국전쟁의 중국 측 자료를 수년 동안이나 파헤치며 숨겨진 영웅들을 적지 않게 발굴해 낸 왕수쩡조차 소년병의 이름을 모르는 것을 보면, 우리 역시 영영 알 길이 없다.

역사가는 소년병 같은 일화는 대규모 전쟁의 틈바구니에서 종종 벌어지는 사소한 사건이라고 냉정하게 판단하고는 기록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그 소년병의 희생이 있었든 없었든 어찌 되었든 정전협정은 성립되었을 테니까 말이다. 또한, 한국전쟁에서 죽은 사람이 부지기수인 데다가 그중 영웅이라고 불릴만한 용기를 보여준 병사들도 한 두 명이 아닐 텐데 그깟 소년병의 이름이 대수로울 리도 없다. 하지만, 전쟁은 사람이 한다. 폭우처럼 쏟아붓는 포화를 끝내 견뎌내야 하는 일도, 그리고 포화 속에서 끝끝내 희생되어야 하는 것도 소년병처럼 이름 없는 병사들이다. 전쟁은 이름 없는 병사들의 복종, 투지, 희생, 의지, 용기의 복합적인 작용으로 잔혹한 현실로 구체화된다. 농민군을 이끌어 신중국을 수립한 마오쩌둥(毛澤朿)은 '세상만사를 결정짓는 요소들 가운데 첫째는 바로 사람’이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한국전쟁에서 보여준 중국인민지원군의 전쟁 철학에서도 중요하게 드러나는 중심 사상이지만(일부는 이를 ‘인해전술(人海戰術)’이라고 깎아내리기도 하지만), 왕수쩡이 쓴 『한국전쟁』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한국인의 처지에선 중국인민지원군이라는 적군의 실상과 활약을 다뤘다는 점에서 조금은 불편할 수도 있는 (솔직히 이런 책도 불편할 정도로 머리가 차갑지 못한 사람이라면 아예 책을 읽지 말지어다!) 왕수쩡의 『한국전쟁』이 끝내 한국 독자에게 복받치는 감동을 밀려오게 하는 이유도 바로 그러한 점에 있다. 즉, 전장의 한복판에는 ‘무명의 병사’가 있듯, 그가 쓴 논픽션의 한복판에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장엄하다는 역사 속에서 한낱 무명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다. ‘소년병’의 이야기는 내 이야기가 되었을 수도 있고, 당신의 이야기가 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정전 이후 수많은 책이 한국전쟁을 다뤘지만, 그 누구도 ‘소년병’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왜일까? 전쟁에서 한 사람의 목숨 따위는 파리 목숨만큼이나 가치가 없어서? 그저 몇 개의 숫자로 표현되는 통계 수치의 일부라서? 총알이 빗발치고 포화가 모든 것을 불태우고 파괴하는 전장도 참혹하지만, 그 뜨거운 전장 속에 벚꽃처럼 만개한 청춘을 기꺼이 받쳤음에도 역사와 후손들에게 외면당한 그들의 운명도 참혹하다. 지진이 난 것처럼 땅은 끊임없이 진동하고, 지옥에 떨어진 것처럼 하늘에서는 불을 내뿜는 전장에서 우리처럼 가족이 있고, 각자 나름의 이력과 삶을 가진 무수히 많은 청춘이 자욱한 포연 속으로 연기처럼 사라져갔지만, 역사는, 그리고 우리는 편리하게도 ‘수만 명’으로 통칭해버린다. 아, 이 얼마나 무정하고 매정한 숫자 놀음인가!

‘소년병’을 기억하려는 노력이 맺은 결실

작가 왕수쩡이 날고 기는 재주가 있더라도 한국전쟁에서 희생된 모든 이들을 알 길은 없다. 하지만, 그가 이름 모를 그 ‘소년병’을 기억하려고 노력하듯, 그의 책에는 역사가의 무참한 붓과 인류의 무심함 속에 묻혀버린 또 다른 소년병들을, 그리고 그 소년병들이 무리를 이룬 크고 작은 부대들을 기억하려는 흔적이 역력하다. 이 책은 그의 노력이 마침내 결실을 본 역작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보통 역사가들이 사건들과 그 사건들이 서로 복잡하게 엮여가는 그 인과관계를 중심으로 역사를 기술하는 것에 비해 왕수쩡은 사건을 실제로 일으키는 사람들의 행위와 그 사람들의 운명에 천착하고 있다. 그래서 그가 기술하는 한국전쟁은 다른 역사서보다 더 생생하고 드라마틱하지만, 그만큼 더 잔혹하게 느껴질뿐더러 심금을 울리는 자극도 강렬하다. 특히 전쟁사를 좋아하는 독자들이 눈여겨볼 만한 요인도 있는데 중국군 최고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가 병법을 구사하는 내밀한 과정과 마오쩌둥이 전체적인 중국군 전술에 끼친 영향, 중국군 장교들이 전투에 임하는 자세와 그들이 상부의 명령을 받아들이는 체계 등 다른 한국전쟁 관련 책에서는 보기 어려운 중국군의 활약상이 상세하기 기술되어 있다. 중국인민지원군 부대들의 구체적인 전술도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Korean War by Wang Shuzeng
<미래에는 전쟁이 완전히 사라질 것이라고 희망할 수 있을까?>

중국인민지원군 병사들의 정신력 예찬

한편으로는 죽음도 불사하는 소름 끼치는 투지와 믿기지 않는 인내력을 몸소 보여준 중국인민지원군 병사들의 뛰어난 정신력을 이 책은 강조하고 있다. 이에 대해 왕수쩡은 공산주의에 대한 신앙(지금의 중국 젊은이들은 어떨지 몰라도 항일전쟁과 국공내전을 끝내고 이제 막 국가를 수립한 1950년대 초라면 당연히 그럴 수 있다!)과 제국주의에 대한 증오, 그리고 현재 치러지는 전쟁이 ‘정의의 전쟁’이라는 굳은 믿음이 군 장병 마음 깊숙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사실 한국전쟁에서 물질적으로나 기술적으로나 유엔군보다 현격히 뒤처진 중국군이 그토록 놀라운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핵심은 바로 왕수쩡이 강조하는 그 ‘정신력’에 있었다는데 누구도 반박하기 어렵다. 중국군의 분신쇄골도 마다하지 않는 희생정신은 '세상만사를 결정짓는 요소들 가운데 첫째는 바로 사람’이라는 마오쩌둥의 말을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한국전쟁에서 보여준 중국인민지원군의 소름 돋는 희생은 광신도들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보여주는 또 다른 예가 아닌가 싶다. 그렇게라도 해서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중요하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한국전쟁에서 중국군이 이룬 그 모든 것이 가능했던 결정적 이유는 중국군이 희생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그것은 중국이 거둔 모든 승리는 젊은 병사들의 피와 생명을 바꾼 결과였다는 말이다. 비록 적군이지만, 그들이 한국 땅에서 흘린 피와 생명, 그리고 그들이 보여준 뛰어난 용기와 비장한 희생을 생각하면 절로 숙연해지지 않을 수가 없다.

마치면서...

이 책에는 군인과 그 군인들이 한데 모여 움직이는 부대의 운명과 비장한 심리가 한 편의 소설처럼 완벽하게 묘사되어 있다. 몰입하여 읽다 보면 중국군이 아군처럼 친근하게 느껴지는 난감한 상황에 자신도 모르게 당황하기도 하고, 눈물 없이는 책장을 넘기기 어려운 부분도 더러 있고, 장황하다 보니 석연치 않은 부분도 더러 있다. 숭고한 희생에서 오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든, 안타까운 희생에서 오는 슬픔의 눈물을 흘리든, 석연치 않은 점을 의심하든 중요한 점은 서로 죽고 죽이는 생명을 담보로 한 필사의 싸움에서도 인류는 거침과 섬세함, 포악함과 따스함, 천함과 고상함, 유약함과 굳셈이라는 인격과 인성을 발휘하면서 어떻게든 인간성을 유지하려고 애쓴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전쟁을 다룬 다른 논픽션들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놀랍지 않은가? 사람의 잔인하고 난폭한 성정을 극대화하고 부추기는 전쟁조차도 사람을 감동시키는 인간성을 말살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이로써 지금보다 더더욱 문명이 발전하고 사람들의 의식도 진보할 미래에는 전쟁이 완전히 사라질 것이라고 희망할 수 있을까? 다만,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최소한 우리가 지난 전쟁들의 실상들을 잊지 않고 있을 때야 그러한 희망의 작은 뿌리를 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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