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The Clock, 1945) 한국어 자막
이야기의 영화적 이탈이란 무엇인가?
<공원에서 좋은 시간을 보내는 앨리스와 조> |
오늘은 심오한 한 권의 책 덕분에 까마득히 오랜만에 고전 한 편을 감상했다. 그 심오한 책이란 지크프리트 크라카우어(Siegfried Kracauer)의 『영화의 이론(Theory of Film)』이다. 제목만 봐도 어떤 내용인지, 그리고 얼마나 난해할지 단박에 알 수 있는 이 책의 「12. 연극적 이야기」 장에선 다음과 같은 논쟁이 등장한다.
영화는 줄거리가 예정된 선로를 따라가야 하나? 아니면 줄거리가 선로에서 벗어나 카메라 현실의 방향으로 이탈하는 것을 허용해야 하나?
이 논쟁이 ‘해결 불가능한 딜레마’를 낳는다는 예시로 언급한 영화가 바로 빈센트 미넬리(Vincente Minnelli) 감독의 「시계(The Clock, 1945)」이다. 크라카우어는,
영화(The Clock을 말함)의 연애 스토리가 엄밀한 의미에서 연극적 이야기 인가의 여부와 상관없이, 이야기의 영화적 이탈이 당시로서는 매우 두드러져 보였고, 따라서 상반된 반응을 불러왔다.
라고 논하면서 그 상반된 반응으로 스티븐 롱스트리트와 루이스 크로넨버그의 비평을 인용한다. 연극적 정신을 지닌 롱스트리트는 “미넬리 감독이 뉴욕의 거리 풍경에 쓸데없이 탐닉하는 것을 보고 분노”했고, 그보다 좀 더 영화적 정신을 견지한 크로넨버그는 “'우연과 디테일'에 대한 미넬리의 천부적 감각과 〈시계〉에서 영화의 이야기 공식을 넘어서는 것을 담아낸” 그의 능력에 찬사를 보냈다고 한다.
(파도처럼 끝없이 덮쳐오는 난해한 내용 중 그나마 알아들을 수 있었던) 이 논쟁을 지켜보면서 다소 뜬금없지만, '이야기의 영화적 이탈'이란 어떤 것인지, '거리 풍경에 쓸데없이 탐닉하는 것'이란 어떤 것인지, '우연과 디테일'이란 어떤 것인지 제대로 느끼고 싶어서 영화 「시계(The Clock)」를 감상했다.
6년 만에 만든 한국어 자막
고전이지만, 영화 이론서에 등장하는 유명 감독 작품인 만큼 당연히 한국어 자막이 있을 줄 알았는데, 아쉽게도 찾지 못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영어 자막은 있다는 것. 그래서 「아부시반금련(我不是潘金莲, 2016)」 이후 6년 만에 한국어 자막을 제작했다. 그래도 6년 전보단 수월했던 것이 「DeepL/Gemini API를 활용한 자막 번역」 등 자막 자동 번역 작업이 가능해졌고, 중국어 자막이 아닌 영어 자막으로 작업했기 때문이다.
자막 번역은 구글 제미니(Google Gemini)와 DeepL을 사용했는데, 애초 영어를 잘 모르니 어떤 번역이 우세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때때로 보이는 자연스러운 번역 결과는 DeepL보다 제미니가 우세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경우다(혼잡스러운 기차역에서 아버지를 배웅하는 한 가족의 대화).
Bye, son. Now, you take good care of your mother.
Say bye, Alan. Say goodbye to your father.잘 있거라, 아들아. 이제 어머니를 잘 돌보렴
안녕, 앨런아. 아버지에게도 작별 인사를 해주렴
(Google Gemini)안녕, 아들아. 이제 엄마를 잘 보살펴야지
안녕, 앨런 아버지한테도 작별 인사해
(DeepL)
제미니 번역 결과가 인상적인 것은 '돌보렴', '해주렴' 등 어른이 아이에게 말할 때나 사용하고 한국어에서만 가능한 친숙한 어미를 적용할 줄 안다는 것이다. 놀랍지 않은가? 그렇다고 자막의 완성도가 높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저 영화 감상에 큰 지장이 없을 정도는 될 거라고 말할 수 있을 따름이다.
「시계(The Clock)」 한국어 자막 다운로드
영어 자막: 다운로드
한국어 자막: 다운로드
(참고로 영화는 PikPak의 [클라우드 다운로드] 기능으로 받을 수 있다는 것)
영화만이 감당할 수 있는 대상, 군중
<역동적인 군중 사이를 헤쳐 나가는 앨리스와 조> |
영화 「시계(The Clock, 1945)」는 1945년, 48시간의 휴가를 받은 군인(로버트 워커, 배역 조 앨런)이 우연히 펜실베이니아 역에서 한 소녀(주디 갈랜드, 배역 앨리스 메이버리)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는 평범한 로맨스에 약간의 코미디가 첨가된 줄거리를 가지고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 오늘 감상 포인트는 줄거리보단 그 외적 요소다. 무성영화까지 적용할 수 있는 영화적 특징, 가령 카메라의 기록성, 우연성, 무한성, 불확정성, 삶의 흐름과 운동성 등에 얼마나 충실한가 등이라고 할 수 있겠다.
'카메라의 기록성, 우연성, 삶의 흐름과 운동성'을 한 방에 해결할 수 있는 장면은 바로 군중이다. 전통적 예술이 포용하거나 표현할 수 없었던 군중이야말로 영화적 특징의 많은 것을 포괄하는, 그리고 영화만이 감당할 수 있는 매력적인 대상이다. 「시계(The Clock)」는 대중교통, 길거리, 기차역, 랜드마크 등 바글바글한 군중을 '쓸데없이 탐닉한다'라는 비평을 받을 정도로 집요하게 잡아낸다. 심지어 영화의 기록성에 충성하듯 도시의 인구통계까지도 덧붙이면서!
우연적이고 불확정적인 카메라 현실
<우발적 사건에 휘말리면서 우유 배달원이 된 앨리스와 조> |
영화는 앨리스와 조가 겪는 에피소드를 통해 삶의 우연성과 삶의 흐름을 포착해 낸다. 두 사람의 만남과 헤어짐과 재회. 두 사람이 데이트 도중 겪게 되는 다양한 사건들, 그리고 결혼 허가증을 받아내기까지의 일련의 사건들 모두 우발적으로 발생한다. 또한, 당시 2차대전에 참전했던 군인들의 삶이 그러했던 것처럼 곧 유럽으로 파병될 존이 고국으로 살아 돌아올지는 신도 알 수 없었다. 이러한 것들이 드러내는 것은 두 사람의 미래는 우리의 삶처럼 불확실하다는 것이다. 연극적으로 운명지어진 삶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변화에 맞서 개척해 나가는 무한적이고 예측불허한 삶의 흐름이라 하겠다.
관객은 두 사람의 로맨스가 열매를 맺기를 예상하거나 그렇게 되기를 기대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 그것도 단시일 내에 무슨 일이 생겨 그런 결과가 만들어질지까지는 예상하기 어렵다. 마치 곡예사가 곡예를 부리듯 스릴감 있게 발생하는 우연적 사건들은 극적인 재미와 더불어 영화적 특징에도 나름 충실한 장면들이라 할 수 있다.
현상과 사건의 우연성
<앨리스를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조> |
소련의 영화감독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Sergei Eisenstein)이 영화의 본질적 특징인 현상과 사건의 우연성을 관객에게 인상적으로 전달하는 좋은 본보기로 그리피스(D. W. Griffith) 감독의 무성영화 「인톨러런스(Intolerance, 1916)」를 언급한 적이 있다.
그는 감상 후 20년이 지났을 때 거리 에피소드들 가운데 기억하는 것은 오직 행인뿐이었다고 말했는데, 「시계(The Clock)」 같은 경우 앨리스를 잃어버린 존이 기차역을 헤매고 있을 때 계단 난간에 매달리듯 앉아 존을 올려다보는 어린 소녀가 기억에 남는다.
우리 삶에서 매일 바람처럼 먼지처럼 스치는 행인을 보는 듯한 별거 아닌 샷이지만, 관객의 감수성에 따라 엑스트라가 스타가 되는 찰나를 담은 샷이기도 하다. 만약 저 꼬마 아가씨가 살아있다면, 못해도 아흔은 넘겼으리라.
마치면서
<새벽 거리를 우유배달 트럭으로 달리는 앨리스와 조> |
자막을 번역하면서 본의 아니게 줄거리를 숙지해서 그럴지도 모르지만, 대사를 모른 채 샷만으로도 감상할 수 있는 영화적 특징에 충실한, 다시 말해 샷이 이야기 우위에 있는 영화이자 우발적 사건들이 직조하는 예측 불가능한 삶을 카메라 현실로 담아낸, 그럼으로써 카메라적 삶을 충실하게 재현한 영화라 할 수 있겠다.
아무튼, 오랜만에 보는 고전이라 그런지, 혹은 손수 자막을 번역하면서 약간의 애착이 생겨서 그런지 CG와 오버 연기 가득한 요즘 영화와는 상당히 다른 멋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영화 이론을 이해하는 데도 상당히 도움이 되는 교과서 같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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