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1/24

세상의 봄 | 미야베 미유키

세상의 봄 | 미야베 미유키 | 삭막한 세상이 꿈꾸는 인정 있는 세상

책 표지
review rating

예기치 않게 ‘에도’에 굶주린 나

지금까지 읽은 미야베 미유키(宮部 みゆき)의 ‘미시마야 변조 괴담’ 시리즈 6권에 대해 한마디 하자면, 약간의 과장과 가벼운 허세와 두루뭉술한 추상을 섞어 ‘신들린 듯 읽었다’라고 표현하고 싶을 정도로 ‘잘 읽었다, 재밌게 읽었다, 맛나게 읽었다‘이다. 그런 연유로 ‘백물어(百物語, 괴담 이야기 100화)’라는 작가의 필생 사업은 더더욱 기대된다. 이제 내게 남은 것은 ‘에도 시대’를 향한 막연한 동경과 달랠 길 없는 향수와 오갈 데 없는 그리움이다. 미시마야의 괴담 이야기가 소설의 육신이었다면, 잔향처럼 남은 ‘에도 시대’는 소설의 영혼이랄까. 작가는 ─ 진짜 에도의 삶은 어떠했든지 간에 ─ 자신의 의도대로 에도 시대를 작은 것도 함께 나누고 도와가며 살았던 따뜻한 인간의 정이 있는 사회로 만들었고, 난 거기에 제대로 걸려든 것이다.

작가의 낭만적인 시도를 단순한 ‘과거 미화’로 치부할 수도 있고, 그렇게 보면 별거 아니지만, 그런데도 마치 늪에라도 빠진 것처럼 ‘에도 시대’에 심하게 말려든 것은 이웃과 사회와 나누지 못한 情, 그래서 굶주릴 대로 굶주린 정(情)을 이렇게라도 느껴보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초등학교 시절만 해도 이웃과 아주 크게 소통하며 지냈다). 무뚝뚝하게 생긴 것과는 달리 난 정에 약한 사람이고, 다정다감한 사람이니까. 어쩌면 작가가 에도 시대에 집착하는 이유도 현대 일본 사회에서 부정하기 어려운 삭막함을 느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에도 시대’를 향한 나의 지순한 연정은 시들 줄 몰랐고,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찾는 심정으로 인터넷 서점에서 ‘에도 시대’라는 키워드로 검색한 결과, 이런저런 책 중에서 『세상의 봄(この世の春)』을 알게 되었다. 미야베 미유키가 집필한 또 다른 ‘에도 시대’ 소설이니 안 읽고 배길 수는 없었고 해서 누가 대출이라도 할세라 세수도 하지 않은 채 빈 책가방을 메고 부랴부랴 도서관으로 출발했다.

AI 생성 | 에도 시대, 세상의 봄

‘미시마야 변조 괴담’ = ‘세상의 봄’

책 내용(줄거리, 스포일러 등등)과는 데면데면한 면이 있는 내 리뷰를 읽는 사람이 만약에 있다면 그 사람은 최소한 인터넷 서점의 ‘책 소개’ 정도는 읽었을 것이라고 제멋대로 추측해 굳이 ‘정신착란을 이유로 연금된 청년 번주와 그를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의 애틋한 충정과 사랑’ 등 소설 줄거리에 대해 언급하지는 않겠다. 내 신념이지만, ‘책 리뷰’를 쓰면서 줄거리를 지나치게 많이 언급한다거나, 혹은 깊이 파고 들어가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다. 그것은 ‘리뷰’가 줄거리에 지나치게 집착하게 되면 자칫 잘못하다간 리뷰를 읽는 사람이 책에 대한 흥미를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내가 책 리뷰를 쓰는 이유 중 하나는 양심 있는 ‘책 장수’ 역할이지 않았던가!

솔직히 말해 ‘미시마야 변조 괴담’ 시리즈를 읽지 않고, 『세상의 봄』을 먼저 읽었더라면 오늘 쓴 것보단 줄거리나 소설 속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에 관해 더 많은 것을 언급했을 수도 있다. 기꺼이 말이다. 왜냐하면, 딱히 할 말이 없다면 그래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난 이미 지금까지 한국어로 번역된 모든 ‘미시마야 변조 괴담’ 시리즈를 읽었고, 그에 따라 『세상의 봄』과 ‘미시마야 변조 괴담’ 시리즈를 모두 읽은 사람만이 발견할 수 있는 두 작품의 비슷한 점 몇 가지를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별거 아니지만,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성불하는 셈 치고 마저 읽어주었으면 좋겠다.

첫째, 『세상의 봄』엔 ‘미시마야 변조 괴담’ 시리즈의 오치카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 가가미 다키가 등장한다(쓸데없는 참고지만, ‘다키’라는 이름은 『금빛 눈의 고양이』에서 도카이 제일이라고 칭송받는 미모의 여인이자 영주의 측실 이름이기도 하다). 대찬 처자, 미인이면서도 도도하지 않고 다정다감한 사람, 타인의 어려운 사정이나 고민을 잘 들어주는 배려심 깊은 사람, 한마디로 두 사람은 서로 역할을 바꿔도 소설의 결말이 크게 바뀌지 않을 것 같을 정도로 (지극히 사랑스럽다는 점도 포함해서) 닮은 구석이 많다. 어느 콘텐츠를 불문하고 여주인공 치곤 아름답지 않고 똑똑하지 않은 여자는 없겠지만, 대찬 여자도 흔할까? 반면에 감수성이나 연애 감정은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오치카보단 다키가 좀 더 여유가 있다.

둘째, ‘미시마야 변조 괴담’ 시리즈에서 느낀 (요즘은 성차별적 발언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여성스러운 필치는 여전히 매력적이다. 『세상의 봄』은 시종일관 ‘미스터리’하게 흘러가는 이야기 자체가 재밌어서 단숨에 읽히기도 하지만, 소매가 넓은 한복을 입고 다소곳이 걸어가는 여인에게서 풍기는 나긋나긋함과 부드러움이 달빛에 내비치는 여인의 속살처럼 은근하게 배어 있는 문장에 현혹되어 단숨에 읽히기도 한다. 진정한 작가라면 자신의 개성이 살아 있는 자기만의 문장력을 갖추려는 노력은 평생의 과업이다.

셋째, 번주의 아름다운 별장인 고코인(五香苑)에서 벌어지는 연금된 청년 번주의 트라우마 극복 과정은 미시마야의 ‘흑백의 방’에서 일어나는, 즉 마음속에 묵혀 있던 괴담 같은 고민을 고백하면서 번뇌를 해소하는 심리 치료와 상통한다. 청년 영주 시게오키가 앓는 정신질환의 병인 중 하나는 마음속 깊은 곳에 암처럼 응어리진 사연, 고통, 슬픔, 분노를 고름 짜내듯 속 시원하게 털어놓을 수 있을 정도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상대를 못 찾았기 때문이다. 슬픔이든 수치든 아픔이든 고민이든 혼자만 안고 있으면 곪고 곪아 병인이 될 수 있다. 더럽고 혐오스러운 것을 토해내고 게워 낸다, 그렇게 마주 본다, 그래야 극복할 수 있다, 그래야 해방된다, 그것이 정화다. 미시마야의 ‘흑백의 방’에선 오치카가 그 역할을 혼자 도맡아 했다면, 고코인에선 다키를 비롯한 여러 충신이 협력한다.

결국 비극적인 사연으로 연금된 청년 번주는 조금씩 조금씩 회복된다. 이것은 이즈치 촌의 쿠리야 일족이 행했다는 영혼을 조종해 그것과 의사소통하는 신기한 기술인 미타마쿠리가 쿠리야 일족의 피를 물려받은 다키의 헌신과 충정과 애정으로 실사구시 된 것이 아닐지 싶다.

AI 생성 | Spring of this world, Edo period, Wuxiangyuan, Pensioned young feudal lord and beautiful maid

눈물샘과 소박한 꿈을 자극하는

나의 쓸쓸한 옆구리를 저격해 오는 미소년 청년 번주와 미녀 다키의 순정 만화 같은 로맨스가 다소 부담스럽기도 하고, 정신병으로 폐위된 번주에 대한 공경심을 잃지 않은 채 충정과 직분을 넘어서는 헌신으로 보위하는 충신들의 마음은 나 같은 평민으로선 도통 헤아릴 길이 없고, 품위와 우아함을 후광처럼 달고 다니는 (번주의 아내 같은) 귀부인들 역시 나 같은 서민은 우러러보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는 것이고, 이 모든 것이 짬뽕 되어 왠지 모르게 ‘일본 정신’을 지나치게 미화하고 강조하는 것 같아 살짝 꺼림칙하고, 이런 점 때문에 ‘미시마야 변조 괴담’ 시리즈와는 달리 다소 거리감이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재밌게 읽은 것도 사실이다.

나처럼 마음이 새순처럼 여리고 감수성이 암흑 물질처럼 풍부한 사람은 종이책이 아니라 전자책으로 봐도 눈이 쉽게 피로해지지 않는데, 이유인즉슨 가물지 않게 눈물샘을 자극하는 감동 때문에 눈이 뻑뻑하거나 침침해질 틈이 없이 없기 때문이다. 이야기에 빠져들다 보면 ‘일본 정신’이고 ‘과거 미화’이고 나발이고 간에 고코인에서 청년 번주의 수발을 들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울 따름이다. 때때로 선녀가 찾아와 목욕할 듯한 고즈넉한 호수를 품고 있는 아름답고 운치 있는 저택에서 영민하고 인정 넘치는 미소년 군주를 미녀와 의리 있고 도리를 아는 사람들과 뜻을 합쳐 보필하는 충직한 신하의 삶도 나름 괜찮을 것 같다는, 참으로 줏대 없고 소박한 말로 오늘 리뷰를 마치련다. 말이 나온 김에 말이지 엘리베이터에 혼자 남겨진 유모차에 탄 아기를 잠깐 들여다봤다는 이유로 이웃을 고소하는(내가 사는 아파트에서 진짜로 있었던 일!!!), 이치도 땅에 떨어지고 염치는 안드로메다로 도피한 지 오래된 몰인정한 요즘 같은 세상에서 도리를 알고 의리 있는 사람들과 지내는 것도 복이라면 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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