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8/28

비 | 신시아 바넷 | The Bible of the Rain

비 | 신시아 바넷 | The Bible of the Rain

책 리뷰 | 비 | 신시아 바넷 | The Bible of the R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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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와 개구리

여름 장마가 한차례 시원하게 대지를 적시고, 옆집 곰보 아저씨의 얼굴처럼 박박 얽은 흙길에는 개구쟁이들이 첨벙대며 물장난치기 좋을 만큼 물웅덩이가 생길 때, 이 웅덩이 물이 마르기 전에 사람의 발길이 뚝 끊긴 밤 공원으로 산책하러 가면 종종 개구리와 마주치기도 한다. 정확히 말하면, 개구리와 직접 대면한다기보다는 왁자지껄한 개구리 울음소리에 폭격당하듯 실컷 파묻히게 된다.

깡패 얼굴에 난 대수롭지 않은 흉터처럼 여기저기 얽은 나의 운동화가 자박자박 흙길을 밟는 소리가 그렇게 크지는 않겠지만, 한창 자신들이 부르는 노랫소리에 취해 있던 개구리들에겐 그게 아니었나 보다. 개구리 소리가 조금 전보다 더 가깝게 들리는가 싶더니, 개구리들은 자신들의 합창을 깨는 불쾌한 인기척이 감지되자마자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극성맞은 울음소리를 극성맞게 멈춘다. 나의 발소리가 아마추어 취주악단 연주에서 종종 들을 수 있는 ‘삑사리’처럼 개구리 연주자들의 심기를 건드렸던 것일까? 아니면 사람 자체를 싫어하는 것일까?

갑자기 멈춘 울음소리에 살짝 멋쩍어하는 내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개구리들은 모처럼의 단합을 깨운 불청객이 얌전히 지나가기만을 숨죽이고 기다린다. 한차례 비가 흩고 지나가서인지 하늘에는 모처럼 모습을 드러낸 별이 그 청순한 자태를 과시하듯 어둠 한구석을 차지한 채 한 사람과 한 무리의 개구리가 펼치는 재미 없는 드라마를 하품을 참듯 심드렁하게 관람하고 있다. 이보다 더 진기하고 재미나고 짜릿한 광경이 저 도시라는 화려한 무대에서는 일일연속극처럼 매일 같이 벌어짐에도 밤하늘만큼이나 썰렁한 공원에서 펼쳐지는 막간을 굳이 보려는 별들의 의도를 당최 나로서는 알 길이 없겠지만, 온갖 추악함으로 질퍽대는 도시인의 탐욕스러운 삶에 신물이라도 났는지도 모르겠다. 나로서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서두를 일 전혀 없는 나 역시 가던 길을 잠시 멈추고, 휴대폰의 녹음 버튼을 켠 채 개구리들이 언제 또 합창을 다시 시작하나 하고 숨죽이며 기다린다. 아마도 이때만큼은 내가 세상에서 제일 한가한 사람이다. 어둠을 덧칠한 적막함이 양 진영 사이를 지배하는 가운데 한 무리의 개구리와 한 사람이 은근히 대치한다. 나는 한샤오궁의 『산남수복』에 나오는 칭 할아버지의 다섯째처럼 개구리 킬러라는 악명을 얻고 싶다는 생각은 꿈에서도 해본 적이 없는데, 개구리들이 어째서 날 그렇게 경계하는지 알 수가 없다. 사람이라면 일단 경계하고 보는 것이 그들의 천성일까? 나름 동물의 권리를 생각한다고 자부하는 날 그럴듯한 이유도 알려주지 않고 외면하는 개구리들이 야속하다. 나의 심상한 발소리가 개구리 무리에 쥐 죽은 듯한 침묵을 불러온 심상하지 않은 헤살꾼이 되고 말았다. 급한 나머지 나무에 오줌을 갈기다 사람의 발소리를 들은 듯한 겸연쩍음이 적막 속에 숨은 내 얼굴을 흩고 지나간다.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볼썽사납기 그지없는 내 모습을 아무도 보지 않아서 다행이고, 또 누군가 있다고 해도 어슴푸레한 사위가 내 모습을 얼추 가려주어서 다행이다.

그렇다고 뭘 어쩌겠다는 의도도 없이 마냥 장승처럼 서 있을 순 없다. 이대로 마냥 한가한 사람이 될 수는 없다. 난 단지 개구리 울음소리를 좀 더 가까이서 생생하고 실감 나게 듣고 싶었을 뿐이다. 결국, 먼저 항복하는 것은 나다. 사실 죽음까지 남은 시간은 개구리보다 내가 훨씬 많고, 그럼으로써 버티고 서 있을 시간도 내가 더 많음에도 어째서 내가 백기를 들어야 하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새해의 첫 번째로 밝아 오는 해를 맞이하겠다는 각오로라도 버티고 서 있었어야 했을까? 그랬다면 개구리들도 나의 근성과 노고를 인정해주고, 그래서 마치 그 정도의 간절함이라야 자신들의 합창을 들어줄 자격이라도 되는 양 울음소리를 다시 들려주었을까? 시도해보지 않았으니 영영 알 수가 없게 되었다.

개구리 울음소리를 가까이서 듣게 되는 작은 소망을 깨끗하게 단념한 채 가던 길을 다시 걷기 시작한 나의 뒤로 사람과의 작은 힘겨루기에서 승리한 기쁨이 역력하게 감지되는 우렁찬 개구리 울음소리가 뒤통수를 찔러온다. 언제나 사람이 동물을 이기는 법은 아니다.

장마 때면 어김없이 들려오던 개구리 울음소리. 어렸을 때도 그랬고, 비교적 최근에도 그랬다. 다만 비가 오는 날이 적어진 만큼 개구리 울음소리를 듣는 것도 예전보다 드물게 되었다. 사실 난 이 책을 읽을 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개구리가 그렇게 비를 사랑하는 생물인지를. 개구리들은 비가 오라고 울고, 비가 와서 울고, 비가 선물한 물웅덩이 속에서 다음 생애를 기약하며 운다. 삶과 죽음의 연속성에 대한 충실한 믿음이 그것을 관장하는 비에 대한 무한의 신뢰가 물씬 묻어나오는 개구리 울음소리는 우리에게 더는 비를 내버려 두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처럼 들린다.

참고로 아래 동영상은 비 오는 날 산책 중 녹음한 소리이다.

비에 관한 기억을 상기시키는 최면술사 같은 책

비를 주인공으로 한 대서사시인 신시아 바넷(Cynthia Barnett)의 『비(Rain)』를 읽고 난 후 떠오르는 감상을 오늘도 어김없이 장황한 서론으로 자리매김해 봤다.

방학 때면 우리를 괴롭혔던 독후감 숙제 같은 책에 관한 직접적인 이야기보다는 (가능하다면, 그리고 되도록) 책이 떠올리게 한 감상이나 책에서 느껴지는 정서를 내 경험과 지식과 심리로 적당히 버무려진 나만의 리뷰를 쓰고 싶다. 거창하게 부르자면 ‘리뷰 문학’이라 칭해도 될까? 그렇게 해서 한국에서만큼은 멀어질 대로 멀어지고 소원해질 대로 소원해진 독자와 작가, 독자와 책 사이를 중매하고 싶다. 이것이 나의 리뷰에 깃든 간절한 염원 중 하나다.

아무튼, 인류와 비, 문명과 비, 우주와 비, 자연과 비 등 비에 관한 이루 말할 수 없는 다채롭고 흥미로운 이야기는 마치 최면술이라도 부리듯 비에 관해 잃어버린 기억을 기어코 끄집어내 준다. 그렇게 떠오른 기억은 독자의 경험에 따라 천차만별이어서 이 자리에 대충 적는 것조차 벅차지만, 무엇보다 비가 불러일으키는 시큼털털하고 오묘한 감흥이나 정취는 나의 졸렬한 필설로 써 내려가기에는 역부족이다. 나 같은 경우는 크게 개구리 울음소리, 맹꽁이 울음소리, 그리고 어렸을 때 일부러 맞았던 비에 대한 기억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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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신발 바닥 무서운 줄 모르고 보행로에 뛰어든 용감한 개구리>

비 맞기 놀이를 기억하나요?

강수량을 신경 써야 할 정도로 비 구경하기가 힘들어진 한국 도시에선 이젠 개구리 울음소리를 듣는 것도 어려워졌다. (예외 같은 올해를 제외하곤 기후변화로 인해) 비가 오지 계절이 많아졌으니 도시는 더욱 푸석푸석해지고 도시인의 정서도 덩달아 푸석해진다. 비가 오지 않는 쓸쓸한 현실을 걱정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것뿐만이 아니라 장마가 장마답지 않다 보니 장마 때면 야밤에 홀로 산책하든 나를 시끌벅적하게 반겨주든 맹꽁이 울음소리는 멸종위기종답게 때를 잘 맞추지 않으면 듣기 어렵다. 바야흐로 한국에서만큼은 비가 고귀해진 암울하고 메마른 시대가 한 민족의 미래와 희망을 사정없이 짓밟으면서 닥쳐오고 있다(비를 학수고대하는 지역이 여기뿐이겠는가).

비가 적어진 것도 걱정해야 하지만, 더러워진 비도 걱정해야 한다. 한마디로 이제 비를 보면서 순수하다고 말할 수 있는 시대는 일찌감치 지났다.

내가 전농동에서 살았을 때이니 1980년대였을 것이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라도 발견한 사람처럼 땅으로 세차게 쏟아지는 비를 향해 함지박처럼 입을 벌린 나는 맹숭맹숭하면서도 약간은 비릿한 비의 맛을 어렴풋이나마 기억한다. 그때 난 미친 사람처럼 집 앞을 뛰어다니며 비를 맞았고, 그런 내 옆에는 한 무리의 아이들이 세상과 비와 친구와 어우러진 채 드세게 내리는 비를 억세게 맞고 있었다. 비 맞기 놀이를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따지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로 우리는 한마음이었다.

비로 세수하는 알뜰한 아이도 있었고, 그새를 참지 못하고 빗속에 오줌을 갈기는 짓궂은 아이도 있었다. 옷을 적셔 엄마에게 혼날 것을 걱정하는 아이와 남자아이들의 방정맞은 비 맞기 놀이에 합세하는 것이 껄끄러운 여자아이들은 우산을 펴 만든 임시 텐트 속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중 일부는 하늘이 내리는 촉촉한 축복을 만끽하는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를 부러운 시선으로 탐색하기도 했고, 샐쭉한 표정으로 째려보는 아이도 있었다.

아무 걱정 없이 온몸으로 비를 만끽하며 함박웃음을 지었을 수 있었던 그때 그 시절이 뼈에 사무치도록 그립다. 지금은 비를 목구멍으로 넘긴다는 것은 독극물을 마시는 것과 다름없으며, 맨머리로 빗방울에 헤딩하겠다는 것은 무럭무럭 자라라도 모자랄 판인 모낭을 말살시키는 가혹 행위와 다름없다. 한마디로 지금에 와서 비를 온몸으로 맞이하겠다는 것은 객기 중의 객기다. 요즘엔 미친 사람도 비를 맨몸으로 맞지는 않을 것이다.

가뭄이 재앙인가? 가뭄이 드는 곳에 터를 잡은 사람이 재앙인가?

앙상한 두 팔을 벌려 하늘을 품고, 그 하늘이 내려주는 감로수인 비를 온몸으로 환대했던 그때의 우리는 영혼과 자연을 촉촉이 적셔주고 생기도 불어넣어 주는 비의 소중함을 천진무구한 본능으로 일찌감치 깨달았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랬던 비가 인류의 유구한 오만과 기술의 남용으로 말라 죽어가고 있다. 어떤 곳에선 상냥했던 비가 인내심의 한계에 부딪힌 나머지 오만가지 인상을 쓰며 길길이 날뛰는 사나운 폭우로 돌변하여 모든 것을 휩쓸어 가버린 곳도 있다. 한곳에선 인류의 지리멸렬한 인공강우를 비웃듯 땅 위의 모든 것을 마른오징어처럼 말라 비틀어버리는 가뭄이 한창이고, 한곳에선 비를 다스릴 수 있다고 자만한 수력 사회를 조롱하듯 인류가 땅 위에 세운 모든 것을 쓸어가 버리는 홍수가 한창이다. 이 모든 것이 기후변화를 일으킨 인류가 자초한 재앙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한편으론 사람이 만든 시스템으로 기후와 물과 땅이 형성해놓은 시스템을 이길 수 있다고 믿었던 오만의 결과이기도 하다.

인류는 가뭄이 빈번하게 찾아오는 곳에 농사를 짓고, 홍수로 만들어진 범람원에 도시를 세우고, 물을 흡수하는 풀과 삼림을 제거하고, 끔찍한 높이로 제방과 댐을 쌓았다. 그러고도 무슨 낯짝으로 비와 관련한 재해를 자연재해라고 부르는지 모르겠다. 내가 보기엔 적어도 가뭄과 홍수는 자연재해라기보다는 그런 곳에 터전을 잡은 인류가 자초한 인재(人災)다. 여기에 겸허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인류의 미심쩍은 기술을 남용함으로써 초래한 기후변화를 빼놓을 수가 없으니 이 모든 것이 인재 중의 인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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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탁 걱정 물장난칠 때가 있었다...>

비에 대한 예찬

나를 비를 좋아한다. 나를 하염없이 침울하고 울적한 기분에 젖어 들게 하는 비가 좋다. 귀신이나 유령이라도 나올 법한 을씨년스러운 날씨를 만들어내는 비가 좋다. 나를 친근한 우울함으로 악마처럼 유혹하는 비가 좋다. 콧대 높은 노처녀처럼 도도하게 내리는 비도 좋고, 새색시가 첫날밤에 흘리는 눈물처럼 촉촉하게 내리는 비도 좋다. 짝사랑하는 남자의 뒷모습을 훔쳐보는 처녀가 연정에 겨워 흘리는 눈물처럼 찔끔찔끔 내리는 비도 좋고, 사업에 실패한 남자가 설움에 복받쳐 흐르는 눈물처럼 추적추적 내리는 비도 좋다. 이도 아니면 세상을 뒤엎어버릴 기세로 드세게 달려드는 폭우도 좋다. 정서적으로 메말라 있는 날 뭉근히 달궈주는 비는 나의 둘도 없는 친구다.

비는 생명의 원천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영화 「반가운 살인자(2010)」(서미애 원작)처럼 기꺼이 온갖 범죄를 은폐하는 배경으로 열연하기도 하고, 아니면 바람과 함께 일명 ‘자연재해’라 불리는 몹쓸 장난을 저질러 사람의 교만한 기를 꺾어버리기도 하는 등 선과 악의 구애를 받지 않는다. 한마디로 치우침이 없다. 비는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Nowhere To Hide, 1999)」의 빗속에서 펼쳐지는 극적인 액션 장면처럼 인류의 문화생활에 독특한 감각을 불어넣는 감초 역할로도 제격이다. 비는 수많은 예술가가 자연으로부터 받은 영감의 원천이자 우리 시대의 가장 복잡하면서도 절박한 이야기인 일기예보의 단골 주연이기도 하다.

지금도 빗소리를 들려주는 힐링 앱을 이용 중이지만, 소리만으로 비가 자아내는 정취를 끌어내기에는 역부족이다. 비 오는 날만 느낄 수 있는 온몸으로 스며드는 눅눅함, 빗방울이 인류가 대지 위에 세워놓은 각종 인공물과 맞부딪칠 때 연기처럼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복합적인 향기, 비 오는 날의 저기압이 사람의 신체 활동의 끼치는 미묘한 불균형 등은 비가 자아내는 정취는 오직 비만이 재현할 수 있다.

비를 땅뿐만 아니라 사람의 정서도 해갈시킨다

상투적인 문장으로 신시아 바넷의 『비(Rain)』를 칭찬하는 일은 비처럼 상쾌하지 못해 삼가겠다. 그냥 이 책엔 비와 관련한 모든 것이 담겨 있다고만 말하고 싶다. 비의 역사에서 우리가 사는 행성을 모든 물이 증발해버린 금성도 아니고 모든 물이 얼어붙은 화성도 아닌 딱 살기 좋은 지금의 지구처럼 만들어낸 태초의 신비로움을 엿볼 수 있다. 인류의 지문이 타이어의 홈처럼 비가 오는 날 뭔가를 더 잘 붙잡기 위한 적응이라는 진화 이야기는 한 귀로 흘려듣기에는 너무나 흥미롭다. 비가 인류에게 구원과 절망이라는 두 얼굴을 지닌 야누스가 될 수밖에 없었던 기쁨과 불행의 역사도 빠질 수 없다.

무엇보다 여타 과학 도서와는 다르게 문학적인 정취가 있는 문장은 (비를 좋아하는 사람이든 싫어하는 사람이든 상관없이) 모든 독자에게 강한 호소력을 발휘할 수 있는 강력한 최음제다. 바넷의 감미롭고 감성적인 문장이 가랑비처럼 촉촉하게 고여있는 이 책 어딘가에서는 비가 좀 더 오기를 바라는 개구리가 개굴개굴하며 튀어나올 것 같다. 비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나처럼 그냥 가랑비를 마음 놓고 맞으면서 우리의 경험과 떼놓을 수 없는 비의 본질을 탐구하는 것도 좋을 것이고, 비를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우의를 걸친 채 빗방울이 방수 처리된 우의 표면을 건반 삼아 연주하는 피아노 선율을 감상하면서 비와 연관된 안 좋은 기억을 정화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신시아 바넷은 흙냄새는 메마른 땅을 해갈시키는 빗속에서 가장 강렬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사람 냄새는 메마른 정서를 해갈시키는 그 무엇 속에서 가장 강렬할 것이다. 그렇다고 비가 도시인의 건조한 정서를 해갈시켜준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비는 무뚝뚝한 현대식 빌딩에서 일하는 회사원들의 무뚝뚝한 표정을 잠시나마 풀어주는 청량제 정도는 될 것이다. 나 좀 보란 듯이 후드득후드득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에 분주한 일손을 잠시 거두고 창밖으로 고개를 돌려본 적이 한 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한 차례 쏟아지는 비는 우리가 느끼는 것 이상으로 많은 영향을 우리에게 끼치고 간다는 사실을 인정할 것이다. 어쩌면 비는 지구를 먹여 살리는 젖줄일 수도 있겠지만, 그런 생태학적인 사실을 벗어나면 비는 인류와 자연의 교감을 잊을만하면 되살려주는 마법의 다리이기도 하다. 한때는 비를 내리게 하겠다고 어린아이들을 제물로 바쳤을 만큼 소중했던 비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비에 대해서만큼은 성서라고 할 수 있는 이 책이 대답이다.

이제 한국에서도 예전처럼 비를 자주 만나볼 수 없다. 비가 오더라도 선생님에게 꾸중 듣는 학생이 흘리는 눈물처럼 찔끔거릴 뿐이다. 이래선 마른 땅에도, 마른 정서에도 간의 기별도 안 간다. 앞으로 어쩌나 하고 걱정도 해보지만, 내가 걱정해서 비가 내릴 수 있다면 오장육부가 시커멓게 타들어 가도 상관없다. 비를 자주 만나볼 수 없어 슬프지만, 비가 찾아오지 않은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 때문에 더욱 슬프다.

나 같은 도시인에겐 비는 물의 순환이라는 생태학적인 측면보다는 정서적인 측면이 더 강하게 어필되기 때문에 이런 리뷰가 된 것 같다. 머릿속에는 비에 관한 글들이 소나기처럼 퍼부을 기세지만, 나의 무능한 글쓰기 실력이 댐처럼 가로막고 있어 이쯤에서 이만 마쳐야 할 듯싶다. 올여름은 예상 밖으로 비가 많이 와 내심 기뻐할 만도 했지만,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재난으로 이어져 안타까울 뿐이다. 선악 구분이 없는 비의 차가운 본성을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던 여름이었다.

언제나 비를 좋아하고, 그래서 언제나 비를 그리워하는, 한편으론 비로 인한 재난을 근심하는 한 사람이 이 글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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