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 | 마틴 데일리 , 마고 윌슨 | 폭력은 적응도를 높이기 위한 수단?
인류의 유전자가 예상한 세상은?
외계인의 농간이든 타임머신의 고장이든 예상치 못한 웜홀에 빠져서든 등등 방법이야 어찌 되었든 만약 21세기에 사는 사람이 수천수만 년 전의 수렵 • 채집 시대로 돌아간다면 잘 적응할 수 있을까?
대답하기에 앞서 이것은 극단적인 자연주의자가 아니라면, 상상조차 하기 싫은 상황이다. 아무리 오염되지 않은 태초의 자연이 그립다고 할지라도 지금에 와서, 즉 이미 문명의 이기에 흠뻑 적셔진 아늑한 삶에서 무진장 고단해 보이는 원시의 삶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군대에 가는 것보다 더 싫다. 하지만, 상상하기 싫다고 해서, 가고 싶지 않다고 해서 적응할 수 없다는 말은 아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감옥에 가기 싫다고 해서 안 갈 수는 없지만, 강제로 끌려간 감옥 생활에 대부분 적응하는 것처럼, 적응은 또 다른 차원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의지나 기대를 무참히 꺾으면서까지 수렵 • 채집 시대로 되돌아간다면 우리는 생각 외로 잘 적응할 것이다. 그 근거는 인류가 농업을 시작한 뒤에 커다란 진화적 변화를 겪었다는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즉, 우리의 유전자는 여전히 수렵 • 채집 생활에 최적화되어 있다. 놀랍고도 재밌지 않은가?
광공해에 시달리는 우리는 여전히 어둠을 무서워하고,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만큼 먹을 수 있음에도 과식과 폭식을 즐겨한다. 편리한 이동 수단이 쌔고 쌨는데도 사람들은 일부러라도 걷는 시간을 마련하는데, 여기에는 단지 건강을 위한다는 이유뿐만 아니라 걸어서 이동하는 것 자체가 삶이었던 수렵 • 채집 생활의 흔적이 남아 있다. 또한, 오로지 숲에서만 느낄 수 있는 아늑함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태양이 가장 뜨겁게 내리쬐는 오후 3시만 되면 졸음이 몰려오는 것도 아프리카 이브의 후손답다.
오로지 인류를 위해 설계되고 제작된 과학적이고 기계적인 현대인의 삶에서 간혹 우리를 곤혹스럽게 하는 설명할 수 없는 어색함이나 부자연스러운 감정은 어쩌면 수렵 • 채집 생활을 예상하고 자궁에서 뛰쳐나온 유전자가 맞닥트리는 당혹스러움에 대한 일종의 항의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이런 삶으로 영구히 돌아가고 싶은 문명인은 없을 것 같다> |
수렵 • 채집 시대의 위대한 유물, 폭력
또 하나의 수렵 • 채집 시절의 유물로서 우리를 곤란하게 하는 녀석이 있으니 그 녀석은 바로 ‘폭력’이다. 그중에서도 폭력이 분출되는 염려스러운 과정의 가장 끝단에 있는 ‘살인’은 여전히 풀지 못한 숙제이다.
왜 인류는 폭력에 의존하게 되었을까? 왜 폭력과 살인은 남성의 전유물이 되었을까? 왜 사람은 서로 죽이는 것일까? 남에게 쉽게 말할 수 없는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는 망상과도 같은 즉흥적인 욕구는 무엇으로 설명해야 하고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 모든 것에 대해 진화심리학적으로 접근한 책이 바로 마틴 데일리(Martin Daly)와 마고 윌슨(Margo Wilson)의 『살인(Homicide: Foundations of Human Behavior)』이다.
이 책은 살인을 자연선택의 직접적인 결과물로 보려는 것이 아니라 폭력적인 상황을 조장하고 유발하는 심리 기제가 왜 선택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진화했는지에 대한 다윈주의적인 고찰이다. 고로 남성의 폭력적인 행동이나 살인은 그 행동 자체가 진화의 목표가 아니라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써 심리 기제가 발동시킨 적응적인 행동으로 볼 수 있다. 그 목적이란 다름 아닌 적응도(개체가 자기 유전자의 복제본을 널리 퍼뜨리는 일에 얼마나 이바지하는지를 나타내는 양적 개념) 촉진이다. 결국, 현대에 와서도 좀처럼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 남성의 폭력성이 의미하는 바는 폭력 능력이 그것을 보유한 개체의 유전자를 널리 퍼트리는 데 나름의 기여가 있었다는 의미이고, 그렇다면 폭력의 기원은 ─ 현재 인류의 유전자가 최적화된 환경인 ─ 수렵 • 채집 생활 시절에서 찾아야 한다는 말이다. 당연히 진화심리학은 수렵 • 채집 시대의 평화롭고 낭만적인 원시생활은 현대 인류의 이상주의적인 이데올로기가 낳은 허구라고 보고 있으며, 원시 부족의 높은 살인율(그 대부분이 도시에 사는 인류와 마찬가지로 남자 대 남자의 살인)을 기록한 민족지는 진화심리학자들의 가설을 뒷받침한다.
인류는, 특히 남성은 자신의 적응도를 높이고자 오래전부터 폭력에 의존했으며, 그중에서도 남성의 폭력 능력이 가장 절실히 요구되는 상황은 ─ 지구에서 태어난 수컷이라면 피할 도리가 없는 ─ 바로 여성(여기서 말하는 여성은 나이를 불문한 모든 여성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번식 능력이 있는 젊은 여성을 말한다)을 차지하기 위한 남성들 간의 피할 수 없는 경쟁이다.
질투심 없는 남자는 오쟁이 진다
다른 유인원과는 달리 호모 사피엔스 여성은 배란을 은밀하게 한다. 여성이 은밀한 배란을 진화시키는데 어떤 선택압이 작용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렇게 남성을 속임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점이 있다. 바로 ─ 여성의 뱃속에 든 아이의 진짜 아버지이건 아니건 간에 그 여성과 성관계를 맺은 ─ 남성을 오쟁이 지게 함으로써 양육 부담을 덜 수 있다는 것이다. 이때 오쟁이 질 남성을 물색할 때, 그리고 오쟁이 진 남성의 친자 의심을 무력화시키는 무기로써 진화한 것이 바로 여성의 교태, 유혹, 애교, 수줍음, 울음 등이 아닐까 싶다. 당신이 만약 ‘연애’라 불리는 것을 한 번 이상 경험해 본 남자라면 앞서 언급한 여자의 무기가 얼마나 무섭고, 그래서 남자의 마음을 얼마나 살 떨리게 하는지를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으리라.
여성은 어떤 정자였든 자신이 배 아파서 아이를 낳으므로 이 아이가 남성처럼 자기 친자식인지 의심할 필요가 없다. 그것보다 여성은 양육 자원(자원을 많이 보유한 남자가 능력도 우수할 것이다)을 어떻게 마련해야 하는 문제가 적응도에 큰 영향을 미치며 현실적으로도 가장 절실한 문제다(예나 지금이나 아이를 혼자 키우는 여성의 가장 큰 문제는 자원, 즉 돈!). 반면에 남성은 여성의 배란기가 숨겨진 상황에서 어떻게 여성의 배 속에 있는 아이가 자기 친자식인지 확신할 수 있을까? 100% 확신할 수는 없지만, 여성의 배 속에 있는 아이가 자기 친자식일 가능성을 가장 높이는 방법은 있다. 바로 그 여성과 최대한 섹스를 많이 하는 것, 그리고 그 여성을 최대한 가까이 놔두고 감시하는 것이다(아마도 이것이 현대 결혼제도, 즉 일부일처제의 진화심리학적인 기원이지 않을까?). 이 두 배경 때문에 남성의 엄청난 성욕과 남성의 병적인 성적 독점욕이 진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으론 남성의 독점욕 때문에 여성은 정절을 지키는 한 한 남성으로부터 통제와 감시 아래 지속적인 양육 지원을 보장받을 수 있게 되었다.
현대 부부가 겪는 불화 중 대부분이 배우자에 대한 남성의 지나친 소유욕과 성적 질투에서 기인한다는 것, 그리고 아직도 많은 남성이 ─ 체면상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지만 ─ 여성을 소유물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은 현대 인류가 수렵 • 채집 시대 이후 진화심리학적으로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방증한다. 하지만, 남성에게 성적 질투심이 없다면(즉 배우자가 다른 남성과 섹스해도 무관심하다면), 그 남성은 그만큼 오쟁이 질 확률이 매우 높다는 점에서, 그래서 자손을 남길 확률이 희박하다는 점에서 ‘질투’는 선택적 이점이 있다 (여성의 질투는 남편의 자원이 새는 걸 방지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들은 무엇을 두고 경쟁하는 것인가?> |
우린 ‘살인 기계’는 아니지만, ‘살인’을 ‘수단’으로 이용할 수는 있다!
남성과 여성의 신체 크기나 수명의 차이, 성차별적인 적응도 등등의 이유로 중간 정도의 일부다처제로 추정되는 수렵 • 채집 사회에서 남성이 번식의 기회를 잡으려면 응당 다른 남성과의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 여기서 두 경쟁자는 폭력의 단계적인 증폭을 경험하게 된다(이어지는 이야기는 헬레나 크로닌(Helena Cronin)의 『개미와 공작(The Ant and the Peacock)』을 참고했다).
붉은 수사슴은 경쟁자와 마주치면 서로를 향해 몇 분간 으르렁거린다. 이 단계에서 포기하는 수사슴이 없다면, 두 녀석은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서로 평행하게 계속 왔다 갔다 한다. 여기서도 기권자가 나오지 않으면 두 수사슴은 가지를 친 뿔을 서로 얽어, 두 마리 중 한 마리가 뒤로 내던져져 달아날 때까지 사납게 밀어 댄다. 여기서도 막상막하면 싸움은 두 마리 중 하나가 죽을 때까지 계속될 수밖에 없다. 이런 싸움으로 죽는 수컷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싸움이 혈투 극으로까지 발전하지 않고 초기 단계에서 아무런 신체적인 접촉 없이 끝난다. 즉, 진화적으로 안정된 전략(ESS)은 경쟁자와 마주치기만 하면 일단 뿔을 들이밀고 싸우고 보는 막무가내식의 폭력이 아니라 단계적으로 증폭되는 폭력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남성도 마찬가지다. 두 경쟁자가 마주치면 가장 먼저 서로 재보는 것이 ─ 아마도 이것은 모든 수컷에게 해당하는 사항이지 않을까? ─ 덩치나 힘이다. 만약 최홍만 같은 남성과 마찰을 빚었다면 쪽팔리더라도 일단 자리를 뜨는 것이 목숨을 부지하기에도 유리하고 적응도에도 유리하다. 왜냐하면, 참는 자에게 복이 있고, 이 세상에 여자가 한두 명만 있는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이번이 누군가에겐 마지막 기회일 때도 있고(즉 상황이 너무 절망적인 나머지 죽어도 잃을 것이 없다!), 두 남성의 체격이 엇비슷할 때도 있다. 그럼 두 번째 단계로 넘어간다. 바로 동물들이 으르렁대듯 언쟁을 벌이는 것이다. 이때는 아무래도 목소리 큰 녀석이 장땡일 것이다. 여기서도 승부가 안 나면, 이제는 거의 막다른 골목까지 왔다. 바로 주먹을 날리며 난투극을 벌이는 것이다. 대부분의 싸움은 여기서 누군가 땅바닥에 널브러지는 선에서 끝나겠지만, 만약 여기서도 매듭을 짓지 못하면 남은 길은 하나다. 둘 중 한 명은 죽어야 하고, 그것은 곧 누군가가 누군가를 살해한다는 뜻이다.
살인을 무턱대고 자연선택의 결과물로 보기보다는 남성의 적응도를 높이기 위해 선택된 심리 기제가 일으킨 ─ 분노나 질투심으로 불리기도 하는 ─ 감정에서 기인한 폭력성의 부산물 중 하나로 보는 것이 적합할 것 같다(강간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사람은 살인 기계로 태어난 것은 아니지만, 적응도에 이바지할 수 있다면 살인도 수단으로써 충분히 고려할 수 있다는 말이다.
왜 남자는 사소한 언쟁에 목숨을 걸까?
세상의 모든 살인 동기 중에서 상당히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것이 언쟁이다. 이 언쟁으로 일어나는 살인도 진화심리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정답은 ‘그렇다’이다. 언쟁은 서로에 대한 모욕으로 이어지기에 십상이고, 이때 한 남자가 모욕을 그냥 참고 넘어간다는 일은 그 사람의 체면, 평판, 사회적 지위의 추락을 초래함과 동시에 그 자신을 호구라고 만천하에 시인하는 것이나 진배없다. 그렇기에 남자는 자신의 체면을 지키고자 상대방에게 모욕을 되돌려주거나 말발이 서지 않는 사람을 바로 주먹으로 갚는다. 이러한 사단이 되돌리기 어려운 상황으로까지 치달리면 결국 누군가의 죽음으로 이어지는데, 왜 남자의 마음은 무형의 사회적 자원인 체면, 명예, 지위를 위해 목숨까지 위태롭게 할 정도로 많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일까? 그것은 그러한 사회적 자원들이 적응도라는 목적을 달성하는 유용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높은 사회적 지위가 높은 번식 성공률로 보상된다는 말인데, 이것에 대해 ─ 과거에 대해서나 현재에 대해서나 ─ 굳이 부연 설명이 필요할까? 그렇다면 높은 지위가 번식률에 이바지해왔고, 폭력을 행사하는 능력이 지위를 획득하는 데 이바지해왔다면, 남성에게 있어 폭력 능력은 선택에 있어서 유리하게 작용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또한, 경쟁자가 나의 여성에게 성적으로 접근하는 것을, 좀 더 현대적인 말로 표현하자면 치근덕거리고 집적대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남성에게 일정 수준 이상의 폭력 능력은 불가결한 요소다.
타인의 자원을 강탈하는 강도 역시 남성의 전유물이다. 이것 역시 적응도 차원에서 설명할 수 있다. 물질적 자원은 단순히 생계를 이어가는 데도 필요하지만, 남성은 여분의 자원(양육에 투자할 수 있는 물질적 자원)을 과시함으로써 여성의 호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사회적 지위, 평판, 명예 등으로 여성을 낚을 수 없는 초라한 남성들이 번식에 성공할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은 여성을 강간하던가, 아니면 물질적 자원(즉, 돈!)이라도 많이 그러모아 여성을 유인하는 것이다.
이로써 왜 범죄 발생률이 사회적 지위가 낮은 계층에서 높은지도 설명된다. 남성들은 가장 높은 지위를 얻기 위해서도 경쟁하지만, 가장 낮은 지위를 피하기 위해서도 경쟁한다. 하지만, 어느 정도 이상의 지위를 얻은 남성은 경쟁이 과열되면 얻을 것보다 잃을 것이 더 많을 수도 있고, 이미 적응도에서도 어느 정도 목적을 이루었을 확률이 높으므로 죽음도 마다하는 치열한 경쟁은 되도록 피할 것이다(아마도 이들에겐 자식을 만드는 일보다는 이미 생산한 자식의 적응도를 높이는 일이 더 중요할 것이다). 하지만, 사회적 지위의 가장 밑바닥을 배회하는 계층은 완전한 실패(즉, 단 한 명의 자식도 얻지 못한 남자)를 눈앞에 두었을 뿐만 아니라 가진 것이 없는 만큼 잃을 것도 없기에 앞뒤 가릴 필요가 없다. 가장 위험한 전략인 ‘폭력’을 행동으로 옮겨도 손해 볼 것이 없다는 말이다. 이래서 사회적 지위가 가장 낮은 계층에서 범죄율도 높을 뿐만 아니라 그 양상도 잔혹하기 그지없다.
<우린 폭력을 최후의 수단으로 종종 사용한다> |
‘폭력’은 본능이 아니라 단지 ‘수단’일 뿐
이뿐만 아니라 살인을 다윈주의적으로 접근하는 진화심리학은 영아살해, 자식살해, 부모살해, 친족살해, 그리고 현대인의 감정에도 뜨거운 응어리로 남아 있는 복수심까지 매끄럽게 설명해낸다. 물론 설명할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이 반론의 여지가 없는 확고한 진실임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들의 업적은 감정의 진화적 기원과 사람의 행동을 좌지우지하는 심리 기제로써 작동하는 감정에 작용하는 선택압을 밝히는 데 매우 중요한 발견임은 분명하다.
인류의 유난히 높은 지능과 마음이 의도적인 적응의 결과물인지, 아니면 의도되지 않은 적응의 부산물(의도되지 않은 적응의 부산물이라면 처음에는 쓸모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손해는 주지 않았기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가 어느 순간에 선택적 이점을 얻었을 것이다)인지 우리는 아직 알지 못한다. 어찌 되었든 이 두 가지가 아직 남아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어느 날 어느 순간 자연선택으로부터 적합한 역할을 부여받아 다른 유용한 형질들처럼 진화의 길을 걸어왔음을 말해준다. 당연히 그 궁극적인 목적은 적응도에 이바지하는 방향일 것이다.
그렇다고 사람의 모든 행동이 감정의 지배를 받는다거나, 그래서 자유의지를 논하는 것이 의미 없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내가 볼 땐 우리 마음의 궁극적인 의도를 명확하게 알게 될수록 우리의 자유의지도 그만큼 선명해질 것 같다. 하지만, 감정의 진화적 의도나, 심리 기제가 우리를 어떻게, 그리고 어떤 방향으로 이끄는지를 깨달은 이상 이제 더는 부자연스러운 감정의 지배에서 필요 이상으로 고뇌할 필요는 없다. 평소에는 합리적으로,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남성이 어느 순간, 혹은 어느 특정한 상황에서 주체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여 난폭해지는 근원을 설명하고자 할 때, 예전에는 다른 지역이나 국가와 비교해 유난히 폭력 사용 빈도가 높은 사회적 • 문화적 원인과 그러한 폭력이 일상화된 환경에서 성장한 배경적 원인을 주로 고려했다. 하지만 이제는 여기에 적응도에 이점이 있는 사회적 자원을 어떻게든 유지하고자 하는 남성의 진화심리학적인 원인까지 고려할 수 있게 된 셈이다.
혹자는 이러한 진화심리학적인 통찰을 본성으로의 폭력을 고정시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정당한 우려를 표명할 수 있으나, 남성과 여성의 폭력 사용 빈도가 현격히 차이가 난다는 점, 폭력 사용 빈도는 사회적 지위 계층에 따라서도 차이가 난다는 점, 그리고 폭력 사용 빈도는 가난보다는 부의 불평등이나 사회적 계층 사이의 유대감에 더 연관이 깊을 것이라는 예측, 그리고 과거 그 어느 시대보다 현대의 살인율이 낮다는 점에서 폭력성은 유전자에 각인된 것이 아니라 특정한 심리 기제가 촉발하는 감정적인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의 하나로써 선택된 것이 아닌가 싶다. 만약 폭력이 본능이라면 남성의 뚜껑을 확실하게 열어젖히는 상황(예를 들면 사랑하는 아내가 다른 남성과 성교하는 억장이 무너지는 현장을 덮쳤을 때)과 맞닥트렸을 때 모든 남성이 살인을 저지르지는 않는다는 점을 설명할 수가 없다(물론 이 순간 꼭지가 돌아 경쟁 남성을 죽인다고 해도 그를 비난할 사람은 없지만 말이다). 호모 사피엔스의 또 다른 본능인 식탐과 성욕이 현재 우리를 어떻게 지배하는지를 고려하면, 폭력 성향이 본능이었다면 인류는 살아남지 못했으리라는 것도 쉽게 예측할 수 있다. 이것은 인류에게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아마도 모든 종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즉, 폭력이 본능으로 작용하는 종은 자연선택에서 배제될 이유가 충분하다.
폭력은 특정한 상황(특히 적응도적인 관점으로 고려할 수 있는 상황)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는 마찰이나 갈등을 해결하는 여러 수단 중 하나일 뿐이다. 그러므로 분쟁 해결을 위한 사회적 제도와 의식이 잘 갖춰진 사회일수록, 그리고 분쟁에 대한 사회적 합의와 소통이 원만하게 이루어지는 사회일수록 그만큼 폭력 발생 수위는 낮아질 것이다. 아예 잠재울 수는 없을지라도 그 발생 빈도를 우려 수준 이하로 낮출 수 있다는 가능성을 운운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진화심리학자들의 결실일지도 모르겠다. 혹시 모르지 않겠는가? 앞으로 인류가 ─ 경제적으로나 의식적으로나 ─ 부단히 발전하여 폭력 사용 빈도가 높은 사람들의 적응도가 낮아진다면, 즉 폭력 사용에 대한 선택압이 제거된다면 인류에게서 폭력은 고대 사회의 유물로만 남을지도. 물론 최소 수천? 아니 수만 년 후의 이야기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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