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족을 알다 | 애즈비 브라운 | ‘미야베 월드 제2막’을 감도는 사람 냄새
‘미야베 월드 제2막’을 감도는 사람 냄새
미야베 미유키(宮部みゆき)의 ‘미야베 월드 제2막’이라는 시대물 시리즈엔 ‘따뜻한 인간의 정이 있는 사회를 향한 동경’과 ‘작은 것도 함께 나누고 도와가며 살았던 시대가 있었다’라는 것을 전하고 싶다는 작가의 소망이 담겨 있다. 이런 설명이 없더라도 ‘미시마야 변조괴담’ 시리즈 몇 권을 똥개 쳐다보듯 개견하지 않고 슈퍼모델 심사하듯 머리부터 발끝까지 진지하게 훑어본 사람이라면 작가의 마음속에 살아 있는 에도 시대는 사람의 정을 원동력으로 삼은 참으로 정겹고 푸근한 사회인 것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다. (의식적이라기보다는 버릇처럼 몸에 배 있는 듯한) 딱딱해 보이면서도 사람과 삶에 일정한 품위를 더해주는 격식뿐만 아니라 물건 하나하나에 소중한 사람이 남긴 유품 대하듯 의미와 정을 주는 소박함과 이웃의 어려움을 모른 척하지 않는 다정함과 자연을 신처럼 떠받드는 겸손함 등이 ‘미야베 월드 제2막’을 감도는 사람 냄새다. 언뜻 봐도 진정으로 사람을 소중히 여겼던 사람이 살만한 시대라는 인상을 남길 만하다.
내가 사는 도시는 굳이 사람을 찾으러 멀리 나가지 않아도 될 만큼 인구 밀도는 공장형 양계장의 닭들만큼 매우 높지만, 그에 대한 반동인지 심술인지 이웃들 간의 알콩달콩한 소통은 사라졌다. 주변에 사람이 홍수처럼 범람하다 보니 누구부터 말문을 터야 할지 갈피를 못 잡은 나머지 아예 속 편하게 소통의 창구를 닫아버린 것이다. 아니면 들판의 지천으로 널린 게 사람이라 굳이 소통의 필요성을 못 느끼는 것일지도.
요즘 도시인의 이웃 관계는 서먹서먹한 정도가 아니다. 가까이 있건 멀리 있건 모두가 완벽하게 낯선 타인이다. 이대로 몇 세대 지나면 (한국 드라마 역사상 최장수 드라마인) 「전원일기」는 ‘농촌 드라마’가 아닌 ‘판타지 드라마’로 소개될지도 모른다. 술에 얼큰히 취한 사람처럼 얼굴 붉히며 아근바근 다툴 때도 더러 있었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음식을 주고받으며 다시 사이좋게 지냈던 이웃들이 실제로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어렸을 적에나마 경험해 본 나로서는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미야베 미유키의 에도 시대는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유혹이지만, 한편으론 댐 건설로 수몰된 고향을 잊지 못하는 실향민의 심정처럼 그런 시절은 결코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절망으로 사무치게 한다. 출산율 하락에는 높은 개체 밀도 등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이따위 세상에서 내 소중한 아이를 키우느냐 시간과 돈과 정력을 낭비하느니 차라리 혼자 살다 죽겠다는 절규 같은 호소도 있는 것이다.
<작지만 없는 것보단 훨씬 나은 정원(드라마 「료마전(龍馬傳)」의 한 장면)> |
에도 시대는 정말로 사람이 살만했었을까?
그렇다면 ‘미야베 월드 제2막’에서 묘사하는 에도 시대는 작가가 염원하는 이상적인 현실을 고스란히 투영시킨 허구일까? 아니면 실재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치밀하게 준비된 이야기일까? 라는 궁금증이 극성맞은 모기떼처럼 머릿속에서 윙윙거리는 것을 도저히 떨쳐낼 수 없어 찾은 책이 바로 애즈비 브라운(Azby Brown)의 『만족을 알다(Just Enough)』이다. 애즈비 브라운의 『만족을 알다』는 지금은 깨끗하게 사라진 100% 자급자족식 생활양식에 관한 이야기지만, 한편으론 물 한 방울, 불에 타고 남은 재까지 낭비하지 않았던 에도 사람들의 근검하고 겸손한 삶을 통해 지속 가능한 사회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이고, 어떤 삶인지 헤아리는 통찰력을 길러주는 책이기도 하다.
천년만년 살 것처럼 악착같이 재산을 모으고, 타지의 아이들이 굶어 죽건 말건 게걸스럽게 음식을 탐하는 요즘 사람들에게 소귀에 경 읽어주는 격이 되더라도 한 번쯤 귀에 쑤셔 넣어주고 싶은 책이지만, 그런 고상하지 못한 사람들이 이런 고상한 책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이라는 사실은 하늘에 뜬 태양처럼 명확하기에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 금할 수가 없다.
아무튼, 이 책을 읽고 나면 미야베 미유키가 차분하면서도 운치 있게 형상화한 소설 속 에도 시대가 그저 작가의 이상이나 희망 사항을 표현한 얼토당토아니한 이야기가 아닐 뿐만 아니라 상당 부분이 에도 시대를 살았던 농민, 상인, 하급 무사들의 실제 삶과 부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미시야마 가게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오치카의 삶에도 어렴풋이 드러나 있듯 에도 시대의 삶은 크게 부족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낭비를 마구잡이로 허용할 정도로 넉넉하지도 않았다. 에도 시대는 생태계 순환을 모방한 100% 자급 자족적인 삶을 원동력으로 삼았기에 어떤 물건을 수선하고 수선해 폐기 처분될 때까지 사용하려는 사람을 칭찬하기는커녕 오히려 구두쇠라고 비웃는 작금의 탐욕스러운 세대처럼 풍족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그런 삶이 행복하지 않다고는 말할 수 없다. 만약 물질적 풍요만이 행복의 척도가 된다면, 인류의 조상은 졸지 간에 모두 불행한 사람으로 전락하는 꼴이 되는 것이고, 우리 또한 (지금보다 더 풍요로운 사회에서 살아갈 확률이 높은) 후세들에 의해 불행한 사람들로 낙인찍히게 될 것이다.
법과 지위와 권력에 의해 강요받지 않고 대부분의 일을 마을 사람들 의견 일치로 결정하는 자치, 억세거나 탐욕스러운 사람이 성공하기 어려운 경쟁보단 협력과 호혜에 의존하는 사회, 알아서 다산과 결혼을 자제할 정도의 높은 정신력에서 행해지는 절검(節儉)과 겸양의 자기 규제, 생태계의 건전성을 유지하는 것이 곧 사람 삶의 건전성을 유지하는 길임을 역사와 경험으로 체득한 사람들, 바로 그런 분수를 알고 만족을 아는 사람들이 바로 에도 시대 사람들이다. 그들이 각자 필요한 만큼만 얻고 필요 이상으로는 원하지 않는 소박한 삶에서 의미와 만족감을 찾고자 할 때, 이들의 삶이 현대인보다 물질적으로 부족해 보인다고 해서 불행해 보인다고 말할 수 있을까?
녹음이 우거진 계획도시, 에도
에도가 사람 살만하다고 느껴지는 것은 무엇보다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녹음이 우거진 도시이기 때문이다.
에도는 도시계획자들이 주요 도로를 계획할 때, 후지산 같은 가까운 산과 논밭이나 바다 같은 먼 풍경이 보행자에게 어떻게 보일지까지 고려했을 정도로 경치가 좋은 도시다. 앞쪽으로는 에도만이 보이고 뒤쪽으로는 후지산이 보이는 것이 마치 하늘과 대지의 크고 넓은 팔에 감싸인 것 같은 포근함이 느껴진다. 옥죄어 오듯 사방팔방으로 들어찬 높고 칙칙한 건물에 포위된 채 하늘도 볼품없고 땅도 볼품없는, 그럼으로써 사람의 인상도 볼품없어지는 무계획적이고 주먹구구식으로 만들어지는 도시에 사는 나로서는 에도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편이 아늑하고 차분한 뭔가로 벅차오른다.
놀랍게도 에도는 처음부터 그렇게 설계된 도시다. 처음부터 말이다. 이 말은 에도처럼 경치가 수려한 도시는 도시를 계획하는 초기 단계에서부터 녹지에 어떤 의미를 두고 어느 정도의 공간을 할애할 것인지는 도시 사람들의 식탁을 건강하게 책임질 수 있는 지역 논밭과 일상의 혼곤함을 잠시나마 잊게 하는 잡초 무성한 공터와 애초부터 존재해 왔던 숲을 불도저로 밀어버리기 전에 결정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녹지는 집값 잡는다는 명분으로 매년 쏟아지는 한국의 재개발 • 재건축 계획처럼 그때그때 추가되는 임의의 선택지가 아니라 계획의 초기 단계부터 고려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무식하게 칼만 휘두를 줄 알았던 사무라이가 실무 면에서, 그리고 미래를 내다보는 면에서 최소한 한국 대학 졸업자보단 훨씬 우수했던 것이다.
절망적이지 않은가? 한국의 수도권에서 사는 사람은 알겠지만, 아파트나 상가 같은 사람이 애써 지은 건물을 애써 허물고 남은 그 빈터에 오로지 경치와 생태계를 위해 숲이 애써 조성되는 기적 같은 일을 본 적이 있었던가? 도시 정비 사업한답시고 자연 상태로 보존되온 생태 공원에도 공사의 손길이 끊어질 날이 없는, 마치 공원이나 숲을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장식품 정도로만 여기는 천박한 도시에 사는 나로서는 에도가 마치 공상과학소설에 나오는 꿈의 도시처럼 여겨지기까지 한다.
<툇마루에서 샤미센을 켜는 료마(드라마 「료마전(龍馬傳)」의 한 장면)> |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집
이런 에도에 운치와 품위를 더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무사의 집이다.
시대의 문화는 상류층이 주도하고 중 • 하류층이 추종한다고 볼 때 충만한 미의식과 시적인 정취로 거주자와 방문객에게 영감을 주는 무사의 집은 에도 사람들이 자연과 사물의 조화에서 오는 정신적 만족감을 얼마나 중요시했는지를 알 수 있다.
특히 정원과 방을 연결하는 통로 역할도 하고 방문객과 소통 창구 구실도 하며 때론 주인이나 방문객 모두에게 휴식도 제공하는 툇마루의 존재는 아파트가 이웃 간의 소통을 방음벽처럼 가로막는 구조적인 문제를 생각하게 만든다. 이뿐만 아니라 에도는 여기저기에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광장 같은 넓은 공간을 일부러 만들어 두었다. 서로 평등하게 마주하고, 주변의 시선 때문이라도 싫든 좋든 시민의식을 유지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매력적이고 잘 관리되는 보행길과 광장 등은 민주적이고 성숙한 소통 문화를 위한 필수 기반이지만, 인도에서조차 오토바이와 전동차와 자전거가 당당하게 횡행하는 한국에선 보행자 마음은 늘 위축되고 긴장될 수밖에 없으니, 소통은커녕 시비나 사고라도 안 생기면 다행이다.
에도 사람들의 기준이나 사고방식으로 도저히 집이라 할 수 없는 아파트에 사는 한 사람으로서 『만족을 알다』를 읽고 나서야 일본 사람들이 코딱지만 한 정원이라도 있는 집을 장만하려는 열성의 정신적 근원과 골목골목을 장식한 크고 작은 화초에 담긴 취미 이상의 의미를 조금은 알 것 같다. 모든 사람이 에도의 무사들이 살았던 ‘진짜 집’ 같은 곳에서 살 수는 없다고 해서,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집을 지을 수 없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는 서로를 차단하고 격리하는 데 최적화된 닭장 같은 아파트에 만족해야 하는 것일까? 집에 사는 사람이 누군지 이야기해 주고, 사람에게 영감을 주고, 방문객과 편하게 소통할 수 있는 그런 아파트는 불가능한 것일까?
현대인의 기준으로 볼 때 에도 사람들의 삶이 비록 물질적으론 빈곤하게 보일지는 몰라도 정신적으론 오히려 현대인보다 더 충만했으리라 확신하면서 화마가 휩쓸고 지나간 숲처럼 앙상하고 삭막한 글을 마친다. 끝으로 한마디만 더 보탠다면,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온 우리에게 에도 시대 같은 지속 가능한 사회를 찬미하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는 않는다. 될 대로 되라지. 하지만, 그런 사회가 실제로 존재했었다는 사실만큼은 기억해 두고 싶다. 언젠가 도래할 3차 대전 후 또다시 재건의 시대가 오면 지금과 같은 실수는 굳이 반복할 이유는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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