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친구 | 스티븐 크보스키 | 천국과 지옥은 최종 목적지가 아니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
책 서두에 폭포처럼 쏟아지는 다소 엄포와도 같은 찬사를 보면 마치 허약한 사람이 읽었다간 심장마비나 뇌졸중 같은 급사로 비명횡사할 것 같은 무시무시하고 충격적인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듯 읽는 동안 무서워 벌벌 떨기는커녕 오도카니 공포를 음미하는 시간도 없었다. 온몸의 털이 돼지털처럼 곧추서는 일은 더더욱 없었고, 깨알 같은 얼음조각이 등을 흩고 지나가는 듯한 스산한 기운조차 느끼지 못했다.
대신 사르르 졸음이 밀려오는 경우는 왕왕 있었으니, 흡입력이 강한 소설이라곤 감히 말할 수 없겠다. (얼마 전에 읽은) 『천 개의 파랑』처럼 나도 모르게 빨려 들어가는 토네이도급의 흡입력이라든가, 일본 공포영화 ‘주온’이나 ‘링’처럼 수명이 며칠 졸아든 것 같은 무서움은 기대하지 말라는 말이다.
그것보단 착한 소년이 악마와 맞서 싸우며 지옥에 빠진 이웃 사람들을 구한다는 (반지의 제왕 같은?) 판타지 모험 소설로 읽는 것이 더 타당할 것 같고, 그쪽으로의 재미는 나름 나쁘지 않았다. 필력을 중시하는 독자들은 초반의 라이트노벨 같은 엉성한 문장에 급격히 실망할 수도 있을 텐데, 신기하게도 이 엉성한 문장들은 중후반으로 갈수록 눈에 띄게 좋아진다. 수사 형식이나 패턴을 보면 대필이라 보기는 어려울 것 같고, 그보단 작품 전체를 큰 시간 간격을 두고 집필한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아마도 집필하면서 문장력도 향상된 것은 아닐지 싶다.
어찌 되었든 2권이나 되는 짧지 않은 분량을 끝끝내 다 읽었으니 아주 재미없었다곤 말할 수는 없겠으나 찰떡처럼 이야기에 눌어붙게 하는 끈끈함은 기대 이하였다.
찬사와는 달리 무서움을 제대로 느끼지 못한 이유
스티븐 크보스키(Stephen Chbosky)의 『보이지 않는 친구(Imaginary Friend)』는 태양처럼 눈 부신 찬사들이 후광처럼 장식한 작품임에도 (재미는 괜찮았던 반면에) 무서움을 제대로 느끼지 못한 이유를 주절주절 늘어놓으면 아마도 이러할 것이다.
첫째, 공포소설에 대한 미천한 경험이 마치 잘 만든 공포영화 시청을 눈앞에 둔 듯한 섣부른 기대를 낳았을 것이다. 사실 내가 지금까지 읽은 공포소설은 찬호께이의 『염소가 웃는 순간(山羊獰笑的剎那)』과 고골의 『마녀의 관』 정도가 전부다. 아직 공포, 환상, 초자연적 소설의 대가 스티븐 킹 작품조차 읽어보지 못했으니 잘 만든 공포소설이 어떤 맛인지 잘 모르는 내가 『보이지 않는 친구』가 공포소설로서 ‘무서운’ 편에 속한 것인지 아닌지 가늠하기는 무척 어렵다.
둘째, 문화적 차이가 있다. 『보이지 않는 친구』는 기독교 세계관에 뿌리를 둔 종교소설로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소설 전체에 걸쳐 선과 악, 죄책감과 구원, 천국과 지옥 등 종교적 색채가 먹구름처럼 짙게 깔려 있는데, 이것은 무신론자가 읽기엔 불편한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 나 역시 그런 점들이 떨떠름했지만, 이것을 끝내 떨쳐내지 못하면 작가가 준비한 마술 같은 연출에 완벽하게 속아 넘어갈 수 없으니, 재미는 반감될 수밖에 없다.
셋째, 상상력의 부족을 들 수 있다. 소설은 영화처럼 모든 물리적 실재를 세밀하게 보여줄 정도로 친절하지 않다. 그래서 소설로 얻을 수 있는 감흥의 질과 깊이는 전적으로 독자의 상상력에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상상력과 공상력을 첫날밤을 어떻게 보낼지 궁리하는 신랑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비약적 수준으로 끌어올리지 못하면 오싹함은커녕 식은땀조차 흘릴 일은 없을 것이다.
넷째, 책 서두에 옹긋옹긋 올망졸망 나열된 찬사가 인터넷 서점이나 영화 사이트에 염치없이 달린 평점 조작 댓글 같은 과장 선전일 수 있다.
다섯째, 이런저런 공포영화를 하도 많이 봐서 그런지 공포를 느껴야 할 감성이 전장을 누빈 무사의 칼처럼 무뎌졌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보는 사람
『보이지 않는 친구』에 끌린 것은 다름이 아니라 바로 책 표지에 선명하게 찍힌 홍보 문구에 있었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보는 사람은 두 부류야. 예언가, 아니면 사이코패스.”
뭔가를 보고 다른 뭔가를 떠올리는 연상 시스템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보는 사람’이란 문장을 보고 가까운 기억 창고에 있던 드라마 「손(The Guest)」을 끄집어냈다. 신을 믿거나 말거나, 엄청나게 재밌었다는 흐뭇한 기억과 함께. 그리고 줄줄이 떠오르는 엑소시즘 영화들과 그 영화들을 보면서 콩알만 해질 정도로 걸쭉하게 졸여진 가슴도.
사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보는 사람’은 내가 볼 때 크게 두 부류가 있다. 첫 번째는 실재론 존재하지만 보통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사람, 두 번째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자신이 만들어 낸 다음 보는 사람. 첫 번째 사람은 드라마 ‘손’의 윤화평 같은 부류로 보통 ‘영매’라고 부른다. 두 번째 사람은 정신질환을 앓는 사람들로서 보통 ‘미친놈’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사이코패스’는 정신질환이 아니라 유전질환이므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보는 능력은 없다. 다만, 사이코패스 살인마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을 본다.’, ‘미지의 존재로부터 목소리가 들린다.’ 같은 미친 소리를 지껄이는 것은 미친 척함으로써 조금이라도 감형받으려는 영악한 계략일 뿐이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무튼, 책에 대한 사전 지식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표지의 홍보 문구만을 놓고 보면 ‘사이코패스 살인마’를 떠올리기 딱 좋다. 혹은 나만 그랬던가?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말이다. 어찌 되었든 이 홍보 문구라는 미끼에 제대로 코가 꿰인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순간순간 결정이 천국과 지옥을 결정한다!
드라마 ‘손’에서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원인은 살인자의 마음속 어둡고 약한 곳을 비집고 들어온 원한에 사무친 귀신으로 설명된다. 소설 『보이지 않는 친구』에서 악행은 악마의 달콤한 속삭임에 넘어간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진다. 두 작품은 종교도 다르고 문화도 다른 곳에서 태어났지만, 둘 다 악의 근원을 사람의 내부가 아닌 외적 요소에서 찾고 있다. 마치 사람의 본성은 악하지 않다고 변명하는 것처럼 말이다(이것은 범죄가 환경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는 범죄심리학과도 통하는 면이 있다).
필립 짐바르도의 유명한 ‘스탠퍼드 교도소 실험’(『루시퍼 이펙트(The Lucifer Effect)』)이 보여준 것처럼 사회심리학에선 평범한 사람이 악행을 저지르는 결정적 원인으로 환경과 시스템을 꼽는다. 기본적으로 사람은 중립인 것이다. 이것은 『보이지 않는 친구』서도 마찬가지다.
『보이지 않는 친구』에선 절대적으로 나쁜 사람도 없고 그렇다고 절대적으로 착한 사람도 없다. 사람들이 악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착한 사람이 되기도 하는 것은 산성 용액에 닿으면 빨간색으로 변하고 염기성 용액에 닿으면 파란색으로 변하는 리트머스종이 같다. 평소에 착하다는 평판을 얻은 사람이라도 악에 물들면 나쁜 사람이 되고, 평소에 나쁜 사람이라는 평판을 얻은 사람이라도 선함에 물들면 착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사회심리학에서 평범한 사람이 악행을 저지르는 원인으로 환경과 시스템을 꼽았듯 소설에서 평범한 사람을 타락으로 몰아가는 시스템은 탐욕, 분노, 증오, 죄책감 등이고, 환경은 악마의 속삭임이다(어찌 되었든 기독교적 세계관에 입각한 소설이니까).
분노와 광기, 슬픔과 죄책감, 증오와 질투에 속박당하는 사람들은 불행에서 벗어날 수 없으므로 삶 자체가 지옥이다. 그러므로 신앙이 세뇌하듯 주입한 죄책감으로 번뇌하는 메리 캐서린의 단말마 같은 깨달음처럼 천국과 지옥은 최종 목적지가 아니다. 우리의 순간순간 결정이 천국과 지옥을 결정한다. 당신의 결정이, 당신의 행동이, 당신의 마음가짐이 당신을 천사로 만들 수도 있고, 악마로도 만들 수 있다. 그에 따라 세상은 천국이 되고, 지옥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 위에선 일부러 언급하지 않았지만) 사람을 선함으로 물들이는 것은 무엇일까? 불행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일까?
세상을 천국으로 만드는 것이 간단한 것 같은데도 여전히 세상이 지옥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남을 탓하고 남의 것을 탐하기는 쉽지만 자기 잘못을 시인하고, 내 것을 내놓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숲에 대한 열망과 환상이 완독으로 이끌다?
이런 연유로 중도에 하차하는 불상사 없이 완독하기는 했지만, 아마 이보다는 지금부터 말하려는 설명이 이 책을 완독한 더 그럴듯한 이유일 수도 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친구』는 웬만한 한국인으로선 경험하기 어려운 미션스트리트라는 광활한 숲을 무대로 펼쳐지기 때문이다.
연구도 잘하고 글도 잘 쓰는 미국 과학자들의 살아온 내력을 보면 어린 시절은 십중팔구 숲과 가까이 있는 마을에서 자랐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숲과 함께 성장했기에 숲의 가치를 알고 숲을 사랑할 줄 안다. 그래서 그런지 (한국 과학자처럼 딱딱하고 건조한 교과서 같은 글이 아닌) 정서적으로 더 풍부한 글을 쓴다. 한국인도 그럴까?
옮긴이도 후기에서 언급했듯 나무로 이루어진 숲이 아닌 정감 없는 고층 건물로 이루어진 숲에서 자란 나 같은 사람들에겐 뒷마당엔 그네가 있고, ‘그 뒤로 끝없이 펼쳐진 숲’ 같은 주거 환경은 그 자체가 판타지나 다름없다. (일부러 차를 타고 먼 길을 가야 만날 수 있는) 산을 제외하곤 미션스트리트 숲처럼 평지에 나무가 우거진 숲을 한 번이라도 방문한 적이 있었던가? 한국인 중 소년 시절 천연기념물처럼 굵고 키 큰 나무 위에서 친구들과 함께 어기영차 나뭇집을 지으며 멋들어지게 모험심을 펼쳐 보였던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될까? 조선시대 사람에게 컴퓨터에 관해 잔뜩 설명한 다음 어디 한번 컴퓨터를 상상해 보라고 한들 우리가 생각하는 그것과 비교하면 터무니없을 정도로 어설플 것처럼 ‘진짜 숲’에서 성장한 사람들의 풍부한 감수성과 상상력을 우리는 영영 따라갈 수 없다.
그런 질투에 가까운 마음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정서적인 거리감을 형성하는 것은 나로서도 어쩔 수가 없으며, 이와 비슷한 소설을 한국인이 100% 소화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무 몇 그루와 벤치 몇 개 갖다 놓고 ‘공원’이라고 잘도 씨부렁대는 곳에서 사는 나로서는 일상에 숲이 포함되는 것을 마땅하게 여기는 그들의 삶이 그저 부럽고 부러울 따름이다.
공포소설임에도, 작은 소년이 거대한 악과 대적한다는 아찔아찔한 이야기임에도 문득문득 동화처럼 아름답고 낭만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내 삶에서는 결코 해갈할 수 없는 진짜 숲에 대한 열망과 환상에 허덕이는 나의 불우한 영혼이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보는 듯한 환각 상태에 빠지기 때문일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만들어서라도 본다면 나도 크리스토퍼처럼 나만의 나뭇집을 짓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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